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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해방 이후의 교회 발전과 6.25의 수난 본문

[♡ 자유와 평화 ♡]/한국천주교 歷史

22. 해방 이후의 교회 발전과 6.25의 수난

자유인ebo 2011. 8. 6. 11:00

7. 해방 이후의 교회 발전과 6.25의 수난

  

  

 

 <L.A. 대성당 Cathedral of Our Lady of the Angels에 걸려있는 성화. 

세계성인들 중 한국 순교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가 보입니다..> 

 

 

 

(1) 해방 이후의 교회 발전

  

   8.15의 민족 해방과 더불어 한국 천주교회는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발전을 보이게 되었다. 이것은 국내적으로는 민족의 해방에 따라 언론과 신앙의 자유가 베풀어짐으로써 참된 종교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크게 일어나고, 국외적으로는 민주적인 여러 나라들과의 국제적인 관계가 새롭게 맺어짐에 따라 천주교회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보다 새로와진 데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서울 교구장이며 남한에 있어서 오직 하나의 한국인 주교이던 노 기남 주교는 1945년 8월 17일자로 전국의 모든 성직자와 교우들에게 고유(告諭)를 발표하여,

 

   혼란된 오늘날의 정세하에서 각기 자중할 것과 앞으로 세워질 우리 정부를 위하여 매일 특별한 기도를 드릴것.

 

을 지시 하였다. 이러는 사이 서울 교구에서는 해방을 맞이한 그해 9월 9일 미군이 서울에 진주(進駐)하자 바로 그날 오후 5시에 미군 사령관 하지(Hodge) 중장과 미군종 신부단 총재(美軍宗神父團總裁)인 뉴욕 교구의 대주교 스펠만(Spellman) 추기경과 많은 미군을 맞이하여 명동 대성당에서 민족의 해방과 천주교의 발전과 연합군의 승리를 천주께 감사하는 미사를 드리고 미군 진주를 환영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광주 교구장이던 일본인 와키다(脇田) 주교가 사임하고, 노 기남 주교도 춘천 교구장의 겸직을 사임하게 되니, 그해 9월 28일에는 애란인 맥포린 신부와 퀸란 주교가 각각 다시 광주 교구장과 춘천 교구장의 직을 맡게 되었다. 미군이 서울에 들어옴과 아울러 오래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서울 명동 대성당의 종소리도 아침 저녁으로 우렁차게 울리기 시작하여 1백 20만 서울 시민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게 되었다. 일제의 압정 때에 간첩의 혐의를 받고 연금 되거나 또는 감옥에 갇혔던 외국인 신부들도 비로소 자유의 몸으로 풀려 나오게 되었는데, 9월 9일에는 공주(公州) 감옥에 갇혔던 화란인 서(徐) 신부와 카나다의 성 방지거회의 신부 3명이 서울의 주교관으로 돌아오고, 9월 15일에는 강원도 홍천(洪川)에 연금되었던 애란의 성 콜롬바노회의 신부 10여 명이 서울로 돌아왔다가 뒤이어 전교지구인 전라도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9월 15일부터는 일제 때에 군대 또는 노무자로 뽑혀 나갔던 신부 2명과 신학생 수십명이 무사히 돌아오게 되었다. 한편 일본 군대에게 빼앗겼던 평양 주교좌 성당을 비롯하여 수원 성당, 영등포 성당, 명동 대강당, 대구 신학교, 경주 성당, 부산 성당, 덕원 신학교, 원산 수녀원, 목포 주교댁 등 수많은 교회 건물도 다시 찾게 되었다.

 

   이리하여 우리 민족은 해방의 즐거움을 겪게 되었으나 뜻밖에도 우리 조국이 38선으로 나누어지는 슬픔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평양. 함흥. 덕원. 연길(延吉)의 4교구가 극도로 천주교를 미워하는 공산치하(共産治下)에 놓이게 되고, 남한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은 일제 때의 근택인쇄소(近澤印刷所, 소공동 경향신문사 자리)를 갑자기 차지하여 정판사(精版社)라 이름하고, 이곳을 바탕으로 하여 인민보(人民報)라는 좌익계 신문과 위조지폐를 발행하여 민심을 소란케 하였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를 애써 물리치고 있던 천주교회에서는 적극적으로 이를 없앨 생각에서 1946년 8월 하순에 정판사를 접수하고, 이곳에 대건인쇄소(大建印刷所)를 두는 한편, 그해 10월부터 경향신문(京鄕新聞)을 발행함으로써 좌익 계열과 싸우기 시작했다.

