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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리성지 1. (무명순교자묘/충남 합덕) 본문

[♡ 자유와 평화 ♡]/한국천주교 聖地

신리성지 1. (무명순교자묘/충남 합덕)

자유인ebo 2007. 11. 1. 21:16

  

신리성지 (충남 합덕. 07. 10. 28 

신리 32기의 무명 순교자묘 와 14기의 손씨 가족 순교자묘

 

우리 레지오 단원들은 야외행사로 최근 새로이 알려진 당진군 합덕읍 신리성지를 찾았다. 서울에서 출발 신리입구에 도착하니 신리성당 신부님께서 미리 나오셔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계셨다.

 

신부님의 안내를 받아 좁은 시골길을 조금가니 길 좌우편 과수원에는 탐스럽게 익은 사과가 우리를 반겨주기나 하듯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작은 주차장에 도착하니 온통 시멘트를 뒤집어쓴 이상한 묘지도 우리들의 관심을 끌었다.

 

우리들은 차에서 내려 신부님께서 가리키는 무명순교자 묘소로 향해 발길은 옮겼다. 공동묘지라고 하지만 묘의 봉분들은 그리 많지가 않았고, 앞서 가시던 신부님은 애기봉분 같은 작은 묘 6기가 있는 곳에서 발길을 멈추셨다.

 

신부님께서는 석관동 성당에서 순례온다는 연락을 받고 신학생 시절에 신학교 동기생의 본당이라 관이 많았다는 말씀을 서두로 이곳 신리성지에 관해서 차분하면서도 강한 언조로 설명하기 사작하셨다.

 

충청도 내포지방의 중심부에 자리한 이곳 신리는 한국천주교회 초기부터 많은 신자들이 살았으며, 정부의 천주교 박해로 인하여 수많은 무명순교자들이 묻흰 한국천주교회의 못자리라고 말씀하셨다.

 

 

 <주차장에서 무명 순교자묘로 향하는 순례자들>

 

무명 순교자의 묘는 합덕읍 대전리 성인 손자선 선산인 야산에 약 40기가 산재해 있다.


성인 손자선 토마스의 유해는 신리 교우들이 거두어 그가 평생을 두고 살아온 신리에서 가까운 그의 산에 묻었다. 그의 발 옆에는 그가 옥중에서 써 보낸 편지를 그의 술잔에 담아 묻음의 표지로 묻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구두로 전해 오는 바에 의하면 이 산에는 손자선 성인의 무덤뿐만아니라, 무명의 순교자들도 많이 묻혀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하였다.

 

 

<목이 없는 32기의 무명순교자 유해가 6개의 봉분에 합장 이장되었다.>

 

제1차 파묘

과연 1972년에 그 산 일부가 개발되어 94,400평이 과수원으로 개발되었는데 그때 32기의 연고자 없는 고총이 파묘되었을 때 묘마다 목이 없었고 시신만 나왔다고 목격자들은 말하고 있다.

 

 

<이곳에 32기의 유해가 묻흰줄도 모르고 앞뒤로 묘가 들어섰다.>

 

또한 묘마다 묵주가 나왔는데 그 양이 그때 시골 바가지로 한 바가지 정도나 될 만큼 모두어 있었다고 한다. 구전에 의하면 대원군이 천주교인들을 목베어 죽이고 목은 수효를 확인하기 위해 가져가고 시신을 버렸다고 한다.

 

 

<신부님으로 부터 여기에 이장되기까지의 과정을 듣는 순례자들>

 

 32기의 시신은 그 당시 강계에 살던 손석윤씨가 10여 명의 교우를 데리고 와서 사과 상자 4개에 담아서 지고 그곳에서 1km 떨어진 어떤 공동 묘지에 일렬 횡대로 6봉분에 나누어 합장하였다고 한다. 이 이장 장소는 합덕읍 대전리 소재의 중상부에서 서남향으로 6기의 분묘가 발견되었다.

 

<32기의 무명 순교자 유해가 주변개발로 인해 여기에 이장되었음을 설명하는 신부님>         

 

 

제2차 파묘

또 그 산 일부가 개발되어 공장이 들어서기 때문에 그때에도 14기가 파묘되었는데 현재 당진군 합덕읍 대전리 공동묘지 중상부 동북향으로 14기의 묘는 1985년 4월경에 김병국(金炳國)씨가 동료 김영기(金永寄), 최동철(崔東喆)씨와 함께 이장한 무명 순교자 묘이다.

 

김병국씨는 이곳 신리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전해 들은 얘기로 이 지역의 대부분의 땅이 치명자 손씨 땅이었고, 손 성인의 묘와 많은 순교자가 이곳에 묻혀 있다고 한다. 

