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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 벽(李檗) · 이승훈(李承薰) · 권일신 등의 조선 천주고회 창설 본문

[♡ 자유와 평화 ♡]/한국천주교 歷史

7. 이 벽(李檗) · 이승훈(李承薰) · 권일신 등의 조선 천주고회 창설

자유인ebo 2011. 8. 25. 10:34

 

6. 이 벽(李檗)· 이 승훈(李承薰)· 권 일신 등의 조선천주교회 창설

 

 

    

 

 

 (1) 천진암(天眞菴) 주어사(走魚寺) 강확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익과 안 정복 사이에 논의되던 천주교는 이들의 문인(門人)들에 이르러 마침내 이를 믿는 신앙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런 운동을 일으킨 사람들도 거의 한강유역에 살고 있던 남인(南人) 학자들이었는데, 그 주동자는 양근(楊根, 楊平)에 살던 권 철신(權哲身) · 일신(日身) 형제와 서울 수표교(水標橋) 가에 살던 이벽(李檗)과 광주 마재[馬峴]에 살던 정 약전(丁若銓) · 약종(若鍾) · 약용(若鏞)의 3 형제들이었다.

 

  그리하여 권 철신은 1779년 겨울에 광주(廣州)와 여주(驪州)의 접경지대인 앵자산(鶯子山)에 있는 천진암(天眞菴) 주어사에서 그의 문제(門弟)들과 함께 천주 교리 연구 강학회를 열고 신앙운동을 일으켰다. 이 강학회에 모인 사람은 정 약전을 비롯하여 이 승훈, 김 원성(金源星), 권 상학(權相學, 권일신의 아들), 이 총억(李寵億, 이기양의 아들) 등 몇 사람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 벽은 크게 기뻐하며 자기도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때는 겨울이라 길마다 눈이 덮여 있었고, 절까지는 100여리나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곤란쯤으론 이 벽의 그 열렬한 마음을 꺽을 수는 없었다. 그는 즉시 출발하여, 호랑이 굴이 많은 높은 산을 넘어 자정쯤 그 절에 도착하였다. 강학회에 모인 사람들은 한 밤중에 눈 속에 이 벽이 찾아온 것을 보고 모두들 깜짝 놀랐었다.

 

  권 철신은 이 강학회에서 지켜야할 규정(規程)을 스스로 지어 제자들에게 주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 얼음이 언 찬 샘물을 움켜 낯을 씻고 양치질을 하고는 숙야잠(夙夜箴)을 외우고, 해가 돋으면 경제잠(敬齊箴)을 외우고, 정오에는 사물잠(四勿箴)을 외우고, 해가 지면 서명(西銘)을 외우도록 하였는데, 그 모습이 장엄하고 공손하여 아무도 규정과 법도를 잃지 않았다 한다.

 

  이 강학회는 10여 일 계속되었다. 그 동안 하늘, 세상, 인성(人性) 등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해결을 탐구하였다. 옛날 학자들이 논의한 모든 의견들을 끌어내어 한 문제씩 토의해 나갔다. 그 다음에는 옛 성현들이 지은 윤리서(倫理書)들을 연구하였다. 끝으로 서양 천주교 신부들이 중국에 들어와 한문으로 지은 철학, 수학, 종교 등 서학(西學)에 관한 책들을 검토하고, 그 깊은 뜻을 해득하기 위하여 온 정성을 다하였다. 그들은 《천주실의》《칠극》 《직방외기》 등을 읽으며 하느님의 존재와 그 섭리, 영혼의 신령함과 영혼의 불멸성 및 칠죄종(七罪宗)을 극복하기 위한 칠덕(七德)에 관하여 깊이 토론하였다. 이 몇 권의 교리서만으로 천주교에 관하여 완전히 이해하기는 곤란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에 이미 싫증을 느끼고 새로운 학문을 갈구하는 그들에겐, 그들이 읽은 이 몇 권의 교리서만으로도 이미 마음이 움직이고, 어딘가 한쪽 구석에서 영혼이 트이어 오는 듯 하였다. 그들은 즉시 이 새로운 종교에 대하여 아는 것은 전부 실천하기 시작하여, 매일 아침저녁으로 엎드려 기도를 드렸다. 7일 중 하루는 하느님 공경에 온전히 바쳐야 한다는 것을 읽은 후로는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에는 다른 일은 모두 쉬고 천주님만을 섬기며 묵상에 전심하였다. 또 그 날에는 육식을 금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이 일을 얼마 동안이나 실천하다가 그만두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비록 이 강학회 동안 실천하다가 중단되었을지라도, 그것은 이 땅에 천주님의 복음의 씨앗이 처음으로 떨어지고, 또 최초로 신앙운동으로 전개된 것으로 조선 교회사상 길이 기념될 만한 일이다.

