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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제주도의 신축 교난과 그 뒷처리 본문

[♡ 자유와 평화 ♡]/한국천주교 歷史

19. 제주도의 신축 교난과 그 뒷처리

자유인ebo 2011. 8. 11. 10:55

4. 제주도의 신축 교난과 그 뒷처리

 

 

 

 

 

 

 

(1) 제주도(濟州島)에의 전교

 

   조선 교구의 민 주교는 전교의 자유권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그 휘하의 신부들로 하여금 대한 정부로부터 '호조(護照)'라는 여행 허가증을 얻어 가지고, 전교의 자유가 공인된 개항지는 물론 그렇지 못한 다른 지방에도 진출하게 하여 전교에 힘쓰게 하였다. 그 결과 1900년에는 전국에 프랑스 성직자 40명, 한인(韓人) 신부 12명이 산재하여 26명의 신학생과 41곳의 성당과 4만 2천여 명의 신자를 다스리게 되고, 복음의 씨는 멀리 제주도에까지 뿌려지게 되었다.

 

   제주도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마치 우리 나라에 그것이 전래된 경로와도 같이, 먼저 그곳 사람이 육지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가 전교함으로써 시작되었는데, 그 개척자는 제주도 남쪽에 위치한 대정군(大靜郡)에 살던 양(梁) 베드로였다. 그는 전라도 목포에 머물러 있던 1898년 4월에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 굳게 신앙을 지키는 한편, 같은 고을 사람인 신(申) 아오스딩. 신(申) 바오로 형제와 김(金) 생원(生員). 강(姜) 도비아를 입교시키고, 차츰 이웃 고을인 정의군(旌義郡). 제주군(濟州郡)에도 전교의 손을 펴게 되었다.

 

   그 결과 1899년부터는 많은 도민들이 입교하게 되었으므로, 민 주교는 그해 12월에 페이네(Peynet, 裵嘉祿) 신부와 김 원영(金元永) 신부를 제주읍(濟州邑)에 보내어 성당을 마련하게 했다. 그런데 페이네 신부는 그곳의 풍토가 맞지 아니하여 이듬해에 다른 지방으로 옮겨가고, 그를 대신하여 그해 6월에 라크루스구(Lacrouts, 貝瑪瑟) 신부가 건너가고, 1901년 신축(辛丑) 5월에는 뭇세 문(Moussett, 文濟萬) 신부가 건너가게 되었다.

 

   이리하여 구(具) 신부는 제주읍에 성당을 마련하고, 문(文) 신부와 김 신부는 정의군 서홍리(西烘里, 서귀포 부근)에 성당을 마련하여 각각 전교에 힘쓰게 되었는데, 김 신부는 얼마 후 목포(木浦)로 옮겨가고, 신부 1명이 또 건너가 대정군에 자리잡기로 되어 있었다. 이들 프랑스 신부들은 우리 나라 황제로부터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었으므로 그 권세를 이용하려고 입교하는 간사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 결과 1901년 봄까지에는 2백 42명의 도민이 세례를 받고, 그밖에 7백여 명이 교리를 배우고 있었다. 이때 제주도의 인구는 4만여 명이었으니, 그 40분의 1이 교회로 나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제주 교난(濟州敎難)의 발생

 

