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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와 평화 ♡]/한국천주교 歷史

5. 소현세자와 아담 샬 신부의 전교

자유인ebo 2011. 8. 27. 10:31

 

4. 소현 세자와 아담 샬 신부의 전교

 

                                                                      죽림동성당

 

(1) 병자호란과 소현 세자의 볼모살이


   임진왜란과 정유 재란을 치룬 후 30년만에 우리 민족은 두 번째로 정묘 호란(丁卯胡亂) ·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는 큰 국난을 또 겪게 되었다. 1616년에 후금국(後金國)을 세운 만주(滿洲)의 여진족은 1627년에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아우 나라로 삼고, 1636년에는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치며 이를 경축하는 사신을 보내줄 것을 조선에 요구하였다. 이 요구가 거절되자, 청나라 태종(太宗)은 그해 12월에 병자호란을 일으켜 10만의 군사로써 남한산성(南漢山城)을 포위한 끝에, 이듬해 정월에 인조(仁祖)의 항복을 받고 조선을 신하의 나라로 삼는 한편, 소현 세자를 비롯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 후의 孝宗) 등을 볼모〔人質〕로 잡아갔다. 이리하여 소현 세자 등은 이후 8년 동안 심양관(瀋陽館, 奉天에 있음)에서 괴롭고 쓸쓸한 볼모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이 사이에 청나라는 명나라의 서울이던 북경(北京)을 차지하고, 1644년 9월에는 이곳으로 서울을 옮겼다. 이에 따라 소현 세자 등도 북경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뜻밖에도 같은 신세로 있던 독일인 예수회 신부 아담 샬(Johanne Adam Schall, 湯若望 1591~1666)을 만나 두 달 동안 가까이 사귀게 되었다.

 

  아담 샬 신부는 32번째로 중국에 파송된 예수회 신부로서 1628년에 북경에 들어와 명나라 신종(神宗)의 신임을 얻어 동안문(東安門) 안에 살면서 역서(曆書)와 대포(大砲)를 만드는 일을 맡아 보았다. 그러므로 청나라 세조(世祖)도 북경을 서울로 삼게 되자 그해에 그를 신임하여 흠천감정(欽天監正, 天文臺長)을 삼고《대청시헌력(大淸時憲曆)》 등을 짓게 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1653년에는 통현교사(通玄敎師)의 칭호를 받고, 1658년에는 광록 대부(光祿大夫)라는 벼슬까지 받아 영광을 누리다가 1666년에 75세로 서거하였다. 그는 명(明) · 청(淸) 양조(兩朝)에 걸쳐 38년 동안 북경에서 전교하는 사이에 종교와 과학에 관한 20여종의 서적을 저술하였는데, 그 중 주요한 것은 《주교연기(主敎緣起)》 5권<敎理書>, 《진복성전(眞福性詮)》 1권<福音書>, 《주제군징(主制群徵)》 2권<神學人門書> 등의 종교서와 《숭정력서(崇禎曆書)》 · 《원경설(遠鏡說)》 · 《서양측일력(西洋測日曆)》 · 《항성력지(恒星曆指)》 · 《측식략(測食略)》 · 《신법력(新法曆)》 《대청시헌력(大淸時憲曆)》등의 과학서이었다.

 

 

(2) 소현 세자와 아담 샬 신부의 사귐


  아담 샬 신부의 처음 거처는 북경 동안문(東安門)안에 있어서 소현 세자의 숙소인 동화문(東華門) 안의 문연각(文淵閣) 과 매우 가까운 곳이었다. 한편, 샬 신부는 마테오 릿치(Matteo Ri-cci) 신부가 세운 선무문(宣武門, 南門) 안의 남천주당(南天主堂) 과 그 동쪽에 있던 흠천감 역국(欽天監曆局)에서도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1644년 9월 20일께 북경에 들어간 소현 세자는 비슷한 신세로 되어 있던 샬 신부의 명성을 듣고, 먼저 그를 찾아가 깊은 친교를 맺게 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그 때의 남천주당 신부이던 황 비묵(黃斐黙)은 그의 저서인 《정교봉포(正敎奉褒)》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순치(順治) 원년(1644)에 조선왕국 이 종(李倧, 仁祖)의 세자는 북경에 볼모로 와서 샬 신부〔湯若望〕의 명성을 듣고, 때때로 천주당을 찾아와 천문학 등을 살펴 물었다. 샬 신부도 자주 세자 관사(館舍)를 찾아가서 이야기함이 오래고 서로 깊이 사귀니, 샬 신부는 거듭 천주교가 정도(正道)임을 말하고, 세자도 자못 듣기를 좋아하여 자세히 묻곤 했다. 세자가 귀국함에 미쳐 샬 신부는 선물로 그가 지은 천문(天文) · 산학(算學) · 성교 정도(聖敎正道)의 서적 여러 가지와 여지구(與地球) 1틀, 천주상(天主像) 1폭을 보냈다. 세자는 삼가 이것들을 받고 손수 글월을 써 보내 치사했다.