 

  이 강학회가 끝난 뒤, 정 약전은 [십계명가]를, 이 벽은 [천주공경가]를 지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2)조선의 요한 세자(洗者) 이 벽(李檗)


  이 벽은 요르단강에서 예수님께 물로 세례를 준 선지자 요한세자(洗者)와 같이, 이 땅에 구세주가 오시는 길을 예비한 조선의 요한 세자이다. 천진암 강학회에서 그의 가슴속의 천주님의 보배로운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그 보배로운 복음의 씨앗은 다음날 조선교회 창설의 큰 씨앗으로 자라났다.

 

  이 벽은 경주 이씨, 임진왜란 때의 공신이며 훌륭한 성리학자였던 지퇴당(知退堂) 이 정형(李廷馨)의 후손이다. 그의 6대조 이 경상(李慶相, 1603~1647)은 병자호란 때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으로서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모시고 청나라 심양(瀋陽)에 가서 8년 동안 볼모살이를 하였다. 소현세자가 북경으로 가 아담 · 샬(Adam Schall) 신부를 만날 때, 이 경상도 함께 따라가 일찍이 천주교에 접할 수 있었다. 그의 후손 중에서 조선 교회의 창설자인 이 벽이 나오게 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천주님의 커다란 섭리인 듯하다.

 

  그의 조부 이달(李鐽, 1703~1772)은 무관으로서 호남 병마절도사와 부총관(副摠管)을 지냈고, 그의 형 격(格, 1748~1829)은 무과에 급제하여 병사(兵使)를 지냈다.

 

  그의 아버지 이부만(李溥萬, 1727~1812)은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손자 현직(顯稷)이 형조판서(刑曹判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됨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이 되었다. 이 부만은 슬하에 아들 3형제와 딸 3형제를 두었다. 큰 딸은 진사 한 치영(韓致永)에게로 시집을 갔고, 둘째 딸은 다산 정 약용의 큰 형인 정 약현(丁若鉉, 1751~1821)에게로 시집을 갔고, 셋째 딸은 홍 윤호(洪允浩)에게로 출가하였다.

 

  이와 같이 이 벽의 집안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양반이었다. 더욱이 그의 조부 때부터는 무관의 집안으로 유명하였다. 이러한 집안에서 태어난 이 벽은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키가 6척이나 되었다. 그의 아버지 이 벽 역시 형 격(格)과 아우 석(晳)과 함께 무관으로 출세시키려 하였으나, 이 벽은 ‘그러한 일은 죽어도 하지 않겠다. 오로지 성현의 글을 배우리라.’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고집이 세어서 아무도 꺾을 수가 없었다.

 

  이 벽은 처음에 병조판서를 재낸 권 엄(權·嚴1729~1801)의 따님에게로 장가를 들었으나, 권씨 부인이 30세로 일찍 죽자 다시 해주 정씨부인을 맞이하여 아들 현모(顯謨)를 낳았다. 그의 장인 권 엄은 정부에서 천주교를 금압하자, 이 벽이 그의 사위이므로 그 화가 자기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1801년 봄에 이른바 63인소(六十三人疏)를 올린 장본인이다. 지금까지 이 벽이 권 철신의 매부로 알려져 있었으나, 그것은 잘못이다.

