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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6.25 이후의 교회 발전 본문

[♡ 자유와 평화 ♡]/한국천주교 歷史

23. 6.25 이후의 교회 발전

자유인ebo 2011. 8. 4. 11:02

8.   6.25 이후의 교회 발전

  

 

 

 

 

 

(1) 1백만 신자를 갖게 된 한국 천주교회

 

   6.25전란은 우리 역사상 가장 비참한 동족 상쟁의 싸움이며 국제적인 전쟁이었다. 이 전란으로 말미암아 한국 천주교회는 특히 막대한 인적(人的). 물적(物的) 손실을 보았으나, 한편 이를 계기로 하여 우리 교회는 놀라운 발전을 보이게 되어 오늘에는 남한에만도 14교구에 1백만 명이 넘는 교우를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6교구 15만 7천 명의 교우를 헤아리던 6.25 1년 전의 남한의 교세가 20년을 지난 오늘날에는 근 7배의 증가를 보이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의 까닭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미증유의 동족 상쟁의 비극을 격게 됨에 따라 참되고 올바른 종교를 갈망하여, 역사적으로 우리 나라를 근대화함에 이바지한 세계 최대 종교인 천주교를 찾게 되었다는 점과 천주교의 교리가 참된 것이었다는 점과 천주교의 제도와 의식이 민중의 마음에 들었다는 점과 비교적으로 천주교를 믿는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의 언행이 좋았다는 점과 《경향신문》이라는 일간 신문을 통하여 계몽 운동을 벌였다는 점과 많은 병원. 고아원. 학교 등을 경영하고, 있으며, 미국 가톨릭 구제회에서 구호 물자를 보내주었다는 점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휴전 협정이 조인(調印)된 1953년에 남한의 천주교회는 6교구에 걸쳐 16만 6천 명의 교우를 갖고 있었으나, 특히 교우의 수는 다음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후 해마다 수만명씩 늘어 오늘에는 1백여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연도별

교  구  수

교 우 수

1945년

9교구(서울. 대구. 전주. 광주. 춘천. 평양. 함흥. 덕원. 연길)

183,600인

1953년

6교구(서울. 대구. 전주. 광주. 춘천. 대전)

166,400인

1957년

7교구(부산교구 신설)

285,000인

1958년

8교구(청주교구 신설)

354,800인

1960년

8교구

451,000인

1961년

9교구(인천교구 신설)

492,000인

1962년

9교구

530,200인

1963년

10교구(원주교구 신설)

575,700인

1964년

10교구

628,500인

1965년

11교구(마산교구 신설)

669,300인

1966년

12교구

706,800인

1967년

12교구

731,600인

1968년

12교구

750,900인

1969년

13교구(안동교구 신설)

779,000인

1970년

13교구

788,000인

1971년

14교구(제주지목구 신설)

790,300인

1972년

14교구

803,600인

1973년

14교구

953,700인

1974년

14교구

1,012,200인

1975년

14교구

1,039,100인

1976년

14교구

1,039,800인

1977년

14교구

1,144,200인

1978년

14교구

1,189,800인

1979년

14교구

1,246,200인

1980년

14교구

1,321,200인

1981년

14교구

1,439,700인

1982년

14교구

1,578,000인

CCK 자료

   이밖에 현재 남한에는 북한 지역의 옛 전교지(傳敎地)가 수복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평양. 함흥. 덕원. 연길의 4교구 성직자가 서울과 왜관(倭館)에 머물러 있으면서 사회사업. 출판사업등을 벌리고 있으니, 우리 나라의 교구 총수는 18이 되는 셈이다. 이 18교구 중 서울. 대구. 광주의 그것은 로마 교황 요안23세가 1962년 3월 25일에 서울의 노 기남(盧基南)주교, 대구의 서 정길(徐正吉) 주교, 광주의 헨리 현(玄) 주교를 각각 대주교로 승격시킴에 따라 대교구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황 요안 23세는 1962년 10월 11일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公議會)를 1백 년만에 열고, 온 세계의 추기경 및 주교들과 더불어 교회의 쇄신에 관한 헌장(憲章). 교령(敎令). 선언(宣言)을 제정 공포하기 시작했는데, 이 첫해의 공의회에는 한국의 대주교 3명을 비롯하여 대전. 부산. 전주 주교도 참석하였다. 이 바티칸 공의회는 요안 23세의 뒤를 1963년 6월에 이은 교황 바오로 6세에게 계승되어 1965년 12월 8일에 이르기까지 꼭 3년 동안에 걸쳐 열리고 1963년 12월 4일에 공포된 《전례헌장(典禮憲章)》과《매스 메디아에 관한 교령》을 비롯하여 1985년 12월 7일에 공포된 《현대 세계 속에서의 교회사목헌장(敎會司牧憲章)》에 이르기까지 모두 16종의 결의문을 채택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황 바오로 6세는 1967년 3월과 6월에 각각 '제민족(諸民族)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回勅)'과 '사제(司祭) 독신 생활에 관한 회칙(回勅)'을 반포함으로써 부유한 선진국들이 기아. 빈곤. 질병. 무지에 허덕이고 있는 후진국을 도와줄 것과 천주교의 사제(司祭)가 교회와 신도들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독신제를 엄수하여 줄 것을 밝혔다.