   이와 같이 제주도에서는 복음의 전파가 시작된 이후 겨우 2년 동안에 거의 1천명의 도민이 교회에 나오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일찌기 벼슬을 살다가 죄로 몰려 그곳으로 귀양보내진 서울 출신의 전 홍문관 교리(前弘文館校理) 이 용호(李容鎬), 전 감찰(前監察) 장 윤선(張允善). 최 형순(崔亨淳) 요안 등이 있었고, 그곳의 목사(牧使)이던 이 상규(李庠珪)에게 많은 돈을 빼앗긴 도민들도 있었다. 때마침 우리 나라의 정치는 극도로 부패하여 중앙이나 지방의 관리들이 백성들로 부터 돈을 거둬 제 배를 채우는 일이 많았는데, 제주 목사이던 이 상규도 1만 냥(兩)의 돈을 가로챈 죄로 1901년 1월에 파직되고, 3월에 제주 군수(濟州郡守)로 부임한 김 창수(金昌洙)가 한때 목사직을 맏아 보고 있었다. 한편 천주교가 먼저 전파된 대정군과 정의군의 군수로는 제주도 출신의 채 구석(蔡龜錫)과 김 희주(金熙胄)가 각각 봉직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우리 왕실에서는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하여 1900년부터 제주도를 비롯한 여러 섬에 봉세관(捧稅官)을 보내어 새로이 각종의 세금을 걷게 하였는데, 제주도에서는 평안북도 출신의 강 봉헌(姜鳳憲)이 이 일을 맡아 봄으로써 도민의 원성을 사게 되었다. 원래 제주도민들은 오랫동안 외딴섬에서 바다를 끼고 살아왔기 때문에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새로운 제도나 문화를 물리치는 힘이 굳세고, 욱하는 성격이 많아서 한데 뭉쳐 민란을 일르킨 적이 많았다. 더우기 도민들은 무당이나 사신(蛇神)을 몹시 믿어서 가는 곳마다 신목(神木). 신당(神堂)이 있었으므로 그곳의 속담에도 당(堂) 5백, 절〔寺〕5백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천주교로 개종한 도민들은 때마침 시행된 토지 등기법(土地登記法)에 따라 새로이 차지하게 된 토지 안에 있는 신당(神堂). 신목(神木)들을 불살라버림으로써 또한 다른 도민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이러한 원성과 반감이 얼키고 설키어 1901년 5월(음력 3월) 부터 6월에 거쳐 일종의 사사로운 박해라 할 수 있는 신축 대교난(辛丑大敎難)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책동지는 복음이 처음으로 뿌려진 대정군이었고, 그 선동자는 도민출신의 군수이던 채 구석(蔡龜錫)이었다. 채 구석은 이에 앞서 그곳의 유림(儒林) 대표이던 오 대현(吳大鉉)들과 손을 잡고, 상무사(商務社)라는 상인(商人) 단체를 만들어 천주교인들의 가입을 불허하고 그곳에 왕래하던 일본 멸치 상인(商人) 황천 유십랑(荒川留十郞, 아라가와)으로부터 총. 칼 등의 무기를 많이 얻어가지고 그 부하이던 이 재수(李在守)를 시켜 도민을 충동하여 새로이 이 섬에서 지세(地稅). 어장세(漁場稅). 염분세(鹽盆稅). 삼림세(森林稅). 공토세(公土稅) 등을 걷고 있던, 봉세관 강 봉헌과 도민들로부터 1만 냥의 돈을 사사로이 거둔 제주 목사 이 상규(李庠珪)에 대한 분풀이를 천주교인에게 돌리게 함으로써 대박해를 일게 하였다. 왜냐하면 이 지방 사정에 낯선 봉세관은 제주읍 성당의 복사(服事)이던 최(崔) 요안의 교우 친구들을 사음(舍音, 말음) 잡색(雜色)으로 써서 잡세(雜稅)를 걷는 일을 벌이고, 새로이 입교한 도민들 중에는 프랑스 신부들의 권세를 믿고 지나친 행동을 하는 무리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상무사를 중심으로 한 도민들과 봉세관을 중심으로한 벼슬아치들과의 사이가 차차 좋지 못하여지고 있던 무렵인 1901년 2월 8일(음력 12월 20일)에는 앞서 도민들의 돈 1만 냥을 가로챈 죄로 파면된 제주 목사 이 상규가 그대로 눌러 있으리라는 풍설이 떠돌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도민들의 감정이 날카로와지게 되었는데, 다음날인 9일에는 뜻밖에도 정의군(旌義郡)에 있던 천주교 성당에서 오 신락(吳信洛)이라는 늙은 도민을 잡아다가 때려 죽였다는 풍설이 떠돌게 되었다. 사실상 오 신락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은 일이 있었는데, 정의 군수(旌義郡守)의 친척이던 유림인 현 유신(玄有信) 부자는 군수의 권세를 등지고 오 신락의 사인(死因)을 천주교에 뒤집어 씌우려고 그러한 풍설을 퍼뜨리게 했다.

 

   그러므로 정의 군민들이 통문(通文)을 도내 3군(郡)에 돌려, 그해 음력 정월 보름에 도민들로 하여금 제주읍 관덕정(觀德亭)앞으로 모이게 하여, 전 제주목사 이 상규와 정의(旌義) 성당의 일들을 판가름하려고 꾀하게 되니 이 소문을 듣고 성당에서도 통문을 교우들에게 돌려 대비책을 세우게 했다. 이러한 도민들의 움직임을 알고, 전 제주목사이던 이 상규가 그해 3월 4일(음력 1월 14일)에 배를 타고 그 곳을 떠나게 되니, 도민들의 움직임은 한때 가라앉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제주읍에 있던 라크루스 구(具瑪瑟) 신부가 서울에서 열리는 연차(年次) 성직자 회의에 참석하게 위하여 그해 4월 중순(음력 3월 초)에 그곳을 떠나게 되니, 이때를 틈타서 5월 6일(음력 3월 18일)에 대정 군민(大靜郡民) 수백명이 상무사(商務社)의 이름으로 모였다가 교우 7인을 구타한 일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사건의 실마리는 이에 앞서 교회에 나오고 있던 대정군의 아전인 강 우백(姜遇伯)이 그곳에 살던 유림의 좌수(座首) 오 대현(吳大鉉)의 기생첩을 데려간 데서 일게 되었는데, 대정 군수 채 구석은 이 두 도민을 잡아다가 각각 볼기를 때린 뒤, 강 우백만을 옥에 가두게 했다.

