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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간추린 한국 천주교회 역사 본문

[♡ 자유와 평화 ♡]/한국천주교 歷史

1. 간추린 한국 천주교회 역사

자유인ebo 2011. 8. 31. 09:57

 

간추린 한국 천주교회 역사  류 홍 렬 지음 

 

 

                                    [ 서소문 공원 순교자 현양탑 ]

 

간추린 한국 천주교회 역사

‘성요셉출판사’에서 발행한 “간추린 한국 천주교회 역사”(7판 발행 : 1996 년 6 월 10 일) 내용을 그대로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조금씩 올려봅니다. 내용 중 오탈자 발견 시 지적해 주시면 즉시 수정 하겠습니다.

- 자유인ebo - 

 

 

한국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판을 내면서

  천주교(天主敎, Catholic)는 아라비아(Arabia) 반도의 예루살렘(Jerusalem) 지방에서 서기 전 4 년에 탄생한 예수 그리스도(Jesue Cheist)가 세운 정통파의 그리스도교로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天主]을 오직하나의 신(神)으로 받들어 모시고 그의 가르침인 10계명(誡命)을 지키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함으로써 지상(地上)에 평화를 가져오게 하자는 종교이다.


하느님의 10계명은 다음의 열 가지로 되어 있다.


① 하나이신 하느님을 흠숭(欽崇)하라.

②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

③ 주일(主日)을 거룩히 지내라.

④ 부모에게 효도하라.

⑤ 사람을 죽이지 말라.

⑥ 간음(姦淫)하지 말라.

⑦ 도둑질을 하지 말라.

⑧ 거짓 증언(證言)을 하지 말라.

⑨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⑩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


  이 10계명은 지상의 모든 인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보아 그 존엄성을 인정하고 서로의 생존권을 침해하지 않는 정의를 실천함으로써 박애 . 평등 주의의 평화 세계를 이룩하라는 만고불변(萬古不變)의 가르침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민족과 국가를 초월하여 온 인류의 평화를 위한 참된 가르침이었으므로 비록 그가 바리새(Pha-risee) 사람들에게 잡혀 로마 총독 비라도(Pilate)에게 넘겨져 서기 30년 쯤에 십자가(十字架)에 못박혀 죽었을지라도 그의 가르침은 베드로(Peter) 등 12사도들의 전교 활동으로 곧 사방에 퍼져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에 앞서 그리스도는 그가 잡혀 죽게될 것을 미리 알고 바로 그 전날 오후에 12사도(使徒)와 더불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최후의 만찬'을 하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나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러한 의식을 지내도록 하여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죽은 이후 그의 사도들은 날마다 이러한 의식을 신자들과 더불어 지내게 되어 '미사'라는 제사 제도가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사도 베드로, 바오로(Paul) 등 의 전교 활동으로 로마 제국(帝國)의 서울이던 로마시에까지 전파되어, 처음에는 낮은 계급의 사람들에게 믿어지다가 차차 온국민에게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때마침 로마 제국에서는 그리스의 12신(神)을 비롯하여 황제를 신처럼 숭배하고 있었고 폭군 네로(Nero, 54~68)가 로마시에 불을 지르고 그 허물을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돌려 이들을 죽이고 있었으므로, 사도 베드로 . 바오로도 서기 66년에 잡혀 죽음으로써 이후 3백여 년 동안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참되고 올바른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끊임없이 퍼져감을 보고,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타누스(Constantinus)는 313년에 그 가르침을 믿는 자유를 허락하고, 325년에 열린 니케아(Nicaea) 종교 회의에서는 모든 사람이 믿어야 할 공인된 종교라는 뜻으로 가톨릭(Catholic)이라고 부르게 하여 380년부터 이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삼게 되었다.


