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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톨릭의 동양 전례 본문

[♡ 자유와 평화 ♡]/한국천주교 歷史

2. 가톨릭의 동양 전례

자유인ebo 2011. 8. 30. 10:26

 

제 1 장    조선 천주교회 창설                                 

  

 

 

 

 

시대의 시련

 

 

1. 가톨릭의 동양 전례

 

(1) 가톨릭의 원(元)나라 전례

 

   세계 만민이 믿어야 활 올바른 가르침이라는 뜻을 가진 가톨릭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서양의 여러 나라에서 1 천여 년 동안에 걸쳐 국가적 종교로 믿어지는 한편, 11세기 말부터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대학이라는 교육 기간을 개설하여 오늘의 서양문화를 발생하게 하였다. 이러한 때에 즈음하여 1206년에 새 나라를 세우고 중국 대륙을 차지한 몽고인(蒙古人) 징기스칸(成吉思汗)의 손자 바투(拔都)는 물밀 듯이 서쪽으로 쳐들어가 1241년에는 유럽 여러나라의 군대를 폴랜드의 왈스타트(Wahlstadt)에서 무찌르고 다시 소아세아(小亞細亞) 지방에 있던 여러 마호메트교의 나라를 합쳐 이 넓은 지역에 깁착칸국(欽察汙國) · 이르칸국(伊兒汙國) · 차카타이칸국(察合臺汙國) · 오코타이칸국(窩濶臺汙國)등 4 대칸국(四大汙國)을 세우고, 그의 아들 사르타크(薩答克)로 하여금 가톨릭으로 개종(改宗)하게 했다.

 

   이리하여 동서 교통의 길이 다시 열리고 성지(聖地)예루살렘이 마호메트 교도들의 손에서 벗어나며, 몽고인 황족 중에서 가톨릭 신자가 생기게 되니 이를 축하하기 위하여 로마 교황 인노센트 4 세(Innocent IV)와 프랑스 국왕 루이 9세(Louis IX)는 1253년에 프란시스코 수도회 수사(修士) 루브르크(Rubruc)를 몽고에 보내게 되었다. 루브르크 수사가 이듬해에 몽고의 서울이던 캐라코우람(和林)에 이르러 축하의 뜻을 나타내는 한편, 처음으로 가톨릭의 복음을 펴게 되니, 그 뒤를 이어 여러 성직자들이 중국으로 오게 되었다. 더욱이 몽고의 황제 세조(世祖)가 1271년에 서울을 연경(燕京, 北京)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원(元)’이라 정하니,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0세(Gregorio X)는 그해에 이를 축하하기 위하여 마르코 폴로(MarcoPolo)부자(父子)를 원나라에 보냈다. 이탈리아 사람인 마르코 폴로는 1275년에 연경에 이르러, 이후 17년 동안 머물면서 세조의 극진한 대접을 받다가 귀국하여 동양에 황금의 섬나라 ‘지팡구(Zipangu, Japan)'라는 일본(日本)이 있다는《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을 저술했다.

 

   마르코폴로의 뒤들 이어 많은 성직자들이 또 원나라에 들어와 연경 · 천주(泉州, 福建) 등 여러 곳에 성당(聖堂)을 세우고 전교하게 되었다. 그들 중 가장 이름난 이는 1294년에 연경에 들어와 34년 동안 전교하여 3 만 명의 신자를 얻게 되었다는 이탈리아 사람 코르비노(Corvino) 대주교(大主敎)이었다. 그리하여 1300년을 전후한 1 백여 년 동안에는 원나라에서도 가톨릭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이때 우리  나라인 고려(高麗)는 원(元)의 부마국 (鮒馬國) 노릇을 하고 있었고, 원나라에는 3 만여 명의 고려 사람이 살고 있었으므로 우 나라 사람들도 가톨릭과 접촉이 있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1351년부터 원나라에서 한민족(漢民族)의 반항 운동이 일어나고, 1398년에는 주원장(朱元璋)이 명(明)나라를 세워 원나라를 북방으로 내쫓게 되며,중앙 아세아 지방에서 마호메트교국의 세력이 커서 동서의 교통로를 막게 되니, 1371년을 마지막으로 로마 교황 사절의 파견은 끊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모처럼 중국에 전래되었던 가톨릭은 이후 2 백여 년 동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2) 가톨릭의 일본 전례

 

   이러한 사이에 마르코 폴로의《동방견문록》을 읽게 된 서양 사람들은 ‘황금의 섬나라’를 찾으려고 배를 타고 탐험의 길에 올랐다. 그리하여 이탈리아 사람인 컬럼버스(Columbus)는  서쪽으로 향하여 계속한 끝에 1492년에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고, 포르투칼 사람인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는 아프리카대륙의 남단인 희망봉(希望峰)을 돌아 인도(印度)에 이르는 새 항로를 1498년에 개척하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독일 수사(修士)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가톨릭의 정통적 규칙을 무시하고 1517년부터 ‘성서의 가르침대로 신앙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수도원을 뛰쳐나와 이른바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북유럽을 중심으로 일어난 일종의 민족주의 운동이었다.