 

  이 벽은 권 철신과 성호 이 익의 조카 이병휴(李秉休) 등과 함께 학문을 닦기도 하였으며, 이 기양(李基讓), 이 가환(李家煥) 등 유명한 학자들과 사귀었다. 그는 처음에 성리학을 공부하다가《천주실의》《칠극》《직방외기》 등 서학 서적을 얻어 보고는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진리다.’ 하며 거기에 심취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과거에 응시하도록 권하였으나, 그는 그것을 거절하고 오로지 천주교의 깊은 뜻을 해득하기에 힘썼다. 그러다가 1779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여, 거기서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논증 하였다. 천주님께 몸을 바치기로 마음먹은 이 벽은 그의 가슴속에 심어진 복음의 씨앗을 이 땅의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천주교 교리를 토론하고, 또 그 아름다운 진리를 깨우쳐주었다. 이러한 결과로, 이 벽이 30세 되던 1785년경에는 남인학자들 사이에 천주교가 널리 전파된 듯하다. 그것은 남인의 영수 안 정복이 남인 학자들, 특히 재주가 있는 젊은 선비들이 모두 서학에 심취하였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천당 지옥설은 황당하다.’는 벽이시(闢異詩)를 지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 해 봄 다산 정약용은 경의(經義)로 진사가 되어 성균관(成均館)에서 글을 읽었다. 그 때에 정조대왕은 성균관에서 글을 읽는 선비들에게《중용(中庸)》에서 70여 개의 문제를 뽑아 내려주며 그 답안을 작성하여 바치라 하였다. 이 문제를 받은 정 약용은 곧 수표동에 살고 있는 이 벽을 찾아가 서로 토론을 하여 그 답안을 작성하여 바치었다. 이 답안을 읽어본 정조 임금은 경연(經筵)에서 ‘성균관 선비들의 답안이 모두 황당하나, 오직 정 약용의 답안만이 특이하였다. ‘그 반드시 유식한 선비에게 배움이 있으리라.’ 하였다. 여기서 그 유식한 선비가 이 벽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오늘날 전하는 정 약용의 저서 중《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중용자잠(中庸自箴)》은 바로 이 답안을 정리한 것이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나, 1814년에 다산은 《중용강의》의 초고를 정리하면서, 이 벽을 추억하여 ‘아직 광암(曠庵)이 살아있다면 그 진덕박학(進德博學)함이 어찌 내게 비할까 보냐?’라고 말하고, ‘책을 어루만지며 눈물이 흐름을 금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벽은 당시 북경에 건너간 사신들과 조상들의 손을 통하여 들어온 몇 권의 교리서만으로는 천주교를 완전히 이해하는데에 부족함을 느끼고, 누군가가 북경에 가서 영세를 하고 돌아오기를 열망하였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이 승훈이 북경을 가게 된 것이다. 이 벽은 이 승훈을 찾아가 영세를 하고 돌아오도록 비밀리에 부탁을 하였다.《황 사영백서(黃嗣永帛書)》에는 이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벽이 비밀리에 부탁하여 말하기를 ‘북경에는 천주당이 있고, 그 천주당에는 전교하는 서양신부가 있다. 그대가 찾아가 뵙고 신경(信經) 한 부를 달라고 하고, 아울러 영세를 청하면 서양 신부는 반드시 크게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서양의 기이한 물건과 서적을 많이 얻어 가지고 오지, 빈손으로 돌아오지는 말라,’ 하였다.