 

특히 대전리120-8에 있는 10수 기의 묘는 손씨 가문의 치명자 묘라는 사실을 구전으로 듣고 익히 알고 있던중 이 묘역을 포함한 이 일대가 공장 용지로 개발됨에 따라 지주 서종순(徐鍾淳)씨로부터 묘 이장 작업 청탁이 있기에 상기 동료와 함께 작업중 십자가(길이 약 10cm)가 채굴되고 손씨 문중 치명자라는 구전도 듣고 해서 정중히 이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나온 십자가는 굴삭기 기사가 일도 안하고 따라다니면서 달라고 해서 주었다고 한다. 14기의 묘는 구전으로 전하는바 손씨 치명자 가족묘로 전해 오고 있다.

 

 

<손씨 가문의 치명자 묘에 관하여 설명을 듣고있다.>

 

 

순교자 / 성 손자선 토마스(1838-1866, 농부, 병인박해  때 교수)


손자선은 충청도 홍주 거더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3대째 내려오는 교우집안으로, 아버지와 형은 1868년 무진년 박해 때 순교하였고, 그의 당숙 손 니콜라오도 순교하였다. 부인과 함께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중심으로 전교했으며 순교 자료를 모아 성직자들에게 전하였다.

 

1866년 3월 거더리에서 안 다블뤼 주교가 체포된 후 덕산 관아로부터 압수한 물건을 찾아가라는 기별을 받았으나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손 토마스는 혼자 덕산 관아로 가서 찾아온 사유를 밝혔다.

 

이때 원님이 천주교 신자냐고 묻자, 그는 신자임을 밝히면서 자신은 사실 죽음도 두렵지만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배교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토마스는 그 자리에서 즉각 체포되었고, 원님은 갖은 고문으로 그의 의지를 꺾으려고 애를 썼으나 모두 수포로 돌아가자 다리를 묶어 거꾸로 매달게 하였다.

 

<순교자 묘소를 떠나는 순례자들> 

 

 그리고는 포졸들이 토마스의 입에 온갖 쓰레기를 쏟아 부으며 "야, 좋지!" 하고 놀려댔다. 토마스가 "좋니다" 하고 응수하자, 포졸들은 "그래, 무엇이 좋단 말이냐?" 하고 되물었다. "나는 며칠동안 세수를 못했는데 여러분들이 내 얼굴을 씻어주고 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피를 흘리게 한 죄인에게는 이같이 좋은 일이 없으며 또한 목이 몹시 탔는데 쓸개와 식초 대신 이런 것들을 내 입에 넣어주니 나는 마치 내가 범한 죄들을 마셔버리는 듯하여 무척 즐겁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후 토마스는 여러 곳으로 옮겨다니며 더욱 참혹한 형벌을 받았고, 마침내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손자선은 그곳 원님이 "네가 끝까지 배교하지 않는다는 증표로 네 손으로 네 살점을 떼내든지 아니면 피를 보이든지 하여라" 하고 말하자 즉시 자기 이빨로 손등을 물어 뜯었다. 원님도 어쩔 도리가 없어 "이젠 너는 살 길이 없구나" 하자 "죽어도 좋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결국 1866년 3월 30일 공주 옥에서 목을 졸려 순교하였다. 그때 나이는 28세였다. (출처:한국의성지)

 

○ 성 손자선 토마스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손자선 토마스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 모든 농민들, 특히 교우 농민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신리성지 약도>

 

 

오직 사랑 때문에 (순교자 성월) - 이해인

  

번번이 결심을 하면서도
세속적 욕망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비열한 마음
죄를 짓고도
절절히 뉘우칠 줄 모르는 무딘 마음
믿음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지 못하는
냉랭한 마음

우리의 이러한 마음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안에 피흘리며
울고 계신 님들이여

어서 산이 되어 일어나
말씀하소서
고통의 높은 산을 넘어
끝내는 목숨 바칠 수 있는 믿음만이
믿음이라고 -

어서 굽이치는 강이 되어
소리치소서
고통의 깊은 강을 건너
끝내는 죽을 수 있는 사랑만이
사랑이라고 -

남들이 가지 않으려는
가파른 생명의 길
고독한 진리의 길을
그리스도와 함께 끝까지 걸어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하신 님들이여

이제 우리도
가게 하소서

어제의 환상이 아닌
오늘의 아픔의 무게
꽃처럼 고운 꿈이 아닌
피투성이의 십자가를 지고
우리도 님들을 따라가게 하소서

오직 사랑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 않는
용기와 지혜를 주소서

우리 마음의 어둠을 밝히시려
날마다 흰 옷 입고 부활하는
미쁘신 님들이여
산천이 울리도록
우리를 부르소서
그리운 님들 안에
하나 되게 하소서

 

 

- 2007.2.28. 신리성지에서, 자유인eb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