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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와 평화 ♡]/한국천주교 歷史

4. 일본주재 성직자들의 임란 포로 구제 활동

자유인ebo 2011. 8. 28. 10:29

 

일본 주재 성직자들의 임란 포로 구제 활동  

 

       

예수와 제자 베드로

 

(1) 성직자들의 임란 포로 구제


  1592년부터 1598년까지에 이르는 7년 동안에 걸쳐있던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말미암아 우리 국토는 거의 황폐화되고 일본으로 잡혀간 우리 동포는 거의 5만 명을 헤아렸는데, 구주(九州) 남부 지방에서도 3만 7백 명이 살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서 7천여 명은 풍신 수길의 뒤를 이어 일본의 통치권을 잡게 된 덕천 막부(德川幕府)가 조선과의 국교 회복을 꾀하기 위하여, 1600년부터 1617년까지에 이르는 18년 동안에 조선으로 송환하였으나, 남은 4만여 명의 우리 동포들은 도공(陶工)과 같은 천한직업을 이룩하거나 노예가 되어 일본에 살거나 그곳을 왕래하던 포르투칼 상인의 손을 거쳐 아주 헐값으로 멀리 마카오 · 필리핀 · 교지 지나(交趾支邦, 越南) · 인도(印度) 등지로 팔려 갔었다.

 

  이러한 비인도적인 인신 매매 행위를 보고 격분한 일본 가톨릭 교구장(敎區長) 세루케이라(Cerqueira) 주교는 1598년 6월 1일에 12명의 신부들과 더불어 성직자 회의를 열고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금지책(禁止策)을 세웠다.


① 인신(人身)을  매매하는 상인은 파문벌(破門罰)에 처한다.

② 노예 1 의 매매에 10구르사드(포르투칼 화패 단위)의 벌금을 징수한다.

 

 

  이와 같이 노예 매매금지법을 세우는 한편, 일본 주제 서양인 성직자들은 팔려가는 조선인 노예들을 적극적으로 구제하여 자유인으로 해방시켜 주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포루투칼 상인들이 출입하던 장기(長崎)에서는 신학교를 개방하여 구제된 조선인들을 수용하고, 일본어를 가르치며 가톨릭을 전교하여 1595년의 예수회 보고서(報告書)에도 3백 명을 구제했다고 적혀 있다. 이러한 일은 그후 더욱 많아져서 장기(長岐) 지방에서는 2천 명의 조선인 남여를 구제하여 이들을 모두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하였다.

 

  이들은 총명하고 기지가 많아서 쉽게 일본어를 배우고, 가톨릭을 믿게 되었으므로 어느 모로 보나 조금도 일본에게 뒤짐이 없었다고 성직자들은 기술하고 있다.

 

  이밖에도 일본인 가톨릭 신자 가정에서 구제되어 가톨릭으로 개종한 동포도 5천 명을 헤아렸으므로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잡혀간 동포 중 가톨릭으로 개종한 동포는 모두 7천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 땅에서 성직자들에게 구제되어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된 조선인 7천 명은 풍신 수길의 금교 정책을 계승한 덕천 막부(德川幕府)가 1611년부터 1720년까지에 이르는 1백여 년 동안에 내린 철저한 탄압 정책으로 말미암아 모두 그곳에서 순교하게 되었다.

 

  오늘날 일본 교회 사상(史上)에 이름을 남긴 조선인이 30여명이 있는데, 그들 가운데는 온갖 악형(惡刑)에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킨 동포가 25명이 있고, 이로 말미암아 목숨을 잃은 순교자가 21명이 있다.

 

  이와 같이 신앙을 굳게 지키면서 목숨까지 바친 일본 교회 사상의 순교자 2백 5명을 뽑아, 로마 교황 비오 9세는 1867년 7월 7일에 그들을 복자위(福者位)에 올리는 시복식(諡福式)을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하였는데, 이들 가운데에서 다음과 같은 10여 명의 조선인이 들어 있다.


 죽옥(竹屋, 다케야) 고스마는 부유한 생활을 하며 그 집을 신부들의 은신처로 삼다가 가를로 스피노라 신부와 같은 날에 잡혀 목촌(木村. 키무라) 레오날드 신부와 함께 1619년 11월 18일 장기(長崎, 나가사키)에서 불살려 죽었다.

 

 다케야(竹屋) 프란시스코는 고스마의 아들로서 1622년 9월 12일에 12세의 나이로 목을 잘렸다.

 

③ 다케야(竹屋) 아네스는 프란시스코의 어머니로서 그보다 하루 앞서 42세로 목을 잘렸는데, 아네스는 조선 여인(女人)인 것 같다.

 

④ 안토니오는 목촌(木村, 키무라) 세바스티아노 신부의 하숙집 주인으로서 조선인 하녀의 밀고로 잡혀 신부와 함께 1622년 9월 10일에 불살려 죽었다.

 

 요한은 위의 안토니오의 아들로서 같은 날에 12세로 목을 잘렸다.