  이처럼 이 벽의 밀탁을 받고 북경에 건너간 이 승훈이 거기서 영세를 하고 이듬해 1784년 음 3월 24일경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 벽은 이승훈이 가져온 그 많은 교리서들을 읽고 또 묵상에 전념하기 위하여 어느 외딴집을 하나 세내어 들어갔다. 달레(D_allet)의 《한국천주교회사》에는 ‘어느 외딴집’에 이 벽 홀로 간 것으로 되어 있으나,《황사영 백서》에는 이 승훈과 함께 간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백서>의 기록을 따르고자 한다. 이 승훈이 가져온 책들은 7성사(聖事)의 해설과 교리문답과 복음 성서의 주해(註解 : 聖經直解)와 그 날 그 날의 성인 행적과 기도서들이었다. 그 무렵 조선 사람들은 미신(迷信)의 숲속에 빠져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벽과 이 승훈은 이 책들을 읽어 나가는 동안 우상숭배 미신타파(迷信打破)에 대한 철저한 반박과 신념을 얻을 수 있었고, 비로소 천주교의 진리를 완전히 깨우칠 수 있었다. 그들은 책을 한 권 한 권 정독하는 동안, 새로운 생명이 자기 마음속에 뚫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예수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심이 날로 커 갔고, 그 신앙심과 더불어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천주님의 복음과 은총을 알려 주고자 하는 욕망이 커갔다. 얼마동안 연구한 뒤에 이 벽과 이 승훈은 그 ‘외딴집’에서 나와 전교를 시작하였다. <황사영 백서>에 보면, 이 벽과 이 승훈은 가까운 친구들을 찾아가 천주교로  권화(勸化)하니, 그 때 이름난 선비로서 따르는 자가 심히 많았다 한다.

 

  이 벽은 먼저 경기도 광주 마재[馬峴]에 있는 다산의 집으로 갔다. 1784년 음 4월 14일은 정 약현에게로 시집간 그의 둘째 누님의 기일(忌日)이었다. 누님의 제사를 지내고 그 이튼 날인 4월 15일 이 벽은 정 약전 · 정 약종 · 정 약용 등 다산의 형제들과 함께 배를 타고 한강을 내려와 서울로 돌아왔다. 이 벽은 그 배 안에서 다산의 형제들에게 천지 창조와 영혼불멸, 천당 지옥과 사후의 심판에 대하여 설명하고,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도리이고 참된 길이요, 위대하신 천주께서는 우리나라의 무수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가 그들을 구속하는 은혜에 참여하기를 원하시오. 이것은 천주의 명령이오. 우리는 천주의 부르심에 귀를 막고 있을 수는 없소, 천주교를 전파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오.”


하고 말하였다. 이 벽의 말을 들은 다산의 형제들은 창황하고 놀라움이 하한(河漢)의 무극(無極)함과 같았다. 서울로 들어온 뒤, 그들은 이벽을 따라가, 《천주실의》 《칠극》 등의 책을 얻어다 보고 비로소 천주교에 마음이 흔연히 기울어졌다.

 

  이렇게 다산의 형제들에게 전교하여 그들을 개종시키는데 성공한 이벽은 이번에는 중인계급에서 학식과 덕망이 높은 중국어 역관(譯官) 김 범우(金範禹)와 최 창현(崔昌顯) · 최 인길(崔仁吉) · 김 종교(金宗敎) 등을 개종시키었다. 그러나 이 벽의 전교가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당쟁을 두려워하는 유학자들의 반대의 벽에 부딪치었다.

 

  맨 먼저 이 가환(李家煥)이 찾아왔다. 이 가환은 이 벽이 서학을 전교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와,


  “우리 집에 《직방외기》 《서학범(西學凡》 등이 있어 나도 서양 서적들을 수권 보았으나, 그것은 기이한 글, 괴벽한 책으로, 오직 우리의 견식을 넓힐 수 있는 데 지나지 않소, 그것이 어찌 천명(天命)을 좇아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할 수 있으리오?”


 하고 꾸짖었다. 이 벽이 천주교의 교리를 들어 이에 대답하자, 이 가환은 말이 막혀 마침내 책을 구하여 자세히 읽어 보겠다고 하였다. 이 벽은 《천학초함(天學初函)》 속에 들어 있는 몇 가지 책들을 이 가환에게 빌려 주었다. 그 때 이 벽은 《성년광익(聖年廣益)》 한 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가환이 성인의 영적(灵蹟)을 믿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빌려 주지 않으려 하자, 싸우다 시피 하여 달라고 하였다. 이 가환은 그 때 이 벽이 가지고 있던 성교(聖敎)의 책들을 모두가 가져다가 마음을 가다듬고 되풀이해 읽어 보고는 이를 믿기로 결의를 하고,


