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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중국인 주 문모 신부의 입국과 전교 활동 본문

[♡ 자유와 평화 ♡]/한국천주교 歷史

9. 중국인 주 문모 신부의 입국과 전교 활동

자유인ebo 2011. 8. 23. 10:37

 

8. 중국인 주 문모(周文謨) 신부의 입국관 전교 활동  

 

   

 

 

 

(1) 주 문모 신부의 조선 입국


  조선 교회의 간청에 따라 신부를 보내 줄 것을 약속한 북경교구(北京敎區) 구베아 주교는 1791년 2월에 마카오 태생 중국인 오(吳) 요안 레미디오스(Johannedos Remedios, Wou) 신부를 조선 국경 지대인 봉황성(鳳凰城, 邊門)에까지 보내 보았으나, 조선 교인이 마중 나오지 못하여 그로 하여금 헛되이 북경으로 돌아오게 했다. 이때 조선 교인들이 마중을 나가지 못하게 된 것은 조상 제사를 금지시킨 북경 주교의 서한(書翰)으로 말미암아 조선교회 안에서 동요가 일어나고 박해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북경주교는 바로 그해에 스스로 교회를 세우고 신부의 파견을 요청한 조선교회의 약사(略史)를 로마 교황 비오6세에게 보냄으로써 이듬해에는 교황으로 하여금 특이하게 성립된 조선교회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게 하였다. 한편 조선교회에서는 바로 그해에 신해교난이 일어나 혹독한 박해가 시작되고 있었으므로 이후 2년 동안은 대외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때에 교회를 이끌어 나간 교우(敎友)는 양반 계급의 권 철신(權哲身, 암보로시오) · 정 약종(丁若鍾, 아오스딩)과 중인 계급의 최 창현(崔昌顯, 요한) · 최 인길(崔仁吉, 마디아) 이었다. 특히 정 약종(1760~1801)은 명도회장(明道會長)으로서 《주교요지(主敎要旨)》라는 교리 입문서를 국문(國文)으로 만들어 전교에 힘썼으므로 신자들이 날로 늘어가게 되었는데, 그것은 조상의 신주를 모실 수 없었던 중인 계급 이하에서 더욱 그러하였다.


  그리하여 권 철신 등이 1793년에 윤 유일(尹有一) · 지 황(池璜)을 다시 북경에 보내니, 이들을 반가이 맞은 북경 주교는 그들에게 신부를 맞아들일 방법을 생각해 보라는 한편 중국인 주 문모(周文謨 야고보, Jacques Vellozo) 신부를 보내기로 결정 했다. 이러한 반가운 소식을 가지고 귀국한 윤 유일은 곧 최 인길과 더불어 서울 북부 계산동(桂山洞, 桂洞) 깊숙한 곳에 천주당(天主堂)을 차려놓고, 다시 동지사를 따라 1794년 12월에는 의주(義州) 북방 120리(理) 지점에 있는 봉황성(鳳凰城)에 이르렀다. 여기서 윤 유일은 주(周) 신부를 만나 조선옷으로 갈아입히고 그달 23일 밤에 어둠을 타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의주 관문(義州關門)을 무사히 넘은 후, 낮에는 숨고 밤에만 걸어서 12일 만인 1795년 정월 초에 서울에 돌아와 계산동 집에서 교우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게 했다.


  이리하여 조선천주교회는 창설된 지 11년 만에 비로소 성직자를 모시게 됨으로써 참다운 교회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는데, 그때의 전국 교우수(敎友數)는 이미 4천여 명을 헤아렸다. 그러므로 주 신부는 우선 몇 달 동안 조선말을 배우고, 토요일에는 몇 사람들의 어른들에게 세례를 주며, 필담(筆談)으로써 고죄(告罪)를 듣고 그해 부활절(復活節) 아침에는 입국 후 처음으로 미사를 드리어 교우들에게 성체(聖體)를 배령(拜領)하는 영광을 갖게 하였다. 그리고 그해 6월까지 계산동 집에 머무르면서 찾아오는 사람은 누구나 만나주고 준비된 사람에게는 성사(聖事)를 주었다.


