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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순교자들의 현양 운동 본문

[♡ 자유와 평화 ♡]/한국천주교 歷史

24. 순교자들의 현양 운동

자유인ebo 2011. 8. 3. 11:03

9.  순교자들의 현양 운동

   

 

 

 

  

 

(1) 한국 순교복자 기념 성당 건립

  

   조선 교구 설정 이래 한국의 전교를 맡고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의 뮈델 대주교는 1839년과 1846년에 일어난 박해로 말미암아 목숨을 잃은 2백 50여 명의 교인 가운데에서 굳게 신앙을 지키면서 죽게 된 79명의 순교자들을 1925년 7월 5일에 복자위에 올리는 시복식을 갖게 한 다음, 1866년에 일어난 병인 대박해로 말미암아 목숨을 잃게 된 1만여 명의 교인 가운데에서 26명을 뽑아 이들을 또한 복자위에 올리려는 시복 운동을 일으키었다. 그리하여 이들 26명의 순교자 중 24위에 대한 시복식이 병인 박해 1백 주년을 맞게 되는 1966년쯤에는 이루어질 것이 짐작되었으므로 이 복자들을 기념하기 위한 성당을 세우자는 운동이 서울 대교구를 비롯하여 수원. 인천. 원주. 춘천. 대구. 전주. 광주. 마산. 부산 등의 10교구에서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중 규모가 가장 크게 세워진 것은 서울 대교구의 양화진 한국순교복자성당이다.

 

 

(2) 양화진 복자 기념 성당 건립

 

   서울 대교구에서는 민족의 해방과 더불어 조직된 한국순교자현양회의 도움을 얻어, 서울 지방에 있는 순교 성지(聖地)를 가능한 대로 사들이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1950년 2월 까지에는 가장 중요한 한강(漢江) 가의 새남터 성지를 차지하여 그곳에 순교 기념탑을 세웠고, 1956년까지에는 병인박해 때 숱한 교우들이 목을 잘리거나 한강물에 던져진 양화진(楊華鎭)의 절두산(切頭山) 성지를 또한 차지하여 1962년에는 그곳 산봉우리에 기념탑과 노천제대를 세웠다.

 

   그리고 한국 천주교회는 뜻깊은 병인 순교 1백 주년을 맞게 됨에 즈음하여, 서울 대교구로 하여금 1965년 9월부터 성직자 대표, 평신자 대표로써 병인 순교 1백 주년 기념사업회를 결성하고, 양화진 절두산에 기념 성당과 기념관을 세우는 일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에 따라 병인 순교 1백 주년의 해인 1966년 3월 10일에는 절두산 봉우리에 있던 기념탑, 노천제대를 헐기 시작함으로써 기공식을 올리게 되었는데, 이 공사는 숱한 교우들이 강물에 던져져 죽던 그 때의 절벽 모습을 가능한 대로 그대로 보존하면서 현대식의 3층 건물을 세워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매우 힘드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 공사는 1년 7개월 뒤인 1967년 10월 22일에야 낙성식을 가졌었다.

 

 

(3) 양화진 하천부지의 매수

 

   양화진 한국복자성당은 김포 공항으로부터 서울에 들어오는 제2한강교 바로 동쪽 옆과 강변 순환 도로 옆에 자리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특유한 건축 양식과 역사적 유래로 말미암아 서울의 관광지로 알려져 교우들을 비롯하여 국내외의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1970년 1월 20일 이래 양화진 성당 주임 신부의 일을 맡게 된 박 희봉(朴喜奉) 신부는 절두산 주변의 하천부지를 사들이는 일을 일으켜 그 동쪽에 5천여 평의 광장을 만들고 주차장을 비롯하여 돌로 화단을 만들어 교회와 관계 있는 석물(石物) 등을 각지방에서 찾아 옮겨 놓았다.

 

 

(4) 안 중근 도마의 동상 건립

 

   한국 정부에서는 유사 이래 민족과 나라를 위하여 빛나는 업적을 이룩한 애국 선열등의 동상을 세우는 일을 권장함으로써 애국 애족의 얼을 되살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민족의 해방 이후 가장 먼저 세워진 동상이 안 중근 기념사업회의 힘으로 세운 남산 언덕에 있는 안 중근 도마의 그것이었으나, 이것은 규모가 작고 서운 위치가 좋지 못하였으므로, 새로이 보다 큰 동상을 만들어 남산 언덕위에 있는 국립도서관(구 어린이회관) 앞 광장에 기념관과 더불어 세우고 그 제막식을 1967년 4월 26일에 가졌었다.