 

   이러한 불공평한 대정 군수의 처사를 듣고, 교우이던 김 진사(金進士)가 5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대정 군수에게로 달려가 교우들의 가입을 불허하는 상무사 방침을 묻고, 옥문을 열어 강 우백을 놓아주는 한편 상무사 사람 수명을 잡아가려다가 위에서 말 한 바와 같이 도리어 수백명의 상무사 사람들에게 맞아 그중 2명은 거의 죽을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하여 대정읍 충돌 사건의 이야기가 곧 전 도내에 퍼지고 5월 9일에는 상무사 사람들이 제주읍으로 몰려갈 것이라는 말이 떠돌게 되었는데, 다음날(음력 3월 22일)에는 구 신부가 이곳으로 오게 된 뭇 세문(文濟萬) 신부와 함께 기선을 타고 제주읍으로 돌아오게 되고, 이 배를 타고 봉세관 강 봉헌이 육지로 도망했다는 말이 떠돌게 되었다. 이에 흥분한 도민들은 봉세관에 대한 분풀이를 천주교 신자들에게 돌려, 대정군의 유림 오 대현 등이 돌린 통문에 따라 5월 16일(음력 3월 28일)에는 제주읍으로 몰려들어 신축 교난(1901)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에 앞서 제주읍으로 돌아온 구 신부등은 만일을 염려하여 각처의 교우 수백 명을 제주읍 성내로 들어오게 하는 한편, 서울에 있는 민 주교를 거쳐 프랑스 공사 콜랑(Collin, 葛林德)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러는 사이에 대정 군민들이 유생(儒生) 오 대현 등의 선동에 따라 5월 11일(음력 3월 23일)에는 제주읍으로 모인다는 말이 떠돌고, 다음날에는 정의. 제주 군민들도 같은 곳으로 모인다는 말이 들리게 되니, 교회에서도 교인들을 모아 이에 대비하는 한편, 제주 목사 겸 제주 군수이던 김 창수(金昌洙)와 구 신부는 대정군 한림(翰林)까지 가서 군중을 타일러 해산시키고, 그 두목 6명을 잡아 가두었다.

 

   이에 대정 군민 수천명이 일본 총 3백 자루로 무장하고, 이 재수(李在守) 등의 지휘 아래 5월 15일에는 제주읍으로 몰려오게 되니 수백명의 교인들도 군기고(軍器庫)의 총포를 가지고 모여드는 도민들과 성벽을 끼고 싸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16일에는 근 1만명의 민병대들이 제주 읍성을 포위하고 성 안팎에서 닥치는 대로 교인들을 죽이고, 5월 28일(음력 4월 11일)에는 마침내 읍성을 함락시켜 수백명의 교인을 죽임으로써 박해의 절정(絶頂)을 이루었다.

 

 

(3) 제주 교난의 진압과 뒷처리

 

   제주 교난은 일본 상인들이 도민들에게 많은 무기를 대줌으로써 크게 확대하게 되니, 프랑스 신부들이 관련되었으므로 복잡한 국제 문제로 발전하여 진압되고 처리하게 되었다. 제주읍 성당의 주임 신부이던 구 신부는 박해가 확대될 것을 짐작하고, 5월 20일에 교인 고 후여(高後汝) 등을 육지로 보내어 민 주교로 하여금 중국 상해에 머물러 있던 프랑스 아시아 함대에 전보를 쳐서 도움을 빌게 했다. 이에 따라 프랑스 함대장 포티에(Potti-er)가 2척의 군대함에 2백 70명의 군대를 싣고, 5월 31일에야 제주읍 산저포(山底浦)에 닻을 내리게 되었으나, 이미 교난은 고비를 넘고 7백여 명의 교인이 학살된 뒤의 일이었다.

 

   그러나 포티에 함장은 곧 다음날 그 해병(海兵) 50명을 상륙시켜 성문을 지키게 함으로써 차차 난민의 기세를 꺾게 되었는데 난민 측에서도 27명이 이미 죽고 있었다. 이와 같이 프랑스 함대가 출동하게 된 것을 그 공사(公使)의 통보로 알게 된 우리 정부는 5월 31일 비로소 강화 진위대병(江華鎭衛隊兵) 1백 명과 궁내부(宮內府) 미국인 고문관 샌드스(Sands, 山島)와 안핵사(安覈使) 박 용원을 제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기선 한성호(漢城號)를 타고 인천을 떠나, 6월 2일에는 제주 산저포에 닻을 내리게 되었는데 그 뒤를 따라 6월 3일에 일본 군함 제원호(濟遠號)도 그곳에 닻을 내렸다. 이어 우리 정부는 6월 10일에 다시 강화 진위대병 1백명과 수원(水原)진위대병 1백 명, 순검(巡檢) 13명을 제주읍 산저포에 도착하게 했는데, 이에 앞서 그곳에 있던 프랑스 군함 1척은 6월 3일에 인천으로 돌아와 교난이 차차 가라앉고 있음을 알려 왔다.