 

 베드로는 안토니오의 아들로서 같은 날에 3세로 목을 잘렸다.

 

 마리아는 안토니오의 아내로서 같은 날에 목을 잘렸는데, 그는 조선 여인이었다.

 

⑧ 가이오는 12세 때 왜병에게 잡혀 일본 경도(京都)에 있는 절에 들어가 불교를 배우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는 예수회의 전교 회장이 되어 나병환자를 돕다가 1614년에 내린 추방령으로 필리핀에 한때 내쫓겼다. 얼마 후 다시 일본으로 들어와 열심히 전교하다가 그 집에 신부를 머물게 하였다는 죄로 잡혀 도미니크회(會)의 와스케스 신부와 함께 1624년 11월 5일에 불살려 죽었다.

 

⑨ 권(權) 원선시오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높은 벼슬을 하며 살던 양반집 자제로서 13세 때 왜병에게 잡혀, 소서 행장(小西行長)의 보호로 경도에 있던 예수회 신학교에 들어가 수사(修士)가 되었다. 그는 조선전교의 뜻을 품고, 명나라 북경으로 건너가 7년 동안 머물면서 입국의 기회를 찾다가 실패하고, 1620년에 일본으로 돌아가 일본인 및 조선인에게 전교하던 중 잡혀, 1626년 6월 26일에 장기(長崎)에서 소라 신부 및 파세코 신부와 함께 불살려 죽었다.

 

⑩ 가이오 차우위문(次右衛門, 지오에멍)은 불교의 중노릇을 하다가 개종한 후 도미니크회 전교 회장이 되어 활동하던 중 잡혀, 1627년 8월 17일 장기(長崎)에서 불살려 죽었다.

 

⑪ 가스파르 와스는 프란시스코회(會)의 제 3 회원으로서 그 집에 신부를 재웠다는 죄로 잡혀, 1627년 8월 27일 장기(長崎)에서 일본인 아내 마리아와 함께 불살려 죽었다.

 

 

(2) 안토니오 코레아의 로마 유학


  그런데 이러한 박해가 거듭되던 그때에 있어서 때마침 세계 일주 여행길에 올랐다가 일본에 들렸던 이탈리아 신부 칼레티(Ca-rlettr)에게 구제되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멀리 가톨릭의 총 본산인 로마에까지 활동한 안토니오 코레아(Aatonio Co-rea)라는 교인이 있었다.

 

  플로렌스 사람인 칼레티 신부는 1594년에 본국을 떠나 대서양 · 서인도 제도(西印島諸島)를 거쳐 남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하고, 다시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 · 인도를 거쳐 1606년에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 사이에 그는 필리핀의 루손도(Luzon島)에 왕래하던 일본상선 소므(Somme)호를 타고, 1597년 6월에 장기(長崎)에 상륙하여 1598년 3월까지 9개월 동안 일본에 있었는데 이때 그는 안토니오 코레아를 비롯한 5명의 조선인 소년을 구제하였다. 본국에 들어가 전후 13년 동안에 걸쳤던 그의 세계일주 기행문을 써서 이를 1708년 플로렌스에서 출판하게 하였는데, 그 기행문 중에서 우리나라와 안토니오 코레아 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코레아(Corea)라는 나라는 9도(道)로 나뉘어져 있다고 말한다. 조선(Ciosien)이라는 이름은 수부(首府)로서 국왕이 거주하는 도시의 명칭이며, 경기 (Quenqui) . 강원(Conguan) . 황해(Hongliag) . 전라(Cioala) . 함경(Hienfion) . 충청(Jioncion) . 평안(Pianchin)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 나라의 가장 가까운 해안으로부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남녀노소가 노예로 잡혀 왔다. 그들 가운에는 보기에도 딱하리만큼 가련한 어린이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구별 없이 아주 헐한 값으로 매매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도 12스쿠디(Scudi)를 주고 5명을 샀다. 그리고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준 다음, 나는 그들을 데리고 고아(Goa)까지 가서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한 사람만 은 나와 함께 플로렌스시로 데리고 왔다. 그는 이제 로마에 살며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이름으  로 알려져 있다.


  이 글로써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조선 소년이 1606년에 이탈리아의 플로렌스까지 가서 교육을 받고 그 후 로마에서 활동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성직자에게 구제되고 가톨릭의 총본산인 로마에서 살고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성직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칼레티 신부의 여행기는 우리나라 사정을 수록한 가장 오랜 책 중의 하나인데, 이 시사로 말미암아 구미(歐美) 각국에서 우리나라를 ‘코레아(Corea)'라고 기술하게 되었다.

 

  따라서 1882년부터 맺게 된 한미(韓美) · 한영(韓英)조약 등에서도 우리나라를 모두 코레아(Corea)로 표기하게 되었으나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의 농간으로 이것을 ‘코리아(Korea)'로 바꾸게 되었다.            

 

 -  [간추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