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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의 쉼터

삼성산 성지(서울 신림동, 2007. 3. 21.) 본문

[♡ 자유와 평화 ♡]/한국천주교 聖地

삼성산 성지(서울 신림동, 2007. 3. 21.)

자유인ebo 2007. 3. 30. 00:18

 

 

  

삼성산 성지(三聖山聖地)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10동 산 78

 

세 분 성직자 순교성인의 유해가 모셔저 있던 곳

                         

  

 

 

  작년(2006)에 삼성산 산행에서 성지(聖地)를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에 그동안 여러 번 방문생각을 하였으나 기회가 잘 나지않았다. 오늘 모처럼 아침 일찍 근무가 끝이나면서 그동안 벼르던 삼성聖地를 찾게 되었다.

 

교통편을 검색하니 지하철 2호선 신림역 3번 출구로 나와서 151번 버스를 타면 된다고 했나 정류장 표시에 151번이 보이지 않고 5522(난)번 난곡가는 초록색 버스가 있었다.

 

신림동 삼성산성지앞 정류장에 내리니 횡단보도가 있었고 횡단보도를 건너니 성지입구 안내표지판과 산 쪽으로 넓은 길이 보였다.

 

길따라 200여 미터를 가니 성당이 보였고 예수님이 두팔벌려 반기신다. 안으로 들어가니 성모상, 김대건 신부상이 있고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기도하러형제님들이 쉬는 시간을 이용해 커피자판기 앞에서 담소하고 있었다.

 

나도 코코아 한 잔을 먹고 정문 우측으로 해서 세 분 순교성인의 유해가 모셔졌던 성지로 향했다. 산으로 향하는 길은 넓었고 5분 정도 걸어가니 이정표가 보이고 성지 입구에는 팔각정 정자가 세워져 있었으며 약수터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베낭을 메고 와서 물병에 물을 담고 있었다.

 

성지 입구에는 세 분 성인의 모습이 담긴 표지판이 있었고 그 옆에 성지로 가는 나무 계단이 있었다.

 

성지 주변에는 인근 주민들을 위한 운동기구들이 많이 설치되어 있었고 소나무들도 보기좋게 자라고 있었으며, 소나무 숲 속에 십자가의 길에서는 자신의 키보다도 훨신 큰 통나무 십자가를 맨 할머니와 자매님들 7~8 명이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었다.

 

나도 그 뒤를 따라 십자가에 못밖히시고 돌아가신 예수님과 세 분 성직자 순교성인들을 생각하면서 십자가의 길을 한 바퀴 돌고, 삼성산 산행길에 나섰다.

 

 

 

 

  삼성산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의 형을 받고 순교한 성 라우 앵베르 범(范) 주교와 성 베드로 모방 나(羅) 신부, 성 야고보 샤스땅 정(鄭) 신부의 1836년 부터 1901년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 묘소로 모셔질 때까지 묻혀 있던 묘자리이다.

 

 

 

 

 

본래부터 삼성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던 이곳은 앞날을 예고하듯 세 분의 순교 성인이 묻힘으로써 명실공히 삼성산(三聖山)의 품위를 갖추게 되었다. 삼성산이라는 명칭은 신라 때의 명승 원효(元曉) · 의상(義湘) · 윤필(尹弼) 등 3명이 수도한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설과 고려 말기에 불교계를 이끌던 나옹(懶翁-1320∼1376), 무학(無學-1327∼1405)과 인도승려 지공(指空-?∼1363) 스님 등이 이곳 삼성산에 올라가 각기 자리를 잡고 수도, 전진했다는 연고로 삼성산(三聖山)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한국 천주교회사상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디딘 외국인 성직자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후 30년만인 1831년 조선의 천주교회는 중국 북경교에서 독립해 '조선 교구'로 설정된다. 


 

 

 

이어서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인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가 입국함으로써 조선의 교우들은 주문모 신부 이후 한 세대가 훨씬 지나서야 목자에 대한 갈증을 풀게 된다.

이들 세 성직자는 상복(喪服)으로 얼굴을 가리고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밤낮으로 험한 산길을 걸으며 복음 전파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불과 1년 사이에 신자수가 9천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던중 외국 선교사의 입국 사실이 알려짐에 따라 교우들에 대한 탄압이 가열되고 가엾은 어린양들의 희생이 늘어나자 목자들은 가슴 깊이 피눈물을 흘린다. 앵베르 주교는 수원의 한 교우집에 피신하던 중 모방, 샤스탕 두 신부를 불러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한 다음 각자 소임지로 돌려보냈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의 책략으로 인해 거처가 알려져 포졸들이 들이 닥친다. 그는 화(禍)가 여러 교우들에데 미칠 것을 염려해 스스로 잡힌 몸이 되고 두 신부에게도 자헌 치명(自獻致命), 곧 스스로 관헌에 나아가 신앙을 고백한 후 순교하기를 권했다.