 

   이에 우리 정부에서는 교난의 책임을 지워 그때의 제주 3군의 군수를 6월 5일에 면직시킴과 아울러 홍희(洪禧)를 제주 군수로, 허 철(許澈)을 대정 군수로, 유 긍환(兪兢煥)을 정의 군수로 삼으니, 이들은 6월 9일에야 찰리사(察理使) 황 기연(黃耆淵)과 함께 산저포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에 앞서 교난이 일어날 징조가 엿보이던 5월 10일에 제주 목사로 임명된 이 재호(李在頀)는 제주읍 성이 함락될 때까지 부임하지 못하고 있다가 5월 31일에야 프랑스 군함을 타고 그곳에 다다르게 되었다. 한편 인천으로 돌아갔던 프랑스 함대장은 6월 9일에 다시 산저포로 돌아와 새 목사(牧使)에게 난민의 두목들을 잡을 것을 굳이 요구하였다.

 

   왜냐하면 그때까지에도 제주읍 성밖의 동서 두 곳에는 근 1만 명의 난민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제주 목사와 찰리사는 6월 10일에 3백 명의 관군(官軍)으로써 난민을 위협하는 한편, 그들의 소원을 듣고 교난에 관련된 봉세관 강 봉헌과 입교한 유배죄인(流配罪人) 이 용호. 이 범주. 장 윤선과 전 대정군수 채 구석을 잡아 가두고, 13일에는 난민들을 해산 시킴과 아울러 그 두목인 오 대현. 강 우백. 이 재수를 또한 잡아 가두었다.

 

   이리하여 제주 교난이 6월 13일로서 일단 가라앉게 되니, 미국인 고문관과 프랑스 함대는 그날로 제주를 떠나게 되고, 우리 관군도 1백 명만을 남겨두고 6월 30일에 2백명이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 곳에서 잡힌 교난 관련자인 강 봉헌. 채 구석. 이 재수. 오 대현. 강 우백 등도 10여 명의 순검에게 호송되어 7월 18일에는 서울로 끌려와 법부 감옥(法部監獄)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프랑스 공사 콜랑은 7월 30일에 교난 관련자 59명의 성명, 상무사 직책, 교난 관계 등을 적은 명단을 대한 정부 외무 대신 박 제순(朴濟純)에게 보내어 조속히 그들을 처벌하여 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구 신부. 문 신부들이 입은 가재 손해액 및 인명 손상액 5천 1백 60원(元)도 보상하여 줄 것을 요구 하였다.

 

   이 요청에 따라 우리 평리원(平理院)에서는 미국인 고문관 샌드스와 법관 양성소 교사이던 프랑스의 그리마시(Grimazy, 金雅始)와 제주 성당의 구 신부. 문 신부와 서울 약현(藥峴) 성당의 도세(Douet, 丁加彌) 신부로써 재판관을 구성하여 8월 1일부터 우리 판사(判事). 검사(檢事)와 더불어 교난의 주모자들을 심사하게 되었다. 그 결과 10월 9일에는 교난의 주모자 이던 오 대현. 강 우백. 이 재수를 교수형에 처하게 하고, 김 남혁(金南赫). 조 사성(趙士成). 고 영수(高永守). 이 원방(李元方)을 징역형에 처했으나, 교난을 선동한 전 대정 군수 채 구석만은 배상금 등의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2년 반 동안 감옥에 가둬두게 했다.

 

   그러는 사이에 대한 정부는 프랑스 공사로부터 전후 20여 차례에 걸쳐 손해 배상금의 청산과 순교자 유골의 매장지 배정의 독촉을 받게 되니, 제주 도민들의 자원(自願)에 따라 배상금을 전 도민으로부터 거둬 청산하고, 민유지(民有地)이던 사라봉(沙羅峰) 아래의 황사평(黃沙坪)을 순교자 유골의 매장지로 제공한다는 보장하에 1903년 11월 16일에 이르러 채 구석을 놓아주게 했다. 이에 따라 채 구석은 곧 제주로 돌아가서 순교자들의 유골을 황사평에 묻게 하고, 4만여의 도민들로부터 돈을 거둬 배상금 5천 1백 60원과 그 이자 7백 22원을 1904년 6월 말에 청산하게 함으로써 교난의 뒷처리를 끝맺게 하였다.

 

 

-  [간추린 한국천주교회 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