 

 

(5) 다산 정 약용 동상 건립

 

   우리 나라 살학(實學)의 태두(泰斗)인 다산 정 약용(丁若鏞) 요안 선생의 빛나는 업적을 들어내기 위하여 1958년 10월에 정 다산 선생 기념사업회를 결성하고 그 첫번째 사업으로 경기도 양주군 능내리(陵內里) 마재〔馬峴〕에 있는 그 무덤 앞에 묘비와 신도비(神道碑)를 세우는 일을 다산(茶山)을 연구하고 있던 미국 대사관 문정관 핸더슨(G. Henderson)의 제의로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업가들로부터 보내진 성금으로 마재언덕 위에 있는 다산 무덤을 수축하여 묘비와 신도비를 만들어 세우고, 1959년 12월 12일에 1백여 명의 관계 인사가 모인 가운데 그 제막식을 갖게 되었다.

 

   이어 민주공화당 의장 김 종필(金鍾必)의 제의에 따라 1966년 8월에는 언론인. 국회의원. 사업가. 교육자. 학자 등 20여명으로써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愛國先烈彫像建立委員會)를 결성 하고 그 사무국을 서울 신문사에 두어 민족 사상에 길이 빛나는 업적을 세운 정치인. 군인. 종교인. 학자들의 동상을 세우는 일을 일으켰었다. 그리하여 1968년부터 1972년까지에 이르는 4년 동안에 이 순신(李舜臣). 세종대왕(世宗大王)등 15명의 애국 선열 동상을 세우게 되었는데, 이들 가운데에는 천주교 신자인 정 약용(丁若鏞)과 김 대건(金大建)이 들어 있게 되었다.

 

   정약용의 동상은 1970년 4월부터 만들기 시작하여 남산 중턱에 있는 시립도서관 앞 녹지대에 세우고, 그해 10월 20일에 박 정희 대통령 내외분을 비롯한 귀빈 1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제막식을 갖게 되었는데, 좌대석 높이가 4m, 동상 높이가 4.5m의 이 동상은 12번째 세운 것으로서 좌대 뒤쪽에 붙인 동판에는 필자가 지은 글이 새겨져 있다.

 

 

(6) 김 대건 신부 동상 건립

 

   서울신문사에 사무국을 둔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는 그 4차 년도의 사업의 하나로 정의와 진리를 위하여 거룩한 피를 흘린 한국 최초의 성직자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동상을 세우기로 1971년 4월에 결정하였다. 이에 앞서 서울 대교구에서는 이러한 반가운 일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그해 3월에 6명의 성직자와 7명의 가톨릭 의과대학 교수들로 하여금 김 대건 신부의 유골로써 얼굴 모습과 몸 크기를 복원하게 되었는데, 그 얼굴 모습은 가름한 수재형이고 몸 크기는 1m76cm쯤임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14번째로 세워질 김 대건 신부의 동상은 한국순교복자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양화진 성당의 넓은 광장에 세워져 그 제막식과 기념 야외 미사를 1972년 5월 14일에 김 종필 국무총리를 비롯한 내외 귀빈과 1만여 명의 교우. 성직자들이 모인 가운데 갖게 되었는데, 이 5월 14일은 바로 김 대건 신부가 1백 26년 전인 1846년에 중국에 머물러 있던 프랑스 신부에게 보낼 편지를 가지고 이곳 마포강(馬捕江)을 떠나 백령도 앞바다로 가던 그날이었다. 좌대 높이가 5.8m, 동상 높이 4.5m의 거대한 한복 차림의 김 대건 신부 동상은 서쪽을 향하여 양화진 성당을 바라보며, 왼손에는 성경을 들고 오른손을 높이 들어 설교하는 모습으로 되어 있는데, 좌대 뒤쪽에 붙인 동판에는 필자가 지은 글이 새겨져 있다.

 

 

(7) 이 승훈 베드로의 묘비 건립

 

   서울 대교구에 소속된 국내외의 성직자 2백 70여 명은 병인 순교 1백 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양화진 성당을 세우는 일에 협조하는 한편, 한국인 선비로서 북경에 들어가 처음으로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자발적으로 조선 천주교회를 세운 선각자 이 승훈(李承薰) 베드로의 무덤이 경기도 인천시 만수산(萬壽山) 중턱에 있음을 알고, 이곳에 묘비를 세우는 일을 또한 일으켰다.

 

   그리하여 성직자들이 바친 성금으로 그 무덤을 수축하고 묘비를 만들어 그 묘비 제막식을 1968년 10월 24일에 여러 성직자. 평신자. 유족 등 1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갖게 되었는데, 그 묘비의 전면에는 '韓國 天主敎 先覺者 平昌 李公 베드로 承薰之墓'라는 글을 새기고, 그 뒷면에는 필자가 지은 글이 새겨져 있다.

