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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조선 교구의 설정과 프랑스 성직자들의 입국 본문

[♡ 자유와 평화 ♡]/한국천주교 歷史

11. 조선 교구의 설정과 프랑스 성직자들의 입국

자유인ebo 2011. 8. 21. 10:39

 

2.조선 교구의 설정과 프랑스 성직자들의 입국             

 

 

 

 

 

(1) 정 하상(丁夏祥)의 교회 재건 운동


  충청도· 경상도에서 교난(敎難)이 일어나고 있던 무렵에 서울에서 교회 재건 운동을 일으킨 청년이 나타났으니, 그는 1801년에 순교한 정 약종(丁若鍾)의 둘째 아들인 하상(夏祥) 바오로였다.


  정 하상은 6세 때에 부친과 가산을 잃고 모친 유 조이[柳召史] 세시리아와 누이동생 정혜(情惠) 엘리사베드와 더불어 광주(廣州) 마재[馬峴]에 있던 숙부 정 약용(丁若鏞)의 집에서 여러 해 동안 곁방살이를 하다가 다시 박해가 닥쳐올 것을 두려워한 친족들의 배교(背敎)권유를 물리치고 홀로 서울로 올라와 가난한 두 교우의 집에 몸을 붙여 신덕(信德)을 쌓았다.


  이러는 사이에 그는 양근(楊根)에 살던 학자 교인 조 동섬(趙東暹) 유스티노가 함경도 무산(茂山)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멀리 그를 찾아가 교리(敎理)와 한문(漢文)을 배우고 그의 권유로 교회 재건을 위하여 북경에 들어갈 결심을 세웠다.


  그리하여 정 하상은 교우들이 모아준 여비를 가지고 22세 때이던 1816년 10월 24일에 서울을 떠난 동지사(冬至使) 이 조원(李肇源) 일행의 역관(譯官) 하인이 되어 그해 연말에 무사히 북경에 이르렀다. 여기서 그는 북경 교구 부주교 리베리오(Rib-ereo) 신부를 찾아가 신부를 파견해 줄 것을 간청했으나, 프랑스 혁명의 여파와 청나라 안에서의 교회 박해로 그것이 어렵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다만 교리서 · 성물(聖物)들을 얻어가지고 이듬해 3월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그의 용감한 이 첫 번의 북경 방문으로 오래간만에 북경 교회와의 길이 다시 트이게 되어 이후 10여 년 동안에 9회에 걸쳐 몸소 북경에 왕래하면서 신부를 맞아들이는 일을 추진하였다.


  정 하상은 첫 번째 북경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짐을 실은 말이 다리를 다쳐 예정한 날보다 하루 늦게 서울에 돌아오게 되었는데, 바로 그 전날에 그의 집 주인이던 양근(楊根) 사람 조 명수(趙明秀) 베드로가 관헌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다른 교인들이 미리 서대문(西大門) 밖에서 그를 맞이하여 다른 곳으로 안내하였으므로 그는 무사할 수 있었다. 조 명수는  조 동섬(趙東暹)의 친족으로서 권 일신(權日身)의 딸인 데레사를 아내로 삼고 정 하상의 사행(使行)을 주선하여 준 교인이었다. 조명수가 잡히자 그의 아내와 하녀이던 고(高) 발바라도 형조에 자수하여 함께 온갖 고형을 받다가 2년 후인 1819년 5월 21일에 모두 참수형(斬首刑)을 받았다. 이러는 사이에 정 하상의 숙부인 정 약용은 세도가 김 조순(金祖淳)의 특별한 조처로 강진(康津)에서의 귀양살이가 풀려 1818년에 고향인 광주 마재로 돌아와 살게 되었다.


  이러한 때를 맞이하여 정 하상은 거의 해마다 동지사 틈에 끼어 북경에 왕래하면서 신부를 맞이하는 일을 추진하고, 특히 1823년에 유명한 한어 역관(漢語譯官)이던 유 진길(劉進吉) 과 사귀게 되니, 이듬해에는 이와 함께 북경에 들어가 그로 하여금 북경 교구 부주교 리베리오에게 아오스딩이라는 교명(敎名)으로 세례를 받게 하는 한편 또한 신부의 파견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정 하상은 1825년에는 이 여진(李如眞)요안 등 몇 교인의 이름으로 로마 교황에게 편지를 올려 조선 교회의 딱한 사정을 알림과 아울러 신부의 조속한 파견을 다시 간청하였다.