           

           

           

          기해박해(1839년)가 시작되고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38년 전, 주문모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새남터에서 희광이의 칼 끝에 이슬이 되고 만다. 이 때 앵베르 주교의 나이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로 동갑이었다.

           

           

           

          이들의 시체는 사흘 동안 버려져 있다가 한강변 모래톱에 묻힌다. 교우들이 유해를 거두자 애쓴지 나흘째 되는 날 세 명의 교우가 시체를 훔쳐 내려다 그중 한명이 붙잡혀 옥에 갇히고 만다. 그 후 스무 날 가량 지난 뒤 7-8명의 교우가 죽음을 무릅쓰고 감시의 눈을 피해 유해를 거두는 데 성공한다. 교우들은 유해를 큰 궤에 넣어 노고산(老姑山)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그리고 4년 후, 당시 파수를 피해 유해를 훔쳐 낸 교우 중 하나인 박 바오로가 가문의 선산인 관악산 줄기 삼성산에 유해를 이장한다. 박 바오로는 이 사실을 아들인 박순집에게 알려주고 그 자신도 일가들과 함께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순교하게 되니 1868년 3월 절두산에서의 일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부터 4년간 박순집의 가문은 16명의 순교자를 배출했고, 자신은 1982년 82세를 일기로 선종하기까지 인천 교회의 창설에 여생을 바쳤다. 16세 때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들어가 우리 나라 최초의 수녀가 된 박 사베리오(1872-1966년)는 박순집의 막내딸이기도 하다. 한편 박순집 일가를 기념하기 위한 비가 절두산 순교 기념관 정원에 세워져 있어 순례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삼성산에 1834년부터 1901년까지 58년간 묻혀 있던 세 성직자는 1925년7월 25일 시복되었다. 1970년 5월 김수환 추기경과 고(故) 노기남 대주교, 오기선 신부는 이곳에 세 분의 매장지임을 확인하고 이를 기념하는 소형 비석을 그 자리에 세웠다. 또 1981년 9월에는 신림동 본당 교우들에 의해 구상 시인의 헌시와 비문이 새겨진 현재의 비석이 세워졌다.

           

          1984년에는 한국 천주교 2백주년을 기해 세 성직자가 시성의 영광에 오른다. 이를 기념해 사적지 부근의 땅 1만 6천여 평을 매입, 1989년에 그 유해를 다시 천묘해 축성식을 가졌다. 그리고 1992년에는 신림본동 본당에서 분리, 삼성산 본당이 신설됐다.
           

           

           

                        

           

           

          앵베르(Imbert) 주교 본명 라우렌시오 한국 이름 범 세형(范世亨) 1819년 사제서품 1825 부터12년간 중국 사천교구 의 선교사 1836년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37년 주교로 성성 동년말 조선에 입국 1839년 대 박해가 일어나자 교우들의 더 많은 희생을 막기위해 자수하는 동시에 두 선교사에게도 자수를 권고 동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향년 44세. 

           

          모방(Maubant) 신부 본명 베드로 한국이름 나 백다록(羅伯多祿) 1829년 사제서품 1835년말 조선에 입국 교구장이 입국하기 까지 부주교로서 조선교구를 관장 입국하자 김대건 최양업 등을 신학생으로 선택하여 마카오에 유학시킴 기해 박해(1839)중 교구장으로 부터 자수권고를 받고 기꺼히 복종 교구장과 더불어 새남터에서 1839년 9월 21일 순교하였다. 향년 37세.

           

          샤스땅(Chastan) 신부 본명 야고보 한국이름 정아각백(鄭牙各伯) 1826년 사제서품 조선 선교사를 자원 1836년말 조선 입국에 성공 남부지방에서 성사집전중 교구장으로 부터 자수권고를 받고  기꺼이 복종 서울로 압송되어 교구장 및 동료 모방신부와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향년 37세.