  이리하여 소현 세자와 샬 신부는 세자가 북경을 떠나 귀국 길에 오르게 된 그해 11월 26일에 이르기까지 60여 일 동안 서로 내왕하면서 두터이 사귀게 되었는데, 원래 서로 뜻한 바는 다른 곳에 있었다. 세자로서는 신부에게 새로운 역법(曆法) 등을 배우자는 것이고, 신부로서는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조선에 천주교를 전파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부는 세자에게 귀국함에 즈음하여 명나라 황실(皇室)의 신자이던 환관(宦官)과 궁녀들을 데리고 갈 것을 청하자, 세자는 이를 받아들일 뿐더러 서양 신부를 보내 줄 것을 부탁하였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중국에서 조차 신부의 부족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다만 환관 · 궁녀들만을 보내기로 합의를 보았었다.



(3) 소현 세자의 환국(還國)


  이러는 사이에 세자는 그의 볼모살이에서 보인 충정과 북경을 서울로 삼게 된 일을 경축하는 뜻에서 청나라 황제로부터 귀국의 허락을 얻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청나라 황제로부터 내린 신자 환관인 이 방조(李邦詔) · 장 삼외(張三畏) · 유 중림(劉仲林) · 곡 풍등(谷豊登) · 두 문방(竇文芳)과 여러 신자 궁녀들을 거느리고 신부에게 얻은 서적 · 성물(聖物) 등을 가지고 1644년 11월 26일 북경을 떠나 이듬해 2월 18일 서울에 돌아왔다.

 

  이때 명나라 황실의 신자들을 데려오게 된 것은 그들을 통하여 조선 왕실을 교화시키자는 샬 신부의 계책에 따른 것이었으므로 세자도 이들을 우리나라에서 살게 하고 앞으로 신부도 맞아들이려 하였다.

 

  그런데 세자는 귀국한 뒤 뜻밖에도 70일 만인 그해 4월 26일에 34세로 갑자기 죽음으로써 모든 일이 헛되게 되었다. 세자는 3일 동안 앓다가 학질로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은 그의 계모인 조비(趙妃, 壯烈王后)의 흉계로 독살되었음이 밝혀졌다. 이에 따라 그가 가져온 서적 · 성물들도 불살라 버리게 되고, 명나라 환관과 궁녀들도 그해 7월에 청나라 사신을 따라 본국으로 돌려보내졌다. 이로써 모처럼 계획되었던 조선 전교 사업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북경에서 활동하고 있던 말티니(Martini)신부는 1655년에 간행된《신중국지도(新中國地圖)》의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나의 시절에도 조선왕(소현 세자)이 와서 순치(順治) 황제[世祖]를 만나보고 예수회 신부들과 친교를 맺었다. 이 기회에 천주교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조선인도 2, 3명이 있었다. 그 가운데에 1인은 왕의 대환관(大宦官)이며, 왕의 간청으로 신부를 조선에 데려가려 하였으나, 인원 부족으로 정당하고도 경건한 소망(所望)에 응하지 못했다.


  이 글로 보면 소현 세자를 따라다니던 조선인 몇 사람이 세례를 받게 되었음과 인원 부족으로 신부를 조선에 보내주지 못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세자의 신부 파견 요청에 응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정이 프랑스 파리에 알려지자, 성체회(聖體會)가 중심이 되어 신부를 더 많이 중국 교회에 보내자는 운동을 일으켜, 1663년에는 파리에 새로운 신학교가 세워져 외국에 보낼 신부를 양성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후술(後述)하는 바와 같이 바로 1831년부터 조선 교구(朝鮮敎區)의 전교를 맡게 된 파리 외방전교회(Ls Societe des Missions Etrangeres de Paris)이다. 이 전교회는 1664년에 로마 교황청의 공인을 얻어 극동과 카나다 지방의 전교를 맡게 되었다.                                            

 

-  [간추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