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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와 평화 ♡]/한국천주교 歷史

3. 예수회 신부의 조선 입국과 전교 계획

자유인ebo 2011. 8. 29. 10:28

 

2. 예수회 신부의 조선 입국과 전교 계획  

 

 

                               

  

 

  우리 동양지역에 천주교를 처음으로 전파한 성직자들은 인류애 사상과 개척정신에 불타고 있던 예수회 신부들이었다. 그리하여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일본과 명나라에서는 이러한 성직자들의 입국이 쉽게 허용되어 천주교가 곧 퍼지게 되고 특히 지도층 사람들 사이에 많은 신자를 얻게 되니, 이 두 나라사이에 자리 잡고 있던 예수회 신부들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같은 뜻을 품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에 따라 예수회를 비롯한 가톨릭 성직자들은 아래에 말하는 바와 같이 1567년부터 근 1백년 동안에 6차에 걸쳐 조선(朝鮮) 전교를 꾀하고, 그 사이에 있어서 예수회의 세스페데스(Gregorio Cespedes) 신부는 조선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따라 조선에 들어온 일이 있었으나, 조선 정부의 쇄국정책으로 말미암아 모두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한 사정의 대략을 다음에 살펴보고자 한다.



(1) 세스페데스 신부의 조선 입국


  포르투칼 사람인 예수회의 세스페데스 신부는 1577년에 42인 째의 외국인 신부로서 일본에 들어와 구주(九州) 지방인 비전(肥前)의 무장이던 천주교 신자 유마 청신(有馬晴信, 아리마 하루노부)의 성하(城下)에 머물면서 전교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포르투칼 상인들로부터 얻게 된 조총의 힘으로 일본 전국을 통일하고 천주교를 보호하던 무장 직전 신장(職田信長, 오다 노부나가)을 1583년에 자살하게 함으로써 일본 통치권을 잡게 된 불교신자 풍신 수길(豊信秀吉, 토요토미 히데요시)은 1590년에 국내를 통일하고, 1592년 4월에는 ‘명나라를 정벌 한다’는 핑계를 내세우고 갑자기 15만 7천여 명의 대군을 풀어 조선으로 쳐들어 왔으나, 그의 속셈은 이 출정(出征)을 기틀로 하여 국내에서 크게 퍼져가고 있던 천주교를 없애버리자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조선 정벌의 선봉을 천주교 신자들만으로 편성된 무장 소서 행장(小西行長, 코니시 유키나가) · 흑전 장정(黑田長政, 구로다 나가마사) · 유마 청신(有馬晴信) · 대촌 희전(大村喜前, 오무라 요시마에) · 오도 순현(五島純玄, 고지마 쥰겐) · 천초 종원(天草種元, 가토오 기요마사) 등의 군대로 하여금 맡게 하였다.

 

  풍신 수길이 이러한 전술을 쓰게 된 것은 천주교가 크게 퍼지게 됨에 따라 많은 불교신자들이 천주교로 개종하는 한편, 그들의 단골 절[寺院]이 신자를 잃어 생활난에 빠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풍신 수길은 조선출정에 앞서 1585년에는 벌써 경도(京都)에 있던 천주교의 신학교(神學校, 南蠻寺)를 헐어버리게 하고, 5년 후부터는 천주교를 믿지 못하게 하다가 마침내 조선정벌의 거사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러한 종교적 갈등이 원인이 되어 조선 출정이 강요되었으므로, 천주교 신자이던 소서 행장은 될 수 있는 대로 이 싸움을 빨리 끝마치고 돌라가고자 하여 조선의 서울을 차지한 다음 임진강(臨津江)싸움 때부터 휴전을 제청하면서 평양(平壤)에까지 쳐 올라와 머무르고 그 이상 북진하지 않았으나, 불교신자이던 가등 청장은 조선왕자 임해군(臨海君) 등의 뒤를 쫓아 황경도 회령(會寧)에까지 쳐올라가 그들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북진하였던 왜군(倭軍)들도 이듬해 정월부터 조선군을 돕기 위하여 출동한 명나라 군대와 우리 의병(義兵)들에게 쫓기어 부산(釜山)지방으로 집결한 뒤, 울산(蔚山)으로부터 웅천(熊川)에 이르는 해안지대에 18성(城)을 쌓고, 이후 6년 동안 머물게 되었다. 이때 웅천성에 머물러 있던 소서행장의 군대와 기장성(機長城, 東萊 동북방)에 머물러 있던 흑전 장정의 군대는 모두 천주교 신자이었으므로 소서 행장은 그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하고 군률을 바로잡기 위하여, 일본주제 예수회 부관구장(副管區長) 고메스(Comez) 신부에게 군종신부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고메스 신부는 구주(九州) 비전(肥前)에 있던 세스페데스 신부와 일본인 전교회장(傳敎會長) 후간 에이온(F-oucan Eion, 不干에이온)을 조선으로 보내게 되었다.