  이러한 사이에 어느 날 한 영익(韓永益)이라는 배교자(背敎者)가 찾아와 회개하는 척 하면서 주(周) 신부의 입국경위, 인상(人像) 등을 알아가지고 돌아가서 이를 이벽(李檗)의 동생이며 교회 반대자인 병사(兵使) 이 석(李晳)에게 알렸다. 그러나 한 영익으 수상한 거동으로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짐작한 최 인길은 신부를 충청도 연산(連山)에 있던 이 보현(李步玄)의 집으로 피신시키고, 스스로 신부행세를 가장(假裝)하며 잡혀가 지 황(池璜) · 윤 유일과 함께 다음날 좌포도청(左捕盜廳)에서 사형을 받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주 신부는 몇 달 후 서울에 있던 충청도 내포 출신의 여교우(女敎友) 강 완숙(姜完淑, 골롬바)의 집으로 옮겨와 이후 6년 동안 숨어 살면서 전교활동에 힘썼다. 그 결과 그는 1800년까지에는 1만여 명의 신자를 거느리게 되고, 몸소 전주 · 내포(內浦) 지방에까지 다니면서 교인들을 다스렸다.



 

(2) 근대화 촉구와 왕실 전교

 


  한편 주 신부는 1796년 9월에 조선교회의 사정을 적은 보고서를 만들어 황 심(黃心)으로 하여금 이것을 가지고 동지사(冬至使)를 따라 북경으로 가서 구베아 주교에게 전하게 하였는데, 그 속에는 동양 전교의 보호권을 가지고 있던 포르투갈 국왕이 사신을 조선에 보내어, 두 나라 사이에 수호조약(修好條約)을 맺고 천문(天文) · 의학(醫學)에 밝은 신부를 보내줄 것을 요청함으로써 조선의 문호(門戶)를 개방하고자 꾀하였다. 그런데 이때에는 동양 무역권을 프로테스탄트의 나라이던 네들란드 사람들이 차지하고 포르투갈은 제 3류 국으로 전락하고 있었으므로 주 신부으 모처럼의 계획은 실현을 보지 못하였으나, 주 신부가 중국 이외의 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맺지 않고 있던 쇄국주의의 나라인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던 일은 이 나라에 들어올 외국인 성직자의 안전을 위한 계획으로서 조선의 근대화를 촉구한 뜻있는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주 신부는 이와 같이 조선의 문호 개방을 촉구하는 일을 일으키는 한편, 강 완숙의 집에 숨어서 조선말과 습관을 익히며 복음 전파에 헌신적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때가 때인 만큼 주 신부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면 직접 만나주지 않고, 외출시에는 강 완숙 이외에 그의 가는 곳을 아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지방 교우들은 이 나라에 신부가 들어와 있는 일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러한 제한된 생활 중에서도 주 신부는 강 완숙의 중개로 임금 정조(正祖)의 서제(庶弟)이던 은언군(恩彦君)의 아내 송씨(宋氏) 부인과 그 며느리 신씨(申氏) 부인에게 세례를 주었다. 은언군은 그의 아들 상계군(常溪君)이 반역을 꾀하였다는 죄로 1786년 독살되자, 이에 관련되어 그해 12월 28일에 강화도(江華島)로 귀양가게 되었다.


  따라서 서울의 폐궁(廢宮)인 경희궁(慶凞宮)에는 은언군의 아내이던 송씨 부인과 상계군의 아내이던 신씨 부인이 외롭게 살게 되니, 이 두 부인의 불행을 동정하던 어느 여교우는 1791년경부터 이들을 찾아가서 사랑의 복음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조상 제사 폐지 문제로 그해에 신해교난이 일어나게 되어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이 없더니, 마침내 강 완숙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어, 주 신부를 모시고 그 폐궁으로 가서 두 귀부인에게 각각 마리아라는 교명(敎名)으로 세례를 주게 하였다.


  그리하여 영신적(靈神的)으로 재생하게 된 송(宋) 마리아 · 신(申) 마리아는 여회장(女會長) 강 완숙의 감화를 받아, 교리연구 단체인 ‘명도회(明道會)’에도 가입하여 열심히 신앙을 지키는 한편 때때로 주 신부를 모셔다가 설교를 듣고 그들의 시비(侍婢)들까지도 입교케 하였는데, 이들은 바로 1849년에 임금 자리에 오른 25대왕 철종(哲宗)의 할머니이며 큰 어머님이었다.

 

 

                              -  [간추린 한국천주교회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