           

          이상 세분의 선교사는 1857년 가경자(可敬者) 1925년 복자로 선포됨, 이들의 유해는 열심한 신자들에 의해 새남터에서 거두어져 임시로 노고산에 매장되었고 1843년 이곳 삼성산으로 이장되었으며 1901년 명동 대성당 지하성당으로 이장 되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을 격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굳굳이 지켜온 신앙의선조와 성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들은 고통없는 신앙생활을 하고있다. 반면에 너무나 자유롭고 걸림돌이 없다보니 쉽게 신앙생활을 멀리 하거나 떠나는 사람들이 많은 것 은 아닌지? 나 스스로도 신앙생활보다도 세상생활에 더 가까워지고 있음은 부인할 수가 없다. 사순시기인 이때 만 이라도 신앙의 선조들 발자취를 돌아보면서 내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여유를 갖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 성 범 라우렌시오 앵베르, 성 나 베드로 모방, 성 정 야고보 샤스탕과 한국의 모든 순교 

              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범 라우렌시오 앵베르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나라의 모든 주교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나 베드로 모방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나라의 모든 외국인 성직자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정 야고보 샤스탕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나라의 모든 성직자들의 정결과 순명정신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삼성산성지에서 2007. 3. 21. 자유인ebo  -

           

           

           


                    칼날보다 서슬 푸른  (삼성산에서)    

           

                                                                글 / 김영수


                   먼 먼 땅에서 뜨거운 꿈 품고

                   거칠고도 어둔 이 땅 찾아 와

                   빛을 내면서 빛으로 장히 사라진 이들

                   피로써 이룬 고백에는

                   늘 하늘 밝아 있는 것입니까

                   칼날보다 서슬 푸른 기도로

                   하늘 여는 일, 그 서늘한 그늘에서

                   빛나며 식지 않는 약속

                   가장 멀리로 떠나는 일이

                   가장 가까이로 돌아오는 일입니까

                   내가 어둔 골목에서도

                   하늘 잃지 않는 것은

                   내 아직도 약속 기억하고 있음입니까

                   흰 구름들이 일제히 푸른 숲에 내리며

                   맑게 익는 피의 향기에다 머리를 풀고

                   한낮에도 보이는

                   씻은 별 하나씩 그려내고 있습니다

           

           

           

           

           

           

          ■ 순교자

           

          ◆ 성 범 라우렌시오 앵베르(Imbert) 주교(1796-1839)


           

          한국명은 범세형(范世亨), 조선교구 제 2대 교구장. 주교로서는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그는 같이 선교에 종사하던 나(모방), 정(샤스탕) 두 신부와 함께 1839년 기해박해 때 한강변새남터에서 목을 잘려 순교하였다. 그는 조정에 의해 대박해가 일어나 더 이상 전교할 수없게 되자 자신은 물론 나중에는 두 동료 신부들에게까지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라는 말로 자헌을 권유하였다.

           

          범 라우렌시오 주교는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인 소(브뤼기에르) 주교가 입국도 못한 채 병사하자 교황청에 의해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37년 5월, 주교로 성성되었으며 그 해 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그의 입국으로 조선교구는 그보다 앞서 입국한 나, 정 두 신부와 더불어 교구 설정 6년만에, 그리고 교회 창설 53년만에 비로소 전교 체제를 갖추었으며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복음전파에 힘쓴 결과 신자수는 1839년 초 9천 명을 넘게 되었다. 그는 또 한국인 성직자의 양성에도 뜻을 두어 정하상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을 뽑아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신부로 키우고자 하였으나 때마침 불어닥친 박해로 말미암아 성공하지 는 못하였다.

           

          범 주교는 1797년 4월 프랑스에서 태어나 1819년 12월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부가 되었으며다음 해 3월 파리를 떠나 조선에 입국하기까지 중국 사천(四川) 교구에서 10여년 간 사목활동에 종사하였다. 1839년 대 박해가 일어났을 때 지방을 돌아보고 있던 범 주교는 조정에의해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 사실이 알려져 포졸들의 추적이 심해지고 교우들에 대한 박해 가열되자 하는 수 없이 수원에서 가까운 바닷가 어느 교우집에 몸을 숨기었다. 여기서 그는 나, 정 양 신부를 불러 두 사람에게는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하며 두 사람을 각기 소임지로 돌려보냈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의 책략으로 그의 거처가 알려지게 되자 그는 화가 여러 교우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나아가 포졸들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으며 나 신부와 정 신부에게도 인편으로 자수할 것을 권유하여 다같이 1839년 9월 21일 군문효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그의 나이는 43세, 조선에 입국한 지 불과 2년만이었다.