 

  이리하여 세스페데스 신부 등은 소서 행장의 사위이던 천주교 신자 종 의지(宗義智, 소오 요시도시)가 차지하고 있던 대마도(對馬島)를 거쳐 1593년 12월 27일 부산에 상륙하고, 다음날에는 소서 행장이 머물러 있던 웅천성에 이르러 짐을 풀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적어도 1년에 한 번씩의 고해 성사(告解聖事)를 받아야 할 왜군 신자들에게 성사(聖事)를 주고, 미사성제를 드림으로써 성체(聖體)를 받아 모시게 하는 즐거움을 갖게 한 다음 다른 성으로 돌아다니면서 같은 일을 집행하는 한편, 입교를 지망하는 왜병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리고 그는 길가에 버려진 전쟁고아들을 구제하고 일본으로 압송되는 조선인 포로들을 돌봐 주었으나 그 밖의 조선인은 모두 자취를 감추어 접촉할 수가 없었다.

 

  이러는 사이에 불교 신자인 가등 청정은 소서 행장의 행운(幸運)을 시기하여 세스페데스 신부의 전교 활동을 풍신 수길에 대한 음모 행위라고 거짓으로 꾸며 고발함으로써 신부로 하여금 1595년 봄에 일본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나, 신부는 1597년 봄에 다시 건너왔다가 몇 달 후 돌아간 일있었다.

 

  천주교 성직자로서 처음으로 조선에 들어왔던 세스페데스 신부는 경상도 웅천 지방에 1년 동안 머물렀다가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한편 일본 통치자 풍신 수길은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에 나와 있던 1594년부터 천주교에 대한 모진 탄압책을 쓰고 있었으므로 세스페데스 신부는 한때 신자이던 대마도주 종씨가(宗氏家)에 머물렀다가 구주(九州) 소창(小倉, 고쿠라)으로 옮겨가 박해에 시달리던 끝에 1611년 60세의 나이사망하였다.

 

 

(2) 일본 주재 성직자들의 조선 전교 계획

 

  세스페데스 신부의 조선입국은 전후하여 근 1백년 동안에 성직자들이 다음과 같이 조선 전교를 꾀한 일이 있었다.


1) 비렐라 신부의 입국 계획

 

  포루투칼 사람인 예수회의 비렐라(Vilela) 신부는 1556년에 일본에 들어와 구주(九州) · 경도(京都) 등지에서 15년 동안 전교하다가 1570년에 동양전교의 근거지인 고아(Goa)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는

 

  일본을 떠나기 4년 전(1567)에 일본에서 고라이(Goray, 高麗)라고 부르는 나라에 가고자 하였으나, 전쟁으로 길이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라는 뜻의 편지를 본국 에보라(Evara) 신학교에 보낸 일이 있었다.

 


2) 요한 신부의 전교 계획

 

  스페인 사람인 도미니크회의 수사(修士) 요한(Dominico Juan) 신부는 1601년에 도미니크회의 동양 포교 본부가 있는 필리핀의 마닐라로 나와 마레이어(Malay語)를 배우다 1611년에 조선 전교의 최적임자로 뽑혔다. 이에 앞서 도미니크회에서는 일본에 진출하여 조선 전교의 가능성을 깨닫고 이러한 계획를 세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요한 신부는 동료이던 2명의 수사를 거느리고 멀리 조선에 이르러 상륙하고자 하였으나 쇄국주의를 지키던 조선 관헌의 거절로 헛되이 마닐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뜻을 굽히지 않고 구후 홀로 일본 장기(長崎, 나가사키)로 건너와 임진왜란 때에 잡혀 일본으로 끌려가서 신자가 된 조선 사람 다케야 고스마(Cosma Takeya 竹屋고스마)의 집에 숨어서 때를 기다리다가 1619년에 잡혀 대촌(大村, 오오무라) 감옥에서 목숨을 잃었다.