  가톨릭은 ‘순교자(殉敎者)의 피를 씨로 하여’크게 발전하고 로마대제국의 영토이던 유럽 대륙에 퍼지게 되었다. 또 로마 제국의 뒤를 이어 유럽 대륙에 세워진 게르만(German) 민족의 여러 나라에서도 국교로 믿어지는 한편, 이들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던 수백년 동안의 이른바 ‘암흑시대(暗黑時代)’를 차차 깨우치게 하고, 로마시에 자리 잡고 있는 로마 교황(敎皇)으로 하여금 정신적으로 유럽 세계를 다스리게 하였다. 이에 따라 로마 교황은 유럽 각국가 근동(近東) 지방에 세워진 여러 교회를 다스리는 주교(主敎)들을 거느리고, 이들 가운데에서 교황을 민주적으로 선출하는 추기경(樞機卿)을 임명하여 교회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게 함으로써 중세기(中世紀)의 봉건제도(封建制度)를 민주 제도로 개혁하는 일을 일으키게 되었다.


  한편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던 사람들 중에는 신교의 자유를 얻게 되던 무렵부터 로마 제국의 정치적 부패와 박해를 피하여 이집트 지방 등에 숨어서 정결을 지키며 올바른 삶의 길을 닦는 수도자(修道者)가 생기게 되었는데, 이러한 수도 생활 운동은 그후 신교의 자유를 얻게 됨에 따라 유럽 대륙에서도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6 세기에 이탈리아 지방에서 생긴 베네딕트(Be-nedictus, 480~543) 수도회를 비롯하여 12 세기에는 프랑스 지방 베르나르드(Bernard, 1091~1153) 수도회, 13 세기에는 이탈리아지방 도미니크(Dominic, 1170~1221) 수도회, 프란치스코(Francisco, 1182~1226) 수도회 등이 생겼다.


  이러한 수도회에서는 ‘기도와 노동’ 이라는 슬로건 아래 청빈(淸貧)·순결(純潔)·복종(服從)의 세 가지 계율을 지키며 사랑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한편, 학문연구에 힘을 기울였으므로 노동을 신성시하는 사상과 근대적 대학교육의 싹을 움트게 하였다,


  사실상 게르만 민족의 침략으로 476년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래, 유럽에서는 3 백여 년 동안 암흑시대가 계속되었으나, 이러한 어둠의 세계를 차차 깨우쳐 광명의 세계로 발전하게 한 세력은 가톨릭의 성직자들이었다. 가톨릭의 성직자 · 수도자들은 고대 그리이스, 로마의 문화를 연구함으로써 가톨릭 사상을 체계화 하였으므로 암흑시대에 있어서 유일의 지식계급을 이루고 있었다. 이에 따라 가톨릭의 교회에서는 ‘스콜라(Schola)’라는 부설학교를 두게 되었는데, 이 부설학교가 발전하여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민족과 국가를 초월한 세계주의 대학(大學, University)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러한 대학으로서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은 1088년에 세워진 이탈리아의 볼로냐(Bologna) 대학이고, 뒤이어 프랑스의 파리(Pa-ris) 대학, 영국의 옥스퍼드(Oxford) 대학 · 캠브리지(Cambri-dge) 대학 등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대학의 설치로 말미암아 유럽 각국인들 의 지혜가 크게 개발되어 과학의 발달을 가져오게 되고, 인권을 존중하는 민주 사상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 결과 13세기 말부터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하여 문예부흥 운동이 일어났고, 민주제도와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18세기부터 유럽에서는 인간생활의 합리화 · 민주화 · 과학화를 뜻하는 근대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유럽 각국에서 크게 발전하여 근대 서양문화의 터전을 닦았던 가톨릭은 1583년부터 명(明) 나라에 전례 되면서부터 하느님의 가르침을 믿는 종교라는 뜻으로 천주교(天主敎)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명나라에서 편찬된 천주교 서적들이 해마다 몇 차례씩 왕래하던 사신들의 손을 거쳐 1603년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니, 뜻있는 선비들은 이러한 서양의 학술을 받아들여 역사 · 지리 · 정치 · 경제 등을 연구하는 실학운동(實學運動)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실학운동은 그 후 1백70여년을 지나는 사이에 천주교를 믿는 서학운동(西學運動)으로 발전하여 1784년에는 밖으로부터 성직자가 들어와 전교함이 없이 자발적으로 조선 천주교회를 세우는 기적(奇蹟)과 같은 일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우리나라 선비들의 힘만으로 세워진 조선 천주교회는 이듬해에 관리들에게 발각되어 박해를 받기 시작함으로써 이후 1887년까지에 이르는 1백 3년 동안에 네 차례의 큰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 네 차례의 박해란, 1801년에 일어나 신유교난(辛酉敎難) 을 비롯하여 1839년의 기해교난(己亥敎難), 1846년의 병오교난(丙午敎難), 1866년의 병인교난(丙寅敎難)이 바로 그것이며, 이밖에 1901년에는 제주도(濟州道)에서 사사로이 신축교난(辛丑敎難)이 일어났다.