  “이것은 진리요 정도(正道)다. 진실로 사실이 아니라면 책 속에서 말한바가 모두 하늘을 무함하고 하늘을 업신여긴 것이니, 서양신부가 반드시 바다를 건너와 전도하지 못하고 벼락을 맞아 죽었을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마침내 이 가환은 그의 제자들에게 천주교를 권화(勸化)하여 입교시키고 아침저녁으로 이 벽 · 이 승훈들 과 은밀히 내왕하며 자못 열심히 신앙하였다. 그러나 이 가환은 남에게는 권화하여 영세를 받도록 하면서도 자신은 영세를 받지 않았다. 그 뜻은 자신이 사신으로 북경에 들어가 직접 서양신부에게 영세를 받기 위해서이었다.

 

  이상은 《황사영백서》의 기록이다. 그러나 다산의 《정헌묘지명(貞軒墓誌銘)》이나 달래(Dallet)의 《한국 천주교회사》에는 이 벽과 논쟁을 벌인 가환이


  “이 도리는 훌륭하고 참되다. 그러나 이를 따르는 사람에게 불행을 갖다 줄 것이다.”


 하고 말하고 돌아갔다 한다. 그리고 그 뒤로는 ‘의심받을 만한 행적을 보지 못하였다,’고 다산은 기록하고 있다. 아마, 이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다산이 이 가환을 변호한데 기인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 가환과의 논쟁이 있은 얼마 뒤이었다. 이번에는 이 기양(李其讓)이 찾아왔다. 이 기양은 이 총억의 아버지로, 남인 선비들 사이에 유명한 학자이었고, 이 벽 역시 매우 존경하였다. 이 벽은 이 가환의 논전에서 그러했듯이, 이 기양의 공격에 대하여 낱낱이 천주교의 교리를 들어 답하였다. 이 기양은 이 벽의 조리정연한 논증에 더 이상 공격을 할 수가 없어 침묵을 지키고 말았다. 이 기양은 이 벽의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는 천주교가 진리임을 시인하였으나, 그렇다고 솔직하게 겉으로 시인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1801년 신유박해 때, 모두 천주교인으로 몰리어, 이 가환은 옥에 갇히고 굶주려 죽었고, 이 기양은 함경도 마천령(摩天嶺) 아래 단천(端川)으로 유배되어 거기서 죽었다.

 

  이벽은 이 가환과 이 기양의 토론에서 비록 이기기는 하였으나, 이처럼 유학자들의 반대가 극심해지자, 유학자들의 반대를 막아 줄 만한 훌륭한 학자를 입교시킬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양근(楊根) 한강포[寒江浦, 현재 양평군 강상면 백석리, 속칭 대감마을]에 살고 있는 권 철신 · 권 일신 형제를 찾아갔다. 권 철신은 당시 모든 선비들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학자였다. 그는 거기서 10여 일을 머무르며 천주교 교리를 토론하였다. 이 벽의 말을 들은 권 일신은 곧 입교를 하였다. 다산 정 약용은 [녹암 권 철신 묘지명(鹿庵權哲身墓誌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처음으로 이 벽이 서교(西敎)를 선교하자 따르는 자가 이미 무리를 이루었다. 이 벽은 ‘감호(鑑湖, 권철신의 별호인 듯함) 는 모든 선비가 존경하는 분으로 감호가 천주교를 믿고 따르면 그 누가 따르지 않으리오?’ 하고 곧 가마를 타고 감호로 가서 10여 일을 머무르다가 돌아왔다. 이 때에 공의 아우 일신(日身)이 열심히 이 벽을 쫓으매, 공은[우제의(虞祭義)]라는 글 한 편을 지어 재사의 뜻을 밝히었다.


