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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조상 제사 문제와 신해 교난(辛亥敎難) 본문

[♡ 자유와 평화 ♡]/한국천주교 歷史

8. 조상 제사 문제와 신해 교난(辛亥敎難)

자유인ebo 2011. 8. 24. 10:35

 

7. 조상 제사 문제와 신해 교난(辛亥敎難-1791 정조15년) 

 

 

 

(1) 최초의 수난과 임시준성직제도(臨時準聖職制度)


  이 벽은 수십 인의 동지들과 더불어 1784년 겨울부터 김 범우(金範禹)의 집에 모여 주일 행사를 거행함으로써 자발적으로 조선 천주교회를 창설하는 기적을 보이게 되었으나, 이 신설 교회는 그후 몇 달도 못가서 정조(正祖) 9년 을사(乙巳, 1785) 3월에 관헌(官憲)에게 발각되어 그곳에 모였던 신자들은 잡히고, 교회서적 · 성화(聖畵) 등은 압수되어 형조(刑曹)에 넘겨졌다. 그래서 이후 억지로나마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한불 수호조약(韓佛修好條約)이 비준(批准)된 1887년에 이르기까지의 1백 3년 동안 공적(公的)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때 형조 판서이던 김 화진(金華鎭)은 잡혀 온 신자들이 이름난 양반 집의 자제들로서 잘못하여 입교(入敎)하게 된 것으로 여기고, 그들을 타일러 내보내고, 다만 그 집을 교회로 삼았던 김 범우만을 잡아 가두게 하였다. 이에 권 일신이 그의 아들 상명(相命)과 이 윤하(李潤夏, 李睟光의 8代孫이며, 권 일신의 매부) · 이 총억(李寵億) · 정 섭(鄭涉) 등 5인을 거느리고, 형조로 달려가 그와 함께 다스려 줄 것과 예수성상(聖像) 등의 반환을 요청하니, 형조 판서는 그들이 또한 이름난 집안의 사람임을 알고, 크게 놀래어 꾸짖고 성상 등을 내주었다.

 

  그리고 형조에서는 김 범우를 엄히 문초하고 옥에 가두었다가 그해 가을에 밀양 단장(丹場)으로 귀양 보냈는데, 그는 그곳에 가서 수주일 후, 태형에서 입은 상처로 객사(客死)하게 되었으니, 그는 조선 천주교 사상 첫 번째의 순교자이었다.

 

  이때, 형조에서 양반출신의 신자들에 대하여 관대한 태도를 보이게 된 것은 때마침 영조(英祖)의 뒤를 이은 정조(正祖)가 탕평책(蕩平策)을 써서 인재를 등용하고, 특히 남인(南人) 출신의 채 제공(蔡濟恭)을 예조 판서 · 병조 판서 등으로 삼아 그 일파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채 제공은 그 뒤 우의정 · 좌의정을 거쳐 정조 17년(1793년)에는 영의정에까지 올라 정조의 극진한 사랑을 받게 되었으므로 그의 재직 시절에는 천주교 박해가 크게 일어나지 않았었다. 이것은 채 제공이 정조의 아버지이며 영조의 아들로서 영조 38년(1762)에 계모 정순황후(貞純皇后)의 책동으로 피살된 사도 세자(思悼世子)를 동정함으로써 10년 뒤에 분파(分派)된 남인 중의 시파(時派)에 속하여, 정순 황후일파의 벽파(僻派)와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정조 시대에 있어서 천주교회가 창설되고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한편 정조가 그를 동정하던 남인시파의 인재를 감싸준 데 말미암은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조선 천주교회는 비록 형조 금리(禁吏)의 적발로 한때 해산되고,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 이 용서(李龍舒) 등이 통문(通文)을 유림(儒林)에 돌려 이의 철저한 제거책을 주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의 힘으로 되살아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승훈도 그의 동생이던 이 치훈(李致薰)의 반대에 못 이기어 한때 마음이 흔들렸으나, 1786년 봄부터는 다시 교회운동을 일으켜, 북경 교회를 본따 권 일신이 주교(主敎)가 되는 한편, 이 승훈, 정 양전, 최 창현(催昌顯), 내포(內浦)의 이 존창, 전주의 유 항검 등 10여 명의 신부(神父)가 되는 가성직제(假聖職制)를 만들고, 돌아가면서 설교를 하고 세례를 주며, 고죄(告罪)를 듣고 견진 성사(堅振聖事)를 베풀며 미사를 지냈다.



(2) 조상 제사 문제와 신해 교난

 

  이러한 가성직제를 몇 해 동안 시행하는 사이에 권 일신 등은 교회 서적을 다시 검토하여 본 결과 1788년에 이르러 의문이 생겨 이를 중지하고 북경에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10월에 떠나는 동지사(冬至使) 이 성원(李性源) 일행을 따라 윤 유일(尹有一)로 하여금 밀서(密書)를 가지고 북경에 들어가, 이를 북경 주교(主敎) 구베아(Gouvea, 湯士選)에게 전달하고 조선 교회의 사정을 자세히 알리게 하였다. 북경주교는 이 편지를 받고 크게 감탄하는 한편, 곧 가성직제의 불가함과 세례 이외의 어떠한 성사(聖事)도 집행할 수 없음을 적은 답서(答書)를 만들어 주니, 윤 유일 바오로는 이것을 가지고 이듬해 3월에 서울로 돌아와 이를 이 승훈 · 권 일신에게 넘겨주었다. 이에 권 일신 등은 북경 주교의 지도에 따라 이제까지 집행해오던 성무(聖務)를 중지하고 곧 그해 5월에 떠나는 사은사(謝恩使) 황 인점(黃仁點) 일행을 따라, 다시 윤 유일로 하여금 밀서를 가지고 북경에 들어가게 하였다. 이 밀서에는 신부(神父)의 파견을 간청하는 외에 조선에 있어서의 조상 제사(祖上祭祀) 등에 관한 문제도 문의하였다.

