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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조선 선비들의 천주교 연구 본문

[♡ 자유와 평화 ♡]/한국천주교 歷史

6. 조선 선비들의 천주교 연구

자유인ebo 2011. 8. 26. 10:32

 

5. 조선 선비들의 천주교 연구  

 

 

 

(1) 조선의 사대 정책


  조선 왕조는 개국하면서부터 중국을 섬기어 해마다 몇 차례씩 사신을 보내는  사대정책(事大政策)을 쓰는 한편, 주자학(朱子學, 性理學)을 지도 이념으로 삼아 지배자인 양반 계급에서는 사당[家廟]을 세워 4대조(四代祖)까지의 제사를 엄격히 지내게 하고 그때까지 1천여 년 동안 국교(國敎)로 믿어오던 불교를 몹시 탄압하였다.

 

  이에 따라 양반 계급 사이에서는 차차 사장파(詞章派)와 성리학파(性理學派)의 대립이 생겨, 서로 죽이는 이른바 사화(士禍)를 네 차례나 일으키게 되고, 이것은 다시 당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편 불교의 탄압으로 올바른 신앙을 잃은 국민은 원시적인 신앙 생활로 돌아가거나 새로이 나타난 《정감록(鄭鑑錄)》 · 《토정비결(土亭秘訣)》과 같은 미신서를 믿게 된 것이 왜란 때까지의 정신 생활 상태였다.

 

  이와 같이 나라의 위정자들이 분열되고 국민정신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을 때에 왜란과 호란(胡亂)이 겹쳐 닥쳐와 나라와 민족을 위태롭게 하게 되니 뜻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신앙 대상를 찾아 헤매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북경에서는 마테오 릿치 신부 등이 서양의 학술 서적을 간행하는 한편, 천주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전파하게 되니 사신(使臣)들의 손을 거쳐 이러한 서적들을 얻어 보게 된 조선 선비들은 그를 연구하는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테오 릿치 신부가 지은 세계지도인 《만국여도》가 1603년에 우리의 사신 이 광정(李光庭)의 손을 거쳐 조선에 들어오고 뒤를 이어 《천주실의》를 비롯한 여러 가지의 서양 학술관계 서적이 전래되게 되니, 조선인의 인생관과 세계관은 급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공리공론(空理空論)만을 떠들고 당쟁을 격화시키던 주자학을 떠나 현실 생활에 관련된 역사 · 지리 · 정치 · 경제 등을 연구하는 실학(實學) 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이것은 마침내 천주교를 믿는 서학(西學)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운동은 주로 한강(漢江) 유역에 살던 남인(南人) 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2) 이 수광의 천주실의(天主實義) 논평


  우리나라 실학(實學) 운동의 선구자는 지봉(芝峯) 이 수광(李睟光, 1563~1628)이었다. 그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太祖)의 8대 후손으로서 선조(宣祖) · 광해군(光海君) · 인조(仁祖) 3대에 걸쳐 높은 벼슬을 하고, 1590년과 1611년에는 사신으로 북경에까지 다녀온 남인(南人) 출신의 학자였다. 그는 힘닿는 대로 동서 고금의 3백 48종의 책을 읽고 그것의 개요를 부문별로 수록하여 1614년에 20권으로 된 《지봉유설(芝峯類說)》이라는 일종의 백과전서(百科全書)을 편찬하였는데, 그 속에는 마테오 릿치 신부가 지은 《만국여도》 · 《천주실의》 등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바로 그때 그의 친구인 김 현성(金玄成)은 이 책을 빌려 읽고 그 서문(序文)을 지어 말하기를,

  

  유설(類說)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총명을 개발하고 지려(智慮)를 익진(益進)함이 마치 귀머거리가 새 귀를 얻고, 장님이 네 눈을 얻는 것과 같다.