 


3) 권(權)원선시오의 전교 계획

 

  권(淃) 원선시오(Vincent Kowan Cafioie, 嘉兵衛)는 조선 고관의 아들로 1593년 13세 때 서울에서 왜장 소서 행장에게 잡혀 그 딸이던 대마도주 종씨(宗氏) 부인 마리아에게 보내져 교육을 받고, 경도(京都) 신학교에 들어가 1603년에 모래인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후 수련 수사(修練修士)가 되었다. 이때 풍신 수길의 뒤를 이어 일본 통치권을 잡은 덕천 가강(德川家康, 토쿠가와 이에야스)과 그 후계자들은 거듭 금교령(禁敎令)을 내리고 특히 1614년에는 수백 곳의 성당을 부숴버렸다. 그러므로 예수회 신부와 수사들은 새로눈 전교지를 찾아 그해에 권(權)원선시오로 하여금 조국(祖國)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게 하였으나, 엄한 국경감시로 실패하였다. 이에 권(權)은 중국 대륙으로 건너가 육지로 들어갈 길을 7년 동안이나 찾으며, 그중 4년 동안을 북경(北京)에 머무르면서 때를 기다려 보았으나, 때마침 만주땅에 여진족(女眞族)이 후금국(後金國, 淸나라)을 세우고(1616) 길을 막고 있었으므로 할 수 없이 1620년에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그리하여 그는 구주(九州)의 신자들이 모여 살고 있는 도원반도(島原半島)에 숨어서 5년 동안 소라 신부를 도와 일본인과 조선인들에게 전교하다가 1625년에 잡혀 이듬해에 장기(長崎)에서 소라 및 파쉐코(Pacheco) 신부 등과 함께 불살려 죽었다.

  

 

(3) 중국 주제 성직자들의 조선 전교 계획


1) 서 광계(徐光啓)의 전교 계획


  서 광계 바오로는 상해인(上海人)으로 명나라의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내다가 마테오 릿치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신법산서(新法算書)》1백 권을 지은 열렬한 신자이었다. 그는 만주(滿洲)에서 일어난 후금(後金)을 치기 위한 지원병을 조선에 청하고자 1620년에 몸소 특사가 되어. 삼비아시(Sambiasi) 신부를 모시고 도선에 들어오려 하였는데, 이것은 조선에 전교하기 위한 계책이었다. 그리하여《천주실의》 등의 교리에 관한 책들을 많이 얻어 가지고 막상 길을 떠나려 할 무렵에 명나라에서는 그와 같이 중요한 인물이 나라가 위태로운 그때에 잠시나마 자리를 비울 수 없다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2) 안토니오 신부의 전교 계획


  프란시스코회(會)의 안토니오(Antonie) 신부는 북경(北京)에서 전교하다 조선 전교의 뜻을 품고, 1650년에 국경 부근에 있는 어느 항구까지 나와 보았으나 쇄국의 굳은 문을 열지 못하고 북경으로 다시 돌아갔다. 여기서 그는 사신을 따라 오고 가는 상인들의 틈에 끼어 조선으로 들어오려고 꾀하다가 때마침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던 예수회 독일신부 아담 샬(Adam Sch-all, 湯若望)로부터 조선의 쇄국 정책이 극히 엄함을 듣고 그의 권고에 따라 산동반도(山東半島) 지방의 전교에 몸을 바쳐 큰 성과를 거두었다.


 

3) 노엘 신부의 전교 계획

 

  예수회의 노엘(Noel) 신부는 1703년에 청(淸)나라 황제의 아들의 하나인 친왕(親王)이 천주교로 개종한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 친왕(親王) 은 2년 전부터 요동(遼東)의 서울인 심양(瀋陽, 奉天)에 물러나와 그 가족과 더불어 열심히 신앙을 지켰다. 만약 이곳에 굳센 교회가 세워진다면 여기로부터 조선에도 쉽게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우리 지도에 그린 것보다 훨씬 크고, 일본과는 좁은 바다를 끼고 있을 뿐이므로 일본에 들어가는 길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  [간추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