 

 

(8) 한국 복자 수녀회의 활동

 

   온갖 악형에도 굽히지 않고 굳게 신앙을 지키다가 목숨조차 바치게 된 한국 순교자 복자들의 거룩한 정신을 본받아, 이 나라의 성화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1946년 창설된 한국복자수녀회는 창설 이래 순교자들의 유물. 서적 등을 각방면으로 수집 보존함과 아울러 천안(天安)에 복자 여자 중. 고등 학교를 세워, 사랑과 정의의 복음을 펴는 일에 힘을 기울였는데, 특히 병인순교 1백 주년, 김 대건 신부 순교 1백 20주년, 동 수녀회 창설 20주년을 맞게 된 1966년부터는 거룩한 순교 정신을 드러내기 위한 뜻깊은 행사들을 벌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1966년 10월에는 서울 청파동에 있는 동 수녀원 본원에서 '조선 시대의 형구(刑具) 전시회'를 가짐으로써 수천명의 관람자들로 하여금 순교자들이 얼마나 악독한 고문과 형틀에 시달리면서도 끝내 진리의 신앙을 굳게 지키게 되었던가를 눈으로 보고 스스로의 신앙을 굳게 하는 마음을 갖게 하였다. 그리고 동 수녀회에서는 김 대건 신부의 일대기(一代記)를 26폭의 그림으로 그려 김신부 순교 1백 25주년, 복자 수녀회 창설 25주년을 경축 기념하기 위하여 1971년 7월에 '김 대건 신부 한뉘 성화 전시회'를 열어 김 대건 신부의 거룩한 업적을 되새기게 하였다.

 

 

(9)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과 한국천주교회 창립 선조들의 묘 발견 이장

 

   1802년 황 사영은 이 벽 성조께서 이 승훈을 천주교에 입교시키시고 북경 천주교회로 파견하시며 지도하신 역사를 그의 백성에게 전하여 주었고 1820년경 다산 정 약용은 권 철신과 정 약전의 묘지명에서 천진암 강학회의 시기, 장소, 참가자 및 이 벽 성조의 탐방과 토론 등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비록 단편적이나마 이 승훈의 만천유고에서도 강학회 때 지은 몇가지 작품과 저자와, 시기, 장소 등이 전하여졌다. 그 후 1845년에 한국에 들어온 다블뤼 안 신부가 수집하여 보내준 역사 자료와 편지를 가지고 샤를르 달래 신부는 1874년 프랑스 파리에서 펴낸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학국 천주교회의 기묘하고 독특한 기원사를 말하면서, 천진암 강학회를 내용 중심으로 크게 소개하였다. 그 후 1960년에 와서, 박학한 주 재용 신부가 이곳 지명들을 문헌상으로 정확히 찾아내었고, 1962년에는 이미 여러 곳을 답사하며,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를 찾고 있던 남 상철 선생이 주 재용 신부를 만나 그 알림을 받고 정 원진 신부와 함께 앵자봉 동편 아래 있는 주어말에 와 묵으면서, 마을 노인들의 증언과 명확한 흔적을 토대로 하여 주어사 터를 중심으로 처음 답사한 후, 훼방하는 이의 반대를 무릅쓰고, 류 홍렬 박사의 뒷받침으로 경향잡지에 발표하였으며, 계속하여 십 오년 이상을 한국 천주교회 발상지 확보와 성역화를 외치며 애태우다가 오늘을 보지 못한채 세상을 떠났느나, 오히려 천상에서 더욱 힘있게 이 일을 도우리라 믿는다. 그 후, 1975년 말 부터 변 기영 신부가 천진암 터를 중심으로 성지 확보에 뜻을 두고 호소하여, 1978년 9월 중순에야 처음으로 천진암 터와 그 부근 삼천여평을 매입 확보하였으며, 현재(1983년 5월 5일 현재) 십만여평이 마련되었으니, 이는 파 레이몬드 신부와 이 완순, 조 병각 선생, 이 원호 교수 등의 희생적인 봉헌으로 가능하게 되었고, 1979년 4월 4일에는 김 정태 박 보옥 부부가 느티나무, 향목, 목백합 등 이천오백주를 기증하여 이백주년 기념식수를 하였으며, 더우기 1979년 3월 중순부터는 서울 갈멜여자수도원의 참여와 후원으로 천진암 갈멜여자수도원 창설이 결정되었다.