고 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처음으로 지구가 둥근 것과 중국 이외에 서양의 나라가 있음을, 그 나라에서는 천주교라는 종교를 믿고 있음을 알린 것으로서 이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말 세계관과 인생관을 크게 바꾸게 하였던 것이다. 이 책에서는 《천주실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구라파국(歐羅巴國)은 태서국(太西國)이라고도 말한다. 이마두(利馬竇)라는 사람이 있어 바다를 쫓아 8년 동안에 8만 리(理)의 풍도(風濤)를 건너 동월(東越, 廣東)에 거처하기를 10년이었는데, 그가 지은 《천주실의》 첫머리에서 천주(天主)가 처음으로 천지를 창조하여 안양(安養)의 도(道)를 주재(主宰)함을 논하고, 다음으로 인혼(人魂)이 불멸하여 금수(禽獸)와 크게 다름을 논하고, 다음으로 인혼(人魂)이 불멸하여 금수(禽獸)와 크게 다름을 논하고, 다음으로 윤회육도(輪廻六道, 佛敎)의 그릇됨과 천당 · 지옥 · 선악의 응보를 변론하고, 끝으로 인성(人性)은 본래 착하니 천주(天主)의 뜻을 공경하여 받들어야 한다고 논하였다. 그 풍속은 임금을 교화황(敎化皇, 로마 교황)이라 부르는데, 흔하지 않기 때문에 후사(後嗣)가 없으므로 어진이를 택하여 세운다. 그 풍속은 사량〔友誼〕을 중시 여겨 사사로이 저축하지 않는다. 중우론(重友論, 交友論)을 저술하였다.

 

   이와 같이 지봉(芝峯)은 마테오 릿치가 지은 《천주실의》 2권과 《교우론(交友論)》 1권과 1603년에 유 변(劉汴) · 심 인기(沈隣奇) 등이 지은 《속이담(續耳譚)》 6권 등을 얻어보고, 그 내용을 소개함으로써 새로운 실학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러한 천주교 서적들은 그 후손들에게 전승(傳乘)된 것 같아 1백 70년을 지나 그의 8대 후손인 이윤하(李潤夏)에 이르러서는 천주교를 믿는 운동을 일으켜, 윤하의 자녀인 이 경도(李景陶) · 순이(順伊)누갈다 · 경언(景彦) 3남매는 순교까지 하게 되었다.

  


(3) 허균(許筠)의 천주교 신봉


  지봉(芝峯)과 같은 시대 사람으로서 이조 판서를 지내다가 1623년에 사형을 받은 유 몽인(柳夢寅)도 그의 저서인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천주교를 자세히 소개하고 다음과 같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허 균(許筠, 1569~1618)이 처음으로 이를 받아들여 믿었음을 밝히고 있다.

 

   구라파(歐羅巴)라는 것은 방언(方言)으로 태서(太西)라는 말이다. 그 나라에 한 종교가 있으니 기리단(伎利檀, 크리스찬)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방언으로 천(天)을 섬긴다는 말이다. 그 도(道)는 유교도 아니고 선도(仙道) · 석도(釋道)도 아니다.··· 일본은 자고로 석씨(釋氏, 부처)를 숭배하더니 기리단[크리스찬]이 들어오매 석씨[부처]를 버리고 요(妖)라 하였다. 앞서 평 행장(平行長, 小西行長)이 이 도(道)를 존숭했다. 그 가르침이 이미 동남 여러 오랑캐들〔東南諸夷〕에서 행하여 자못 믿는 사람이 많다. 홀로 우리나라만이 이것을 알지 못하더니 허 균이 중국에 이르러 그 《지도》와 게 12장(偈十二章, 12端 經文)을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

 

  이 글로 보면 허 균이 북경에 가서 천주교의 열 두가지 기도문(祈禱文)인 12단(十二端)을 얻어가지고 귀국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것은 곧 그가 그것들을 외우며 천주교를 믿게 되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한 사실은 1백 60여 년 뒤에 나타난 유명한 실학자인 안 정복(安鼎福) · 박 지원(朴趾源) · 이 규경(李圭景) 등이 벌써 시인하고 있다. 특히 이 규경은 그의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사교변증조(邪敎辨證條)에서 이 식(李植)의 《택당집(澤堂集)》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허 균이 비로소 천주교서(天主敎書)를 얻어 학습하며 말하되, ‘나는 천(天)을 따르고 성인(聖人)을 따르지 않으련다.’ 하였으니 그 교(敎)가 차차 나타남을 알 것이다.

 

  이러한 글로 보아 허 균이 우리나라 선비로서 처음으로 천주교를 믿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허 엽(許曄)의 셋째 아들로서 그 두 형인 성(筬) · 봉(篈) 및 누님인 난설헌(蘭雪軒)과 더불어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특히 《홍길동전(洪吉童傳》이라는 국문 소설을 처음으로 지은 선비였다. 그는 1614년과 1616년에 사신으로 북경에 들어간 일이 있었고, 특히 첫 번째의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왔을 때에는 중국에서 가지고 온 《학해(學海)》 · 《촌거만록(村居漫錄)》 등 4종의 중국 서적을 국왕 광해군(光海君)에게 바친 일이 있었으니, 그가 천주교의 12가지 기도문을 얻어오게 된 것도 이때의 일로 여겨진다.

