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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의 쉼터

21. 일제 치하의 교회 수난 본문

[♡ 자유와 평화 ♡]/한국천주교 歷史

21. 일제 치하의 교회 수난

자유인ebo 2011. 8. 9. 10:59

 

6. 일제 치하의 교회 수난 

 

 

 

 

(1) 일제 압정하의 교세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나라를 잃게 된 우리 민족 사이에서는 애국 운동과 아울러 종교열이 끓어 오르게 되었다. 그 결과 천주교의 교세도 날로 발전하여 1911년에는 대번에 3천여 명의 입교자가 있게 되니, 전국의 교우가 거의 8만명을 헤아리게 되고 또한 입교 예비자도 날로 늘어가고 있었다.

 

   이에 따라 로마 교황 비오 10세는 1911년 4월 8일자로 조선 교구를 서울 교구와 대구 교구로 나누고 뮈델 민 주교로 하여금 서울 교구를 다스리게 하는 한편, 대구 교구는 1906년에 창간한 가톨릭 주간지인 경향신문사(京鄕新聞社)의 사장이던 드망주 안(Demange, 安世華) 신부를 그 해 6월 11일에 주교로 승격시켜 다스리게 했다.

 

   이리하여 조선 천주교회는 날로 큰 발전을 보이어, 10년 후인 1920년에는 2백 42곳의 성당과 거의 9만 명의 교우를 갖게 되니, 이해 8월 25일에는 다시 서울 교구로부터 원산(元山) 교구를 떼어내어, 앞서 우리 나라에 들어온 독일의 성베네딕트 수도회(St, Benedict, 聖芬道會)의 사우에르(Sauer, 辛) 주교로 하여금 함경도와 간도 지방의 교회를 다스리게 하였다. 이에 앞서 성베네딕트 수도회는 뮈델 주교의 요청에 따라 1909년에 독일 쌍. 오델 지방으로부터 우리 나라에 들어와 서울 혜화동(惠化洞)에 수도원을 세우는 한편 직업 교육에도 손을 대게 되었다. 그러므로 서울 교구로부터 분리된 원산 교구의 사우에르 주교는 덕원(德源)에 가장 이상적인 성베네딕트 수도원을 비롯하여 신학교 부설 병원 등을 세워 지역 사회 개발에 이바지하고, 1922년 7월에는 원산 교구로부터 만주의 연길 교구(延吉敎區)를 떼어 놓고, 스위스 사람인 브레헤르(Breher, 白) 주교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한편 서울 교구의 뮈델 민(閔) 주교는 1927년 3월 17일에 평양 감목대리구(監牧代理區)를 분리시켜, 1923년부터 입국한 미국 메리놀(Maryknpll) 외방전교회의 번(Byrne, 方) 신부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서울 교구의 민 주교는 기해 교난(己亥敎難, 1839)과 병오 교난(丙午敎難, 1846) 때 신앙을 굳게 지키다가 목숨을 천주께 바친 모범된 순교자 79명을 복자위에 올리는 운동을 일으킨 결과 1925년 7월 5일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그들의 시복식(諡福式)이 올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공로로 민 주교는 이듬해 1월 11일에 로마 교황으로부터 대주교(大主敎)의 칭호를 받게 되었으며, 1931년 4월 처음으로 전국 주교 회의를 서울에서 열고, 조선 천주교회의 지도서(指導書)를 개정(改訂)하며, 가톨릭 중앙 출판부와 가톨릭 운동부를 두어 복음 전파에 힘을 기울였다. 그런데, 바로 이해(1931)에 대구 교구의 관할 지역이던 전라도 전주(全州) 지방에 최초의 조선인 감목대리구가 설치 되었다. 그리고 그해 9월26일의 조선 복자(福者) 축일에는 일본 주재 교황 사절(敎皇使節) 문히 주교를 맞이하여 서울에서 교구 설정 1백 주년(周年) 기념 경축 대회를 열고, 만주 요동(遙東)땅에 묻혀 있던 초대 주교인 브뤼기에르 소(蘇) 주교의 유해(遺骸)를 서울 용산(龍山) 성직자 묘지로 이장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해 그달 18일에 일본은 만주사변(滿州事變)을 일으켜 대륙을 침략하고, 다시 6년후 1937년 7월에는 중일전쟁(中日戰爭)을 일으켜, 만주와 중국에 괴뢰 정부를  세웠다.

 

   이와 같이 일제의 대륙 침략정책이 한때나마 결실을 보이게 될 무렵인 1933년 1월 23일에 서울 교구의 민 대주교가 전후 43년간에 걸친 빛나는 사목 생활(司牧生活)을 끝마치고, 80세로 서울에서 선종(善終)하게 되니, 부주교이던 라리보(Larriheau, 元亨根) 신부가 그 후임을 맡게 되었다. 이때의 조선 천주교회는 서울 . 대구 . 원산 . 연길의 4 주교구와 평양 . 해주(海州) . 전주의 3 감목대리구에 걸쳐 1백83명의 신부와 2백 63명의 수녀와 2백 84명의 신학생과 12만 7천 6백여 명의 교우를 가지고 있었고, 이들의 수효는 날로 늘어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로마 교황청에서는 1937년에 대구 교구로부터 광주(光州) 감목대리구를 분리시켜 1933년부터 조선에 진출한 애란(愛蘭)의 성 골롬바노(St, Columban) 외방전교회의 맥포린 임(Mcpolin, 林) 신부로 하여금 초대 교구장이 되게하고 1939년에는 평양교구를 주교구(主敎區)로 승격시켜, 미국 메리놀 전교회의 오쉐아(O, shea, 吳) 주교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1940년에는 서울 교구로부터 춘천(春川) 감목대리구를 분리시켜, 성 골롬바노 전교회의 퀸란 구(Quinlan, 具) 신부로 하여금 초대 교구장이 되게 하고, 원산 교구를 함흥(咸興) 교구와 덕원(德源) 수도원 교구로 나누어 독일 성 베네딕트 전교회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다.