 

   이러한 마르틴 루터의 종교 분열 운동에 자극되어 프랑스 파리대학 교수이던 스페인 사람 이그나티오 로욜라(Ignatio Loyola)와 프란시스코 자비에르(Francisco Xavier) 등은 1534년에 ‘예수회(Jesuit Order)’ 라는 새 전교 단체를 조직하고 가톨릭의 쇄신 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므로 로마교황 바오로 3 세는 1540년에 이 예수회를 외방 전교회(外邦傳敎會)로 승인하여 아직 가톨릭이 전파되어 있지 않은 동양 지역의 진출을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자비에르 신부는 이듬해에 인도로 나와 전후 8년 동안에 걸쳐 인도 총독 소재지인 고아(Goa)를 중심으로 하여 말래카(Ma-lacca) · 세이론 등 여러 곳에서 전교하다가 때마침 통상의 길을 찾아 그 곳에 갔던 일본인 소년 피치랑(安次郞, 한지로오)의 안내로 1549년 8월 15일 일본에 들어오게 된 자비에르 신부는 이후 2년 4개월 동안 일본에 머물면서 큐우슈우(九州) · 야마구찌(山口) 지방에서 전교하여 놀랍게도 3천여 명의 신자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사이에 그는 일본인들이 중국을 크게 사모(思慕)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일본의 교화를 위하여는 중국의 그것이 선행(先行)되어야 한다고 깨닫고, 명나라로 건너가던 길에 1552년 12월 홍콩(香港) 앞 바다에 있는 상천도(上川島)에서 열병으로 객사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와 함께 들어온 도레(Dore) 신부들과 뒤를 이어 나온 많은 서양 성직자들의 전교 활동으로 날로 발전하여 1569년에는 오랫동안 내란에 빠졌던 일본을 통일한 직전 신장(織田信長, 오다 노부가다)의 허락을 얻어, 경도(京都)에 성당과 신학교(神學校, 南蠻寺)를 세우게 되고, 1580년 경에는 300여명의 성직자들이 2백여 곳의 성당과 15만여 명의 신자를 가지게 되었다. 이에 앞서 직전 신장은 포르투갈 상인들이 1543년에 가져다 준 조총(鳥銃)이라는 새 무기의 힘을 빌어 인본 천하를 통일하였고, 이러한 일들로 말미암아 일본에서는 가톨릭이 갑자기 크게 믿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1605년경에는 15년 동안 써오던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금교정책(禁敎政策)에도 불구하고 일본 전국에 걸쳐 75만 명의 신자를 갖게 되었다.

 

 

(3) 가톨릭의 명나라 전례


   일본에서 전교하다가 명나라로 건너가던 길에 객사한 예수회의 프란시스코 자비에르 신부의 남긴 뜻을 이어받아 명나라에 처음으로 들어가 전교에 성공한 성직자가 있으니, 그는 같은 예수회의 성직자인 이탈리아 신부 마테오 릿지(Matteo Ricci, 利瑪寶)이었다. 그는 1583년에 광동(廣東)에 상륙한 이래, 1595년에는 남경(南京), 1601년에는 북경(北京)에 들어가 광동에서 간행한 《만국여도(萬國輿圖)》라는 세계지도 등을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에게 바침으로써  신임을 얻어 성당(聖堂, 南堂)을 세우고, 동료 신부들과 더불어 열심히 전교한 결과 1610년 별세할 때까지 2천 5백여 명의 신자를 얻게 되었다.

 

   그는 중국 풍속을 존중하고 서양의 학술 · 종교 서적을 한문(漢文)으로 번역 출판함에 힘을 기울여 가톨릭의 교리서(敎理書)인 《천주실의(天主實義)》를 비롯하여 《교우론(交友論)》 · 《변학유독(辨學遺牘)》 · 《기하원본(幾何原本)》 · 《만국여도(萬國輿圖)》 · 《건곤체의(乾坤體義)》 등 20종의 도서를 간행하였다. 특히 《천주실의》는 그 때까지 중국인들이 믿어오던 유교 · 도교(道敎) · 불교의 그릇된 가르침을 비판하면서 가톨릭의 교리를 설명한 교리서이었으므로 쉽게 이를 받아들여 특히 고관(高官) · 지식인의 입교자가 많았다. 그러한 신자로서는 명나라의 예부상서(禮部尙書)이던 서 광계(徐光啓) 바오로와 《천주실의》의 서문을 지은 이 지조(李之藻) 네오를 비롯하여 고관 14명, 과거급제자(科擧及第者) 3백여 명이 있었다.

 

   한편 가톨릭은 명나라 황실에서도 믿게 되어 수십년 뒤에는 황태후(皇太后) 헤레나, 황후(皇后) 안나를 비롯하여 황족 1백 14명, 환관(宦官) 40명이 입교하게 되었다.

 

   릿치 신부가 지은 《천주실의》는 이후 수백년 동안에 걸쳐 거듭 출판되어 중국 전교에 크게 이바지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곧 우리나라와 일본에도 전래되어 같은 일을 일으키게 되었다. 따라서 이 책으로 말미암아 우리 극동 3국에서는 이후 가톨릭을 ‘천주교’라고 부르게 되었다.        

 

 

 - [간추린 한국 천주교회 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