 

  그는 올바른 신앙을 찾기 위하여 한때 불교도 깊이 연구하였으나, 여기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천주교를 믿게 된 것 같으며, 1618년에 반역죄로 몰려 사형을 받았다.

  


(4) 이 익(李翼)과 그 문인들의 천주교 연구


  이  광이 일으킨 실학 운동 가운데 특히 천주교 연구 운동이 그 뒤 1백여 년을 지나 한강 유역인 광주(廣州) 땅에 숨어 살았던 남인(南人) 학자 이익(李翼, 1681~1763)과 그 문인들 사이에서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 익은 당파 싸움이 가장 격렬했던 숙종(肅宗) 8년(1682)에 대사헌(大司憲) 이 하진(李夏鎭)의 아들로 태어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광주(廣州) 성호(星湖, 瞻星里)에 숨어살면서 오로지 학문 연구와 제자(弟子) 양성에 몸을 바쳐, 실학에 관한 《성호새설(星湖僿說)》을 비롯하여 많은 시문(詩文)을 지었다. 그는 특히 마테오 릿치 신부의 《천주실의》, 아담 샬 신부의 《주제군징(主制群徵)》, 이탈리아 사람인 판도자( Pantoja, 龐迪我)의 《칠극(七克)》을 애독하고, 이들에 대한 발문 등을 쓰며, 제자들과 토론하였다. 그는 《천주실의》의 발문에서,

 

  그 학(學)은 오로지 천주를 존중하고 있다. 천주는 곧 유가(儒家)의 상제(上帝)인데 그를 공경하고 섬기며 두려워하고 신앙함은 불교의 석가(釋迦)와 같다.··· 그러나 그가 축건(竺乾, 印度)의 교(敎, 佛敎)를 배척하는 바는 오히려 다 같이 환망(幻妄)에 돌아감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라고 평하고, 다시 《칠극(七克)》의 논평에서는,

 

  칠극(七克)은 서양의 판도자〔龐迪我〕가 지은 바로서 곧 우리 유가(儒家)의 극기설(克己說, 克己復禮說)이다.··· 일곱 가지 가운데 다시 절목(節目)이 많아서 조관(絛貫)이 차례지어 있고 비유가 간결하며, 그 속에는 우리 유가에서도 아직 발견하지 못한 데가 있으니, 이는 자기 욕망을 이기고 예(禮)로 돌아가는 일을 돕는 공(功)이 있을 것이다.

 

라 기술하여 천주교의 공(功)을 인정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익은 제자 안 정복(安鼎福, 1712~1791)과 천주교에 대한 토론도 가졌었다. 안 정복도 광주 땅 덕곡(德谷)에 숨어 살면서 이익에게 글을 배운 실학자로서 《동사강목(東史綱目)》 · 《광주지(廣州誌)》 등의 많은 책을 지어 내고, 만년에는 영조(英祖)의 부름을 받고, 세손(世孫, 正祖)의 스승이 되어, 정조 때에도 같은 벼슬을 살았다. 그는 1757년 46세 때에 마테오 릿치 신부의 《변학유독(辨學遺牘)》을 읽고 이 익에게 “스승님께서도 이 책을 읽으셨읍니까”라고 물었다 하니, 그들 사이에 천주교가 거듭 토론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또 기술하기를 “명경석유(名卿碩儒)로서 천주교 책을 보지 않는 사람이 없다.”하였으니, 1760년경에는 선비들 사이에 천학(天學) 또는 서학(西學)이라고 부르던 천주교 서적이 크게 읽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안 정복은 그의 사위이던 직암(稷庵) 권 일신(權日身)들이 천주교를 믿는 운동을 일으켜, 조상들의 신주(神主)를 불살라버림을 보고 이것이 장차 당쟁의 불시로 될 것을 두려워하여 《천학고(天學考)》 ·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저술하여 그들을 개심(改心)케 하고자 꾀하였다. 더욱이 그는 1784년에 사위의 형인 권 철신(權哲身)에게 글을 보내어 다음과 같이 경고한 일이 있었다.