  이러한 거듭된 박해로 말미암아 아무런 죄도 없는 천주교신자 1만여 명이 귀중한 목숨을 잃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회는 ‘순교자의 피를 씨로 하여’ 끊임없이 발전하여 이 나라를 근대화하는 일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조선 천주교회 신자들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오직 하나의 하느님만이 있음을 굳게 믿음으로서 참되고 올바른 종교를 받아들이는 한편, 우리 국민 생활을 합리화하고 민주화하며 과학화하려는 근대화 운동을 일으키었다. 우리나라의 천주교 신자들은 귀신(鬼神) · 신선(神仙) · 무당(巫堂) 등을 믿던 온갖 미신 행위를 없애는 일에 앞장을 서고, 양반(兩班) · 중인(中人) · 상민(常民) · 노비(奴婢)의 네 계급으로 되 있던 당시의 엄격한 봉견 제도를 벗어나 서로 교우(交友)라고 부름으로써 민주 사회를 이룩하려 했었다. 그뿐 아니라, 하나의 아내만을 거느림으로서 가정불화의 원인이 되었던 축첩제(蓄妾制)를 없애려는 한편, 남녀 평등 사회를 이룩하려 하였고, 교리에 관한 서적 등은 오로지 국문판으로 만들어 씀으로써 한글 전용의 애국 운동을 전개하여하였다.


  한편 조선 천주교회에서는 교회 창설 이래 서신을 북경(北京) 주교나 멀리 로마 교황에게 거듭 보내어 외국인 성직자들을 불러들임으로써 중국 이외의 나라와는 외교 관계를 맺지 않고 있던 우리나라의 어리석은 쇄국주의(鎖國主義)의 굳은 문을 개방하도록 하는 일을 재촉하고, 우리나라의 젊은 신학생들을 멀리 마카오(Macao)나 패낭(Penang) 등에 보내어 서양의 학술 사상을 배워 오게 하다가, 나중에는 신학교를 국내에 설치함으로써 근대적 교육 제도를 받아들이며, 고아원 · 양로원 · 약국을 개설하여 불쌍한 동포들을 구제함으로써 사회사업을 일으켰다. 교회의 역사 서적이나 한국어의 사전 등을 프랑스어로 출판하여 우리나라의 뛰어난 문화를 서양의 세계에 소개하고, 서양의 출판 기술과 건축 기술을 받아들여 교회 서적을 출판하고 성당을 세움으로써 국민 생활을 서양식으로 고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천주교는 우리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참되고[眞], 착하고[善], 아름답게[美] 사는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었으므로, 비록 교회 창설 이래 1 백여 년 동안 모진 박해를 거듭 내이던 조선 왕조는 멸망하였을지라도 끊임없이 발전하여 오늘날에는 1 백 50만 신자를 가지고 이 나라를 거룩하게 하는 일에 이바지 하고 있다.

 

 한편 천주교는 그 올바른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에 퍼져 38억의 세계 인구 가운데에서 7 억의 신자를 가짐으로써 여러 종류의 종교 가운데 가장 많은 신자를 차지하고 있다.


                                                                      1983년 3월                 

류 홍 렬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