 

   한편, 이 벽 성조의 묘와 그 후손들을 찾고 있던 변 기영 신부가 백방으로 꾸준히 노력한 끝에, 1979년 2월 15일 마침내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화현삼리 산 289번지 공동묘지 갓등산 낮은 봉에서 묘를 발견하니, 돌보는 이 없이 오래 묵은 고총으로 있었고, 영원히 상실될 위급한 처지에서 천상 섭리의 기적적인 도우심으로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같은 곳에서 이 벽 성조의 부친 이 부만 공의 묘와 동생 이 석의 묘도 함께 찾았다. 또한 계속 수소문하여 강원도 횡성군 횡성면 가담리에 가서, 이 벽 성조의 칠대 직계 후손 이 상국, 이 상철, 이 상만, 팔대 직계 종손 이 완형, 이 기형씨 등를 찾아 만나서, 조상이 이 벽 성조이며 그 묘가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이장이 불가피 하고 시급한 처지였으므로, 이장 준비 위원회를 만들어 1979년 유월 스무 하루 목요일에 주교들과 많은 신부, 수녀, 평신도들이 모인 가운데, 묘를 발굴하니, 통덕랑 경주 이 벽지묘라는 지석이 한가운데서, 또 좌우편에서는 공인 안동 권씨지묘와 공인 해주 정씨지묘라는 두 부인들의 지석이 나오고 유해가 완연하게 나왔다. 당일로 이 벽성조의 유해는 혜화동 성당에 안치하고 같은 한 묘에서 함께 발굴된 첫번째 부인 안동 권씨 유해와 상처하신 후 재취하신 두번째 부인 해주 정씨의 유해는 신장 성당에 안치하였다. 다음날 혜화동 성당에서 이 벽 성조의 유해를 새 관에 입관할 때, 머리 상투와 치아 스물 세개와 우측 두골 조각을 취하여 냈으며, 이는 묘지석과 관 조각들과 함께 앞으로 건립될 기념관에 모시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십 삼일 토요일 오후에 이 벽 성조의 유해는 명동 대성당으로 옮겨 모셨다가, 다음 날 주일이며 이 벽 성조의 영세 본명 축일을 맞아, 정오에 그 곳 명동 대성당에서 한국인 최초의 주교 노 기남 대주교와, 역시 한국인 최초의추기경 김 수환 추기경의 공동집전으로 이장 미사를 성대히 거행하고, 즉시 출발하여 신장 성당에 들려서, 삼일 전에 먼저 와서 기다리던 두 부인의 유해와 함께 노 기남 대주교 집전으로 합동 사도예절을 거행하고, 그 길로 천진암 터에 이르러, 보름전부터 구축된 새 묘지에서 이장 위원회 위원장이며, 한국 순교자시성시복 추진위원회 위원장인 김 남수 주교의 주례로 하관예절을 마치니, 1979년 유월 스무 나흘 오후 세시 삼십분이었다. 이장지는 이장위원에에서 천진암 터로 선정하였고, 새 묘지의 위치와 좌향 결정 및 이 기념비 제작 지도는 국립 예술원 회원 이 순석 교수가 하였고 새 묘지 설계와 구축은 이 원호 교수가 하였으며, 포천 옛 묘지에서 혜화동 성당, 명동 대성당, 신장 성당을 경유하여 천진암 터에 이르는 이 벽 성조의 유해 운구는 이 경재 신부가 새로운 자동차로 전담하였으며, 발굴과 이장에 관한 기획 수립 조정 및 실무 총지휘와 이 비문 초안작성은 이장위원회 총무 변 기영 신부가 책임지고 맡아 하였으며, 국립 학술원 회원 류 홍렬 박사가 비문 작성에 자문하였다. 또 묘 둘래석 앞면 한글과 이 기념비의 한문 글씨는 일중 김 충현 선생이 썼고, 한글 잔 글씨는 이 성숙 여사가 썼다. 이제 한국 천주교 창설 이백주년을 살고 지나가면서 우리 시대가 몸소 겪었고 밝히 알게 된 역사적인 여러 일들을 먼 훗날의 한국 천주교회와 우리 배달 겨례의 문화 발전을 위하여 간결하게나마 글로 적어서 한 조각 돌에 새겨 천진암 성지에 세워 놓았으니, 그것이 한국 천주교회 이백주년 기념비다.

 

   그 후, 1981년 11월 5일에는 수원 사사리에 있던 정 약종의 묘가, 또 같은 해 같은 달 21일과 23일에는 양평 효자봉에 있던 권 일신과 권 철신의 묘가, 또 역시, 같은 해 같은 달 29일에는 인천 만수동에 있던 이 승훈 선생의 묘가 천진암 터로 200년만에 이장되었다. 이렇게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들이 교회를 창설하던 옛 터에 다시 한자리에 묘여, 오늘의 우리에게 감격스런 교훈을 주고 있다. 

 

 

-  [간추린 한국천주교회 역사] -

 

  이상으로 "간추린 한국천주교회 역사"[류 홍렬 저] 에서 옮김을 마무리 하면서 우리의 신앙 선조들께서 지혜와 피로서 이어 온 신앙을 지금 우리는 너무나 자유로운 환경 탓에 잠시나마 잊고 있지나 않는지 생각하게 된다. 이 시대를 살면서 그 옛날 피의 순교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나를 위한 신앙생활인 만큼 최소한의 희생과 봉사라도 외면하지 않는 삶이기를 기대해 본다.

* 자유인eb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