  이에 감동한 북경 부주교는 2명의 중국인 신부가 조선에 진출할 뜻이 있음을 알고, 조선교인들이 1826년에 북경까지 와서 그들을 모셔갈 것을 바랐으나, 정 하상은 봉황성(鳳凰城)의 변문(邊門)까지만 마중 나갔기 때문에 또 실패하였다.


  이러한 때에 북경 부주교 리베리오가 1826년 10월에 죽고, 이에 앞서 마카오에 있던 북경주교 사라이바도 1818년 1월에 죽게 되니, 남경(南京) 주교로 임명되고도 그곳에 부임하지 못하고 있던 피레스(Pires) 주교가 1826년 10월부터 북경 교구를 다스리었다.


  이와 같이 북경 교회의 주교가 갈리게 된 일도 모르고, 정 하상이 1827년 말에 다시 북경으로 들어가 신부의 파견을 간청하게 되니, 북경 주교 피레스는 그에게 오히려 미신자(未信者)의 집에서 곁방살이를 하고 있는 모친과 누이를 찾아 모시고 그들의 구령(救靈)에 힘쓰도록 하라는 충고를 주었다.


  이에 다시 뜻을 이루지 못한 정 하상은 헛되이 귀국하여 그의 모친과 누이를 서울로 모시고 다시 고향 마재[馬峴]로 내려가 5~6년 동안 그 친족들에게 전교하였다.


  그런데 조선 교회는 1827년 봄에 또 다시 박해를 받게 되었다. 이번 박해는 전라도 곡성(谷城)에 신자들만이 살던 도공 부락(陶工部落:당고개)을 밀고한 데서 발단하여, 전라도에서만 2백40여 명의 교인이 잡힘을 비롯하여 그 여파가 경상도· 충청도 및 서울에까지 미쳐 전국에서 5백여 명이 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의 박해로 말미암아 사형 선고를 받게 된 교인들은 전라도의 이 경헌(李景彦) · 김 대권(金大權) 등 7명과 충청도의 전 운악(全云惡) · 박 성삼(朴性三) 등 3명뿐이고, 남은 교인들은 그 죄의 경중(敬重)에 따라 적당히 처형되었다. 위에서 말한 이 경언은 왕족인 이 수광(李수光)의 9대 후손으로서 서울에서 잡혀 전주(全州)에서 그해 윤 5월 4일에 옥사하였으나, 다른 교인들은 곧 사형이 집행되지 않고, 오랫동안 옥중살이를 하다가 거의 옥사하였다. 이때 이처럼 교인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도 그 집행을 끌어오게 된 것은 국왕이던 순조(純租)가 시파(時派) 출신의 왕비이던 순원 왕후(純元王后)의 감화를 받아 무죄한 교인들을 함부로 죽이기를 꺼렸기 때문이었다. 한편 순조는 1827년 2월 9일부터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정사를 18세의 아들인 효명 세자(孝明世子)에게 맡겼으므로 세자의 행운을 비는 뜻에서도 교인들을 함부로 죽이기를 싫어하였다.