 

   그리하혀 1941년 말까지에는 프랑스인 주교가 다스리는 서울. 대구 교구와 독일인 주교가 다스리는 덕원 . 함흥 . 연길 교구와 미국인 주교가 다스리는 평양 교구와 애란인 교구장이 다스리는 광주 . 춘천 교구와 한국인 교구장이 다스리는 전주 교구가 있게 되었다. 이들 9교구는 5명의 주교와 4명의 교구장과 1백 69명의 외국인 신부, 1백 39명의 한인 신부와 68명의 외국인 수녀, 3백 15명의 한인 수녀와 2백 79명의 신학생과 18만 명에 가까운 교우를 가지고 있었다.

 

 

(2) 일제의 탄압

 

   중일(中日) 전쟁을 일으킨 이후 전쟁을 확대해 가던 일본은 한국인에 대하여 갖은 탄압을 내리기 시작하여, 1938년부터는 한국말을 쓰지 못하게 하고, 1940년부터는 한국인의 성명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며, 일본인 신사(神社). 신궁(神宮)에 참배할 것을 강요하였다. 특히 평양에서는 성당을 일본군 병사(兵舍)로 징발하고, 그곳에 있던 성직자들을 시외로 추방했는데, 이러한 일제의 한국인 및 천주교회에 대한 탄압은 특히 1941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을 일으킴과 더불어 본격화하여 곧 평양 교구의 미국인 성직자 35명과 광주. 춘천 교구의 애란인 성직자 32명을 잡아 가두었다가 이듬해에는 미국인 성직자들을 본국으로 추방하고, 프랑스인 성직자들의 행동도 감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서울 교구의 라리보 원(元) 주교가 1942년 1월에 그 직책을 노 기남(盧基南) 바오로 신부에게 맡기고 은퇴하게 되니, 노 신부는 교황청의 지시에 따라 2월에는 평양. 춘천 교구장도 겸임하게 되었다. 이에 일제가 서울 교구장 노 신부를 또한 감시하는 한편, 그로 하여금 프랑스인. 애란인 성직자들을 감독하게 하고 서울 용산에 있던 대신학교(大神學敎)를 폐쇠하게 되니, 대신학생들은 할 수 없이 덕원에 있는 독일인 경영의 신학교로 옮기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일제는 그 해 9월에는 대구 교구의 프랑스인 못세 문(Mousset, 文濟萬) 주교를 대신하여 일본인 하야사카(早坂久兵衛) 이레내오 신부를 그 자리에 앉히고, 1942년 2월에는 광주 교구장도 일본인 와키다(脇田) 신부로써 머리를 삼게 하였다.

 

   이러는 사이에 서울 교구장 노 기남 신부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주교 임명장을 받고, 1942년 12월 20일에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주교로 승격되는 성성식(成聖式)을 명동 대성당에서 갖게 되었다. 이에 노 주교가 곧 교황청과 교섭하여 1943년 3월에는 한국인 홍 용호(洪龍浩) 신부를 평양 교구장으로 삼으니, 홍 신부는 이듬해 6월 29일에 평양에서 성성식을 가졌다.

 

   그러나 1944년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교회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신부. 신학생들을 군인. 노무자로 잡아가며, 평양. 대전. 연안(延安). 양양(襄陽). 신계(新溪) 등의 성당을 병사(兵舍)로 쓰고, 1945년 5월 29일에는 연합군과 연락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목포(木浦)에 연금되어 있던 애란인 신부 11명을 강원도 홍천(洪川)으로 옮겨 서울 교구의 노 주교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였다.

 

 

(3) 일본의 항복

 

   이렇듯 천주교회에 대하여 갖은 압박을 가하던 일본 제국도 미국의 원자탄에는 어쩔 수 없어 1945년 8월 15일에 무조건 항복을 연합군에게 하게 되니, 우리 민족은 36년만에 일제의 압정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이때의 조선 천주교회는 서울. 대구. 평양. 함흥. 덕원. 연길. 전주. 광주. 춘천의 9개 교구에 7명의 주교와 2명의 교구장을 비롯하여, 신부로는 프랑스인 38명, 독일인 54명, 애란인 10명, 한국인 1백 32명이 있었고, 수사로는 독일인 43명, 한국인 13명, 수녀로는 프랑스인 13명, 독일인 37명, 한국인 3백 32명이 있었으며, 교우 수는 18만 3천 6백 66명을 헤아리고 있었다. 신부가 머무르고 있는 지방은 163곳이고 이 지방에는 신부수보다 더 많은 수의 성당과 1천 곳을 넘는 공소가 있었다. 사회사업 기관으로는 신학교 1, 수사원(修士院) 2, 수녀원(修女院) 6, 유치원 19, 소학교 50, 중학교 2, 보육원 3, 양로원 5, 병원 9, 인쇄소 3곳이 있었다.

 

 

-  [간추린 한국천주교회 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