 

  이러한 내용의 편지를 받고, 북경주교가 다시 감탄하는 한편 멀지 않아 한 신부를 보내줄 터이니 모든 준비를 갖출 것과 조상 제사의 미신 행위는 금지한다는 뜻을 적은 답서를 만들어 주니, 윤 유일들은 이것을 가지고 그해(1790) 10월에 서울로 돌아왔다. 이 답서를 받은 조선교회는 신부를 맞게 될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에 즐거워하였으나, 한편 조상 제사를 미신이라고 단정하여 결코 행하지 말도록 하라는 주교(主敎)의 교시로 많은 신자들이 용기를 잃고 반대자들에게 좋은 구실(口實)을 주게 되었다. 그 결과 이듬해 신해년(辛亥年, 1791) 겨울에는 마침내 전라도 진산(珍山)에서 정 약용의 외종(外從)인 윤 지충(尹持忠)과 권 상연(權尙然)이 순교하는 신해교난(辛亥敎難)을 겪게 되었다.

 

  윤 지충은 의학(醫學)에 정통한 윤 경(尹憬)의 아들로 진산(珍山)에서 태어나 1783년 봄에 소과(小科)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되고, 이듬해에는 서울로 올라와 대과(大科)를 치루기 위해 글을 닦고 있었는데, 때마침 김 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천주실의》· 《칠극》 등을 얻어 보고, 내종형(內從兄) 정 약전의 가르침에 따라 1787년에 세례를 받고 굳게 신앙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북경 주교의 명령에 따라 조상의 제사를 폐지하고, 그 신주(神主)를 불태워 재를 집 뜰 안에 묻었을 뿐더러, 1791년 5월에 그의 어머니 권씨(權氏)가 별세하자 그 외종(外從) 권 상연(權尙然)과 더불어 모든 예절을 갖추어 8월에 장례를 치렀으나, 오직 그의 신주를 만들지 않고 제사도 드리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장례에 참석했던 친척들과 동네 사람들로부터 불효자식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고 반대자들의 고발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소문을 듣고, 서울에 살던 승정원 가주서(承政院假注書) 홍 낙안(洪樂安)은 그해 10월에 장문(長文)의 고발장을 좌의정 채 제공에게 올려 윤 지충을 처벌하여 줄 것을 진언하는 한편, 진산 군수 신 사원(申史源)에게는 그의 집을 수색하여 그들을 체포하도록 요청하였는데, 홍 낙안은 이에 앞서 1787년과 이듬해에도 천주교를 몹시 반대하는 글을 임금에게 올려 이를 근절하려는 운동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짐작한 윤 지충은 한때 광주(廣州) 고모댁으로 피신하였으나, 그의 숙부가 대신 잡혔다는 소문을 듣고, 곧 귀향하여 권 상연과 함께 10월 26일 진산 군수에게 자수(自首)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그곳에서 문초를 받고, 30일에는 전라 감사(全羅監司) 정 민시(鄭民始)가 있는 전주(全州)로 옮겨져 또한 신문을 받고, 임금의 윤허를 얻어 그해 11월 13일(양력 12월 8일)에 그곳 형장에서 목을 잘렸다.

 

  이 진산 사건(珍山事件)이 알려지자 반대파의 유생(儒生)들은 11월부터 한 달 동안에 걸쳐 30여 통의 글을 임금에게 올려, 천주교를 엄히 다스릴 것을 청원하였다. 그 결과 11월 3일에는  권 일신과 평택 현감(平澤縣監) 이 승훈이 잡혀, 이 승훈은 벼슬을 빼앗기고, 권 일신은 그달 16일 충청도 예산(禮山)으로 귀양 가던 도중 형벌에서 받은 몸의 상처로 죽었다. 이 승훈은 가성직제를 그만두게 된 1789년에 평택 현감으로 부임하였다가 해임되었는데, 그 뒤 주 문모(周文謨) 신부의 입국 사건이 발각된 1795년 7월에 이르러 예산(禮山)으로 유배되었다. 이 밖에 진산 사건을 계기로 하여 그해 11월에는 내포(內浦)의 사도라고 불리우던 이 존창도 잡혔다가 천주교를 요술이라고 공격함으로써 석방되고, 충청도 홍주(洪州) 지방에서 친척 친지 30여 명을 입교케 했던 원 시장(元始長)도 잡혀 온갖 악형을 받다가 1792년 12월에 옥사(獄死)하였다.

 

  이렇듯이 신해교난은 위정자들로 하여금 비로소 양반 계급의 신자들에까지 박해의 손을 뻗게 함에 좋은 구실을 얻게 하였는데, 이것은 이후 근 1백 년 동안을 두고 거듭되는 박해의 표면적 이유로 되었다. 그것은 천주교 신자들이 4대조까지의 신주를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주자가례(朱子家禮)》의 가르침을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

 

 

 

                                             -  [간추린 한국천주교회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