  그런데 이 효명 세자가 뜻밖에도 1830년 4월 22일에 갑자기 피를 토하게 되니, 순조는 앞서 신유교난(辛酉敎難) 때에 승지(承旨) 벼슬을 빼앗긴 교인 정 약용(丁若鏞)이 의술이 뛰어났다는 말을 듣고 5월 5일에 그의 벼슬을 돌려주는 한편 세자의 병환을 치료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세자의 병환환은 정약용의 치료를 받을 겨를도 없이 악화되어 다음날에 세자는 21세 로 사망하였다. 그런데 세자의 아내는 천주교를 박해하던 노론(老論) 벽파(僻派)에 속한 풍양(豊壤) 조씨 조 만영(趙萬永)의 딸이었으므로 세자가 정사를 맡아보게 된 때부터 왕실을 중심으로 하여 은연중 안동 김씨(安東金氏)와 풍양 조씨(豊壤趙氏) 사이에 세도 다툼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2) 조선 교구(敎區)의 설정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정 하상은 1816년부터 거의 해마다 북경에 왕래하면서 신부의 파견을 간청하던 끝에, 1825년에는 로마 교황에게 이를 간청하는 편지를 써서 북경 교회에 그 전달을 부탁했었다. 이 편지는 북경 주교 주관 하에 1826년 12월 28일자로 라틴말로 번역되어 조선교우  암보로시오의 이름으로 교황에게 보내지게 되어 이듬해에는 이것이 교황 레오 12세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뜻하지 않은 편지를 받고 크게 감동한 교황은 곧 추기경 회의(樞機卿會議)를 열고 협의한 끝에 포교성성장(布敎聖省長)이던 추기경 카펠랄리(Capplelari)로 하여금 1827년 9월 1일자로 프랑스의 빠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의 신학교장 랑글로아(Langlois)에게 공문을 보내어, 시급히 그리고 영구적으로(C-ito et Stabiliter) 조선 교회의 정신적 곤궁을 구제하여 줄 수 없겠느냐고 묻게 했다. 왜야하면 파리 와방전교회는 앞서 말한바와 같은 미전교(未傳敎) 지역에 성직자들을 보내 전교에 힘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조선 진출의 요청을 받은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의 랑글로아 교장 신부는 성직자의 부족, 재정의 궁핍, 조선 입국의 극난(極難), 재외(在外) 주교들의 의견 타진 등의 이유를 들어 난색을 표시하는 답장[回翰]을 교황청에 보냈다. 이러한 답장에 대하여 카펠랄리 추기경(樞機卿)은 그해 11월 17일자로 그 교장에게 다시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했다. 즉 신학생 증원의 가능성과 재외 주교들의 찬동 가능성을 말하고, 조선 교우들의 편지 사본(寫本)을 교장에게 보내 주었다. 이러한 두 번째의 편지를 받은 신학교 교장은 다시 12월 4일자로 답장을 교황청에 보내어, 조선 입국의 극난성(極難性)과 관계 주교들의 보고(報告) 대기(待期)를 이유로 또 다시 난색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파리 신학교 교장은 포교성성(布敎聖省)과의 약속과 외방전교회의 규칙에 따라 재외 주교들에게 공문을 보내어 조선 전교를 맡을 뜻이 있는지 여부를 먼저 묻게 됐다.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샴(Siam, 泰國) 교구(敎區)의 부 주교이던 브르기에(Bruguiere, 蘇) 신부는 1829년 5월 19일자로 신학교장과 포교성성에 편지를 보내어 스스로 조선에 진출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샴 교구의 플로랑(Florent) 주교의 주례로 그해 6월 29일 주교위(主敎位)에 오르는 성성식(成聖式)을 갖게 되었다.


  이리하여 소(蘇) 주교가 교황청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던 무렵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대하여 조선에 진출할 것을 제의한 포교 성성장 카펠랄리 추기경이 1830년 11월 30일에 서거한 교황 비오 8세의 뒤를 이어 2백 55대의 교황으로 뽑혀 그레고리오(Gr-egorio) 16세라 일컬었다. 그러므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31년 9월 9일 두 가지의 교서(敎書)를 발표하여, 그 하나에서는 조선 교회를 북경 교구로부터 분리시켜 독립된 교구(敎區)로 승격시킨다는 것과 다른 하나에서는 소(蘇) 주교를 조선 교구의 초대 주교로 임명한다는 것을 밝혔다.


  이와 같이 조선에 독립된 교구를 설치하게 되었다는 것은 로마 교황청이 조선을 완전한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그와 외교관계를 맺음을 뜻하는 일이었으나, 청 나라를 종주국(宗主國)으로 섬기고 그 밖의 나라에 대하여서는 철저한 쇄국 정책을 쓰고 있던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꿈에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때는 조선 교회 창설 후 47년만의 일이었다.

 


 

 