  오늘날 권 철신이 지은 [우제의(虞祭義)]가 전하지 않아, 그 내용을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조상 제례(祖上祭禮)의 문제가 아닌가 한다. 우리나라 풍속에서 행하는 조상에 대한 제사와 천주교의 십계명이 상극된 데에서 권 철신이 조상 제례의 뜻과 하느님께 제사 지내는 교사(郊祀)의 제례(祭禮)의 뜻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다산이 <선중씨 묘지명(先仲氏墓誌銘)>에서 1784년 4월 이 때까지는 ‘제사를 페한다는 설이 없었다.’고 한 기록으로 보아 더욱 뚜렷한 심증(心證)이 간다.

 

  권 철신은 얼마 뒤에 암브로시오란 본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다산의 형제와 권 철신 형제를 입교시킨 이 벽은 이 승훈에게서 영세를 받았다. 그리고는 그가 입교시킨 예비교우들을 모아 첫 번 강화(講話)를 열었다. 거기에는 홍 낙민(洪樂敏)도 참석하였다.

 

  1785년 봄 첫 박해인, ‘을사 추조 적발 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나 정부에 발각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 벽에게 배교를 강요하였다. 목을 매달아 죽겠다고 위협하였다. 이 벽은 아버지에 대한 효와 천주님에 대한 사랑 속에서 심한 번민을 하였다.

 

  이 벽 선조께서는 권력층의 무서운 탄압과, 문중 친척들의 살벌한 성토와 위협으로, 가족들에 의하여 집안에 감금당하시자, 방안에 들어가시어 좌정하시고 십 여일 이상을 일체 음식을 전폐하사 온전히 금식하시고, 의관을 벗지 아니하시며 잠을 주무시지 아니하시고, 병환이 겹친 중에서도 계속 철야기도와 묵상과 고행으로 온갖 박해와 위협에서도 굴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배교를 완강히 거부하시며 굳세게 신앙을 증거 하시면서, 순교보다도 더 어렵고 더 거룩하며 더 장렬한 죽음으로, 한국천주교회 창립을 위하여 최초의 자원 희생제물이 되셨으니, 때는 1785년 음력 6월 14일이었다.

 

 

(3) 최초의 영세자 이 승훈


  천진암 · 주어사 강학회에 참석한 이 승훈은 이미 그의 마음속에 천주님의 복음의 씨앗이 떨어져 있었다. 그는 그 무렵 서울 서소문 밖의 반석방[盤石坊, 현재 中林洞]에 살고 있었는데, 시문(詩文) 이 뛰어나 1780년 가을 소과(小科)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그의 문집(文集)이 전하지 않아 그 시문(詩文)의 전모를 알기는 어려우나 여기저기 산견(散見)되는 바를 보면, 범수(凡手)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헌경(李獻慶)은 그의 시를 평하여 “그가 이미 이루어 놓은 시를 보면 정슬 청형(靜瑟淸瑩)함이 상(商)나라의 주돈(珠敦)이나 주(周)나라의 옥찬(玉瓚)이 아니랴?”하고 평가하였다. 이처럼 시문에 뛰어난 그는 천진암 · 주어사 강학회에 참석한 뒤로 서학(西學)의 책들을 읽으며 이 벽과 함께 천주교 신봉 운동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그러는 사이에 여러 가지 의문점이 생기게 되었다. 그것은 천주교 교리와 재래 습속과의 불일치, 천주교 사회와 구 사회(舊社會)의 모순 등을 느끼게 된 점이었다.

 

  이러한 의문점을 해명하기 위하여 교리 연구원을 북경(北京)에 보내기로 하였는데, 그에 뽑힌 사람이 27세의 청년 이 승훈 이었다. 이것은 때마침 그의 부친 이 동욱(李東郁)이 1783년 10월에 동지사 겸 사은사(冬至使兼謝恩使) 황 인점(黃仁點)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서울을 떠나 북경으로 가게 되었으므로 그를 따라가게 함으로써 감시인의 눈을 피하고자 함에서 취하여진 방책이었다, 이리하여 이 승훈은 출발에 앞서 교리(敎理)를 공부하고, 이 벽으로부터 주어진 사명의 중대함과 북경 천주당의 성직자를 찾아가 그 지도를 받을 것과 주요한 서적들을 얻어 올 것 등의 부탁을 받고, 동지사(冬至使)일행 수백 명 중에 끼어 그해 10월 14일에 서울을 떠나 12월 21일 북경에 도착하였다.