           


          ◆ 성 나 베드로 모방(Maubant) 신부(1804-1839)


          한국명은 나백다록(羅伯多祿). 서양인으로서 최초로 조선에 입국하여 순교한 신부. 그는 1836년 1월 입국하여 1839년 새남터에서 순교하기까지 3년 9개월 간 헌신적인 포교활동을 폈으며 특히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된 김대건과 최양업, 최방제 등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에 유학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프랑스 베시에서 태어난 나(모방) 신부는 1831년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가 되어 그 이듬해 동양에 진출, 중국을 거쳐 1836년 1월 의주의 변문을 통해 조선 입국에 성공했다. 그는 서울에서 정하상의 집에 머물며 경기 충청 등 지방까지 순회, 전교하였다. 또한 그는 이 땅에 들어오자 곧 전교회의 방침에 따라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마음을 두고 1836년 2월에 최양업을, 3월에는 최방제를, 7월에는 김대건을 서울로 불러 이들 세 소년에게 직접 라틴어를 가르치고 장차 성직자가 되는 데 필요한 덕행을 쌓게 하던 중 때마침 귀국하는 중국인 신부 유방제와 함께 이들을 비밀리에 마카오로 유학시켰다.

           

          그후 나 신부는 이들 세 소년을 전송한 교우들과 만나 1837년 1월 무사히 서울에 들어온 정(샤스탕) 신부와 함께 손을 나눠 각 도의 흩어진 교우촌을 찾아 밤낮으로 모든 고난을 이겨가며 전교에 힘쓴 결과 입국 당시 불과 4천 명이었던 신자수는 제 2대 교구장 범 주교가 입국한 1837년 말에는 갑절이 넘는 9천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39년 기해대박해가 일어나고 서양인 성직자가 3명이나 입국한 사실이 점차 소문으로 퍼져 당국에 알려지게 되자 마침내 순교의 날이 닥쳐온다.

           

          범 주교는 박해가 일어나 신변이 위험하게 되자 처음에는 자신만이 자수하고 두 신부(나 신부, 정 신부)에게는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고했으나 형편이 그렇게 못되었고 결국은 범 주교에 이어 두 신부도 자진하여 포졸에게 몸을 맡겨 관가에 자수하였다. 그는 1839년 9월, 홍주에서 정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모진 형벌을 받은 끝에 범 주교, 정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35세, 한국에 입국한 지 3년 9개월 만이었다.  

           


          ◆ 성 정 야고보 샤스탕(Chastan) 신부(1804-1839)


          한국명은 정아각백(鄭牙各伯), 이 땅에 두 번째로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로 1839년 기해박해 때 범 주교, 나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정(샤스탕) 신부는 1803년 10월, 프랑스 태생으로 1827년 1월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가 되었으며 같은 해 4월 동양 포교지의 하나인 페낭 섬으로 떠났다. 그는 그곳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중 마침 소(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임지로 떠나게 되자 함께 동행하기를 자원, 1833년 5월 그곳을 떠났다. 그후 3년 간을 중국 대륙과 몽고, 만주 등지를 전전하며 조선 입국의 기회를 기다렸으나 쉽게 뜻을 이를 수가 없었다.

           

          그 동안 소 주교는 입국도 못한 채 만주 땅에서 병을 얻어 목숨을 잃었으며 1836년 1월 조선 입국에 성공한 동료 나 신부로부터의 기별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마침내 1836년 12월 나 신부의 기별을 받고 의주 변문으로 간 정 신부는 마카오로 유학가는 김대건 등 세 소년 신학생을 전송하던 교우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그들과 함께 무사히 국경을 넘어 이듬 해인 1월 서울에 도착했다.

           

          정 신부는 서울에 도착하자 곧 한국말을 배우는 한편 나 신부와 손을 나누어 각 지방에 산재해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집행했다. 정 신부 등 당시의 서양인 성직자들은 상제 옷으로 변장하고 험한 산길을 헤매야 했고 먹을 것도 여의치 않아 소금에 절인 야채 따위로 공복을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해를 듣고 미사를 드린 다음날 새벽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재촉해안만 했다. 그들은 이러한 고난을 감수해 가며 오직 복음전파에만 힘썼던 것이다.

           

          정 신부는 한때 중병을 앓게 된 나 신부를 서울까지 올라와 간호해야 하는 어려운 일도 겪었으나 다행히 무사했으며 1837년 12월에는 제 2대 교구장 범 주교가 입국에 성공하여 전교활동은 차츰 본격화되어 갔다.

           

          그러나 1839년 몰아닥친 기해 대박해는 이 땅을 수많은 천주교인의 피로 물들였고, 정 신부도 범 주교, 나 신부와 함께 그 해 9월 21일 새남터에서 마침내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정 신부의 나이는 35세요, 이 땅에 들어온 지 2년 9개월 남짓이었다.

                                                          - '한국의성지'에서 -


           

          미사시간

          평일 : (월화목금토) 오전 7:00(소성당)

          주일 : 오전 10:30 (소성당)

          성지미사 : 매주 오전 11:00 (주일미사), 매월 21일 오전 11:00 (월례미사)

          연락처 : 삼성산 성령수녀회 (02) 874-6346 FAX : (02) 887-9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