(3) 프랑스 성직자들의 조선 입국


  조선 교구가 설정되고 스스로가 초대 주교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소(蘇) 주교가 알게 된 것은 1832년 7월 25일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곧 그해 9월 12일에 청나라 사람 왕(王) 요셉을 거느리고 페낭(Penang) 섬을 떠나 조선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이에 앞서 그와 함께 페낭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파리 외장전교회의 샤스탕(Chantan, 鄭牙名伯) 신부도 만일 조선 교회가 외방전교회에 맡겨진다면 그도 소(蘇 Bruguiere)주교와 고락을 함께 할 것을 밝히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이탈리아 나폴리 신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청나라사람 유 방제(劉方濟) 신부는 조선에 프랑스 성직자들이 보내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방해하기 위하여 소(蘇) 주교보다 먼저 길을 떠나 소 주교가 싱가폴을 떠날 때에는 이미 청나라에 들어가 조선 입국의 길을 찾고 있었다. 소 주교는 이러한 유(劉) 신부의 본심도 모르고, 그해 10월에는 마카오에 도착하여 그의 임명장을 받고 그곳에 있던 교황청 포교성성 동양 경리부 소속의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 르그레좌(Legregois)를 조선 교구의 총대리(總代理)로 임명한 후, 청나라로 가는 배편을 기다렸으나, 이를 쉽게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소 주교는 그의 안내자이던 왕(王) 요셉으로 하여금 북경주교, 유(劉) 신부 및 조선 교우에게 보내는 편지들을 가지고, 먼저 북경까지 갔다가 남경(南京)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11월 23일에 길을 떠나게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소 주교도 배편을 얻어 그해 12월 20일쯤에 사천성(四川省)으로 가게 된 외방전교회의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들과 더불어 청나라 배를 타고 마카오를 떠나 복건성(福建省)을 거쳐 1833년 5월 15일에는 남경에 상륙하게 되었는데, 이 사이에 나(羅) 신부도 소 주교의 뒤를 따라 조선으로 가겠다는 뜻을 밝히고, 사천(四川) 주교의 허락을 얻기 위하여 복건성에 머물게 되었다.


  이리하여 남경에 머물러 있던 소 주교는 만주(滿洲)까지 가서 조선 교우를 만나고 돌아온 왕 요셉을 1833년 6월 26일에 맞이하여 조선 교우들이 그를 맞아들일 준비를 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해 7월 20일 그곳을 떠나 대륙 횡단의 길에 올랐다.


  소 주교 일행은 무더운 여름철에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북쪽으로 발길을 옮겨, 그해 10월 10일에야 산서성(山西省)의 주교가 살고 있던 태원(太原)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소 주교는 10개월 동안 머물면서 각 방면으로 조선 입국의 길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그보다 먼저 1834년 1월 16일에 조선에 들어간 유 방제(劉方濟) 신부의 갖은 방해 공작으로 말미암아 조선 교우와의 연락이 잘 되지 않음과 그의 부하이던 정(鄭) · 나(羅)신부가 그의 뒤를 따르고 있음을 알고 1834년 9월 22일 만주로 향하여 조선 입국의 길에 올랐다.


  그리하여 그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넘어 내몽고(內蒙古)의 서만자(西灣子)에서 10월 8일 나(羅) 신부를 만나고, 왕(王)요셉을 북경에 보내 조선 교우와 입국의 일자를 약정하게 한 후, 홀로 1835년 10월 19일 열하성(熱河省)의 승덕(承德) 북방에 있던 교우촌(敎友村) 벨리구(別리溝)에 도착하여 요동(遼東) 통과를 위한 북경 주교의 보증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다음날 뇌일혈(腦溢血)을 일으켜 43세로 급사하였다. 소(蘇) 주교는 조선 교우와의 약속에 따라 그해 11월 20일 전후에 봉황성(鳳凰城)에 동지사 일행에 끼어 그곳을 지나가게 되는 조선 교우와 만나 조선 입국의 마지막 소원을 달성하려다가 멀리 조선 하늘을 바라보면서 숨을 거두게 되었으니 애석한 일이다.


  이러한 슬픈 소식을 서만자(西灣子)에서 들은 나(羅, Maub-ant) 신부는 곧 벨리구로 달려가 소 주교의 장례를 치르고, 곧 봉황성으로 나와 1836년 1월 10일에는 드디어 정 하상 · 조 신철(趙信喆) 등 5명의 교우를 마나게 되었다. 나 신부는 상복(喪服)차림의 조선 의관으로 갈아입고, 교우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무사히 국경의 관문을 통과하여 그해 1월 25일 서울에 들어와 유 방제 신부의 집에 짐을 풀게 되었다. 


  이리하여 앞으로 3년 9개월 동안에 걸친 나 신부의 조선 전교활동이 시작되고, 조선 교회는 주 문모 신부를 잃은 이후 35년 만에 프랑스 성직자를 모시게 되었는데, 그가 조선 입국 때에 착용한 방갓 차림의 상복(喪服)은 한불 수호조약(韓佛修交條約)이 비준(批准) 됨으로써 신앙의 자유가 억지로나마 얻어지게 된 1887년까지 이르는 반세기 동안에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모든 프랑스 성직자들이 죽음을 피하기 위하여 입고 다녀야 할 구명(救命)의 제복(祭服)이었다.

 

 

                                            -  [간추린 한국천주교회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