 

   이러한 바티칸 공의회 이후 공포된 18종의 헌장. 교령. 선언. 회칙들이 세계 각국에서 어떻게 받아 들여지고 또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토의하게 하기 위하여, 교황 바오로 6세는 1967년 10월 11일부터 18일까지의 사이에 로마에서 제3차 세계 평신도 대회를 열게 했다. 전세계의 1백 3개국으로부터 3천 86명의 대표가 모인 이 평신도 대회에는 우리 나라의 대표로서 필자를 단장으로 하여 19명이 참석했다.  '인간 여로(人間旅路)에 있어서의 천주의 백성'이라는 주제(主題)로 진행된 이 평신도 대회에서는 '인종 차별주의의 철폐' '사회 발전의 균등화' '평신도 기구 결성의 촉구' 등 8종의 결의문을 채택하여 이의 실천을 다짐하였다. 그 결과 우리 나라에서도 1968년 7월 23일에 대전에서 각 교구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한국 가톨릭 평신도 사도직 중앙협의회'가 결성되어 필자가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고, 이어 각 교구에서도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가 결성되었다.

 

 

(2) 김 수환(金壽煥) 대주교의 추기경 선임

 

   교황 바오로 6세는 한국 천주고의 오랜 청원을 받아들여 1968년 10월 6일에는 1백여년 전에 대원군의 박해로 말미암아 목숨을 잃게 된 근 1만 명의 순교자 가운데에서 24위를 뽑아 복자위에 올리는 시복식(諡福式)을 베드로 대성전에서 1백 30명의 동포 교우들이 모인 가운데 거행하게 했는데, 교황은 그 강복식(降福式)에서 특히 '서구인(西歐人)들은 한국인에게서 훌륭한 정신을 배워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그러기에 당시 박 정희 대통령도 이 24위의 시복을 경축하는 뜻에서 '진리불변 충절상청(眞理不變 忠節常靑)'이라는 휘호를 가톨릭시보사(時報社)에 내려준 일이 있었다. 그리고 바오로 6세는 그의 자문기관의 성원인 추기경의 수를 1백 35명으로 늘임에 즈음하여, 1969년 4월 28일에는 서울 대교구의 대주교인 김 수환 스테파노를 그자리에 올려 앉혔으니, 이는 한국 교회의 영광이었다. 이리하여 김 추기경은 이후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국제적 인물로 되어, 로마에서 열리는 추기경 회의를 비롯해 아시아 지역의 주교 회의 등에 참석함으로써 국위를 선양하는 한편, 국내의 전국 주교 회의의 의장이 되어 이 나라를 성화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3) 저명 인사들의 입교

 

   이렇듯이 그토록 모진 박해를 받던 한국 천주교회는 계속 발전하여 마지막의 영광된 승리를 거두게 되었는데, 그러한 사실은 최근 20년 동안에 있어서 대원군의 친손인 의친완(義親王) 강(坑)과 영친왕(英親王) 은(垠)이 또한 천주교로 개종한 후 서거한 일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불교 신자이던 의친왕은 1955년 8월 9일에 비오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고, 그달 1일에 서거 하였으며, 영친왕은 1961년 6월 30일에 일본 동경에서 요셉이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1970년 5월 1일에 서거했다. 한편 최근 10여년 동안에는 저명한 대학 교수들과 구 정치인이 많이 입교하여 교회와 우리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특히 4.19 이후 장 면(張勉)의 민주당 내의 각료였던 현 석호(玄錫虎). 김 영선(金永善). 한 통숙(韓通淑) 등은 1962년 12월 16일에 세례를 받았고,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하나인 이 갑성(李甲成)을 비롯하여 이 효상(李孝祥). 박 순천(朴順川). 김 대중(金大中). 등과 정 태현(鄭泰鉉). 김 상기(金庠基). 이 홍직(李弘植) 등이 입교하였다. 끝으로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가 전국에서 전개하고 있는 교육. 의료. 자선. 구제 기관의 종별 수를 든다면 다음과 같다.

 

   유치원 147, 국민학교 11, 직업학교 9, 중학교 40, 고등학교 34, 대학 6, 대학교 1, 병원 31, 고아원 21, 양로원 11, 나환자 수용소 20.

 

 

-  [간추린 한국천주교회 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