 

   이제 또 듣건대 서토(西土)의 학(學)을 그대로 면치 못하여 떠들어 대니 모든 젊은이들의 창도하는 바가 과연 무엇 때문에 그러한 것인가요.··· 또 듣건대 모모배(某某輩, 李家煥· 丁若銓· 李承薰· 李檗)가 서로 결약(結約)하여 신학(新學)의 설(說)을 고습(攷習)하고 어지럽게 말한다 하니, 이 모두 그대의 절실한 친구들이며 문도(門徒)로다.

 

 이 무렵 성호의 제자들은 천주교를 서양에서 들어온 학문이라 하여 ‘서학’ 또는 천주님을 믿는 학문이라 하여 ‘천학.’ 서양에서 들어온 새로운 학문이라 하여 신학‘(新學)’이라고 불렀다.

 


(5) 홍 유한(洪儒漢, 1726~1785)의 천주교 신봉


  성호 이 익의 제자들 중에는 천주교를 신앙하는 이들과 천주교를 신앙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안 정복 · 윤 동규(尹東奎, 1693·1773), 신후담(愼後聃, 1702~1762) 등 주로 나이가 많은 제자들은 서학의 서작들을 깊이 탐독하면서도 평생 동안 믿어온 유교의 학문을  하루아침에 버릴 수가 없어 천주교를 비판하고 믿지 않았다. 특히 신 후담은 서양 필방제(畢方濟 : Fran-ciscus Sambiasi)신부가 지은 《영언리작(灵言蠫勺)》을 읽고 영혼불멸설과 서양 기독교 철학의 이론을 부인하는 《서학변(西學辨)》을 지었다. 이에 비하여 권 철신, 홍 유한 등 젊은 제자들은 서학 서적들을 읽고 새로운 진리에 심취한 나머지 이를 남몰래 신앙하기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홍 유한은 홀로 남몰래 신앙생활을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홍 유한은 인조 때 대사성(大司成)이라는 높은 벼슬을 지낸 홍 이상(洪履祥)의 후손으로, 본관은 풍산이며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홍 중명은 유명한 효자로서 나라에서 정려문을 세워주어, 그의 집 대문 앞에는 홍살문이 세워졌다. 이러한 집안에서 태어난 홍 유한은 16세 때부터 성호 이 익의 문하에 가서 글을 읽으며 정 상기(鄭尙驥), 윤 동규, 신 후담, 안 정복, 권 철신 등 당대의 쟁쟁한 실학자들과 교유하는 한편, 성호의 조카 이 용휴(李用休), 이 병휴(李秉休), 증손자 이 삼환(李森煥)들과 사귀었다. 그러나 홍 유한은 태어나면서부터 오농(懊膿)이라는 불치의 독질(毒疾)에 걸려, 몸이 천성적으로 허약하고 마음은 비단처럼 고왔다. 그가 32세 되던 1757년에 그의 아버지 홍 창보(洪昌輔)가 돌아가자, 그는 스승의 권고에 따라 몸을 휴양하기 위하여 서울의 집을 팔고 충남 예산군 여촌(餘村)으로 이사를 갔다. 마음이 착한 홍유한은 마침내 《천주실의》 《칠극》 《직방외기(職方外紀)》 등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고 1775년부터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천주교를 신앙하기 위하여 소백산(小白山) 밑에 있는 구고리(九臯里 : 현재 경북 영주군 단산면)로 옮겨가 살면서 신앙생활을 실천하였다. 그는 천주교의 축일(祝日)이 7일마다 있음을 알고, 매월 · 14일 · 21일 · 28일에는 힘든 일을 하지 않고, 묵상 수덕(黙想修德)에 힘쓰며 맛있는 음식을 들지 않았다. 욕망을 사악(邪惡)이라고 보아, 이것을 억제하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치며 도중에서 불쌍한 사람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그 사람을 대신 태워 끌고 가며, 매전(賣田)이 수해(水害)를 본 때에는 그 값을 돌려주었다 한다. 그는 권 철신과 매우 친하여 이러한 신앙생활을 10여 년 동안 하는 사이에 권 철신의 서한을 40여 통이나 받고, 1785년 정월에는 그 곳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영세를 받지 못하였으나 천주님으로부터 ‘화세(火洗)’를 받은 듯하다. 

 

 

 

                       - [간추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