 

  동지사 일행이 북경에 40여 일 동안 머물게 되니, 이 사이에 이 승훈은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이 맡아보던 북천주당(北天主堂)을 자주 찾아가서 필담(筆談)으로 교리를 배우고, 영신상의 모든 준비를 갖추게 되자 귀국에 앞서 그곳에서 이듬해 양력 2월에 예수회 프랑스 신부 그라몽(Louis de Grammont, 梁棟材)으로부터 조선 교회의 주춧돌이 된다는 뜻에서 베드로(Peter, 바위)라는 교명(敎名)을 얻고 세례를 받았다.

 


(4) 조선 교회 창설


  조선인 선비로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참된 신자가 된 이 승훈은 수십 권의 서적과 성화(聖畵) · 성물(聖物,黙珠) 등을 얻어가지고, 동지사 일행을 따라 1784년 3월 24일 서울로 돌아와 신앙생활을 전개하는 한편, 서적 · 성물 등을 이 벽(李檗)에게 넘겨주었다. 이에 이 벽은 곧 고요한 곳에 숨어서 그 서적들을 자세히 읽고 연구함으로써 천주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어 복음 전파에 나섰다. 그러므로 이 승훈은 이 벽에게 요한 세자(洗者)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주고, 그해 11월에는 양근(陽根)으로 권 철신(權哲身)형제를 찾아가 권 일신에게 프란시스코 사베리오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주었는데, 이 세 사람은 조선교회 창설의 주동 인물이었다.

 

  이리하여 이들은 정 약전 3형제를 비롯한 양반 계급으로부터 학식이 높은 중국어 역관(譯官), 김 범우(金範禹), 최 인길(崔仁吉)들과 같은 중인 계급(中人階級)과 충청도 내포(內浦, 牙山)지방의 이 존창(李存昌)과 전라도 전주(全州)의 양반 유 항검(柳恒儉) 등도 입교시켜 이미 수십 명의 영세 신자(領洗信者)를 얻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벽 · 이 승훈 · 정 약전 3형제, 권 일신 형제 등은 1784년 갑진(甲辰) 겨울 어느 날, 서울 남부(南部) 명례동(明禮洞, 現, 明洞)에 있던 역관 김 범우(金範禹) 토마스의 집 대청마루에 모여 이 벽을 지도자(指導者)로 삼아, 주일(主日) 행사를 지남으로써 조선교회를 창설하게 되었다. 이때 이 벽은 머리에 책건(幘巾)을 쓰고 벽(壁)을 등지고 앉아 설교하고, 그 앞에 이 승훈 · 정 약전 형제, 권 일신 등이 모두 제자(弟子)라 일컫고 시좌(侍座)하였는데, 그 예법이 유교(儒敎)의 사제례(師弟禮)보다 더욱 엄하였다. 이들이 날을 정하여 거듭 이러한 주일 의식을 드리니, 몇 달 사이에 신자가 수십 인이 되었다.

 

  이와 같이 밖으로부터 성직자가 입국하여 전교함이 없이 오로지 남인(南人) 선비들의 교리 연구의 결과로 자발적으로 천주교회를 세우게 된 일은 세계 전교사상(傳敎史上) 우리 민족만이 가진 바로 크나 큰 자랑인 것이다. 이때부터 교회 창설자들은 참되고 올바른 종교를 이 나라에 세우는 한편, 온갖 미신 행위를 물리치며, 서로 ‘교우(敎友)’라고 불러 그 당시의 엄격한 계급제도와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를 타파하는 일을 일으키며, 기도문 등을 오로지 국문으로 만들어 쓰는 한글 전용 운동을 시작하며, 서양 문화를 받아들여 문호 개방(門戶開放) 운동을 일으키는 등으로 이 나라를 근대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게 되었다.

 

 

                                             -  [간추린 한국천주교회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