 

 

(2) 한국 교회의 활약

 

   이와 같이 8.15 해방 이후 우리 교회가 민족적 기구로 정비되어 발전의 징후를 보이게 되니, 로마 교황청에서는 우리 민족의 독립을 가장 먼저 인정하는 뜻에서 1947년 8월에 미국 메리놀회 번(Byrne, 方) 신부를 초대 교황 사절(敎皇使節)로 임명하여 10월 9일에 부임하게 했다. 이에 따라 남한의 천주교회는 건실한 발전을 보이게 되고, 북한으로부터 자유를 찾아 남하하는 교우들도 많아지게 되어 6.25의 남침을 맞기 1년 전인 1949년 6월 말까지에는 남한에 6교구(서울. 대구. 광주. 전주. 춘천. 대전)에 걸쳐 15만 7천여의 교우를 갖게 되었다.

 

   한편 서울 교구에서는 윤 형중(尹亨重) 신부의 주관하에 1946년 8월부터 일제 말기에 정간되었던 《경향잡지(京鄕雜誌)》를 속간하고, 김 대건(金大建) 신부의 순교 1백 주년 기념일인 그해 9월 16일에는 한국 순교자 현양회(韓國殉敎者顯揚會)를 결성하여 교회사의 편찬, 순교지의 확보 등의 사업을 일으켰다. 그 결과 1949년 2월에는 필자가 지은 《조선천주교회사(朝鮮天主敎會史)》 상권이 간행되었다.

 

   이러는 사이에 남한에 군정(軍政)을 펴고 있던 미군은 소련군과 더불어 미. 소 공동 위원회를 거듭 열고, 우리 나라의 통일정부 수립 문제를 다루어 보았으나, 소련의 고집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므로 미국은 1948년 5월에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시행하여, 그해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을 세우게 하니, 이 나라는 교우이던 장 면(張勉)등을 파리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 보내어 교섭하게 한 끝에 마침내 그해 12월 12일에는 유엔으로 하여금 대한민국을 우리 나라에 있어서 유일한 합법적 정부로 승인하게 했다. 이에 따라 이듬해 1월 1일에는 미국이 대한민국을 정식으로 승인하고, 이어 많은 민주 우방이 이에 따르게 되니, 장 면은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주재 초대 대사가 되고, 미군은 그해에 거의 한국으로부터 떠나게 되었다.

 

 

(3) 6.25의 수난

 

   이러한 남한에서의 새로운 움직임을 알고, 북한 괴뢰 집단은 1949년 5월에 덕원 교구의 사우에르 주교 이하 59명의 신부. 수사(修士). 수녀와 평양교구의 홍 용호(洪龍浩) 주교 이하 5명의 신부를 잡아가두는 한편, 수도원. 신학교. 성당. 병원 등을 몰수하여 그들의 기관으로 쓰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연길 교구의 유 셀바시오 신부는 해방을 맞던 그해에 총살되고, 이듬해 5월에는 브레헤르 백(白) 주교 이하 39명의 신부. 수사. 수녀들이 잡혀 갇히게 되었다. 그리고 1949년 12월에는 평양 교구의 박 용옥(朴龍玉) 신부 이하 7명의 한국인 신부를 잡아가두니, 3천여 명의 교우가 살고 있던 평양 시내에는 전혀 신부가 없게 되고, 다만 진남포(鎭南浦). 안주(安州). 의주. 마산(馬山). 비현(碑峴). 청진(淸津). 양양(襄陽). 평강(平康)에만 각각 한인 신부 1명씩이 남아 있게 되었다. 북한에서의 천주교 박해는 1950년에 접어들면서부터 더욱 심하여져서 그해 5월에는 평양 서포리(平壤西浦里)에 있던 성모회 수녀원이 몰수되어 장 면(張勉)의 누의동생 이던 장(張) 수녀 등이 굶어죽고, 6월 24일에는 북한에 남아있던 조 인국(趙仁國) 신부 이하 11명의 한인 신부조차 모두 잡혀 목숨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6월 25일 새벽 4시에는 북괴군이 갑자기 38선 이남의 대한민국을 침입하여 가는 곳마다 신부를 죽이거나 잡아 가두었다. 그리하여 6.25를 전후하여 남. 북한에서 괴뢰군에게 잡힌 성직자. 수녀. 신학생이 1백 50명을 헤아렸는데, 이밖에 이미 목숨을 잃은 성직자도 거의 20명이나 되었다.

 

   북괴군에게 잡힌 외국 성직자. 수녀들은 죽음의 행진을 계속하는 사이에, 더러는 목숨을 잃고 남은 이들은 만포진(滿浦鎭)에 수용되었다가 본국을 거쳐 3년 후 다시 한국의 옛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공산군에게 가장 먼저 잡혔던 연길 교구의 브레헤를 백(白) 주교는 5년동안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석방되어 홍콩을 거쳐 조국 스위스로 돌아가 1950년 11월에 별세하고, 덕원 교구의 사우에르 신(辛) 주교는 평양 감옥에서 그해 2월에 옥사하고, 로마 교황 사정 방(方) 주교 이하 7명의 외국 성직지는 만포진에서 11월에 옥사했다. 그러나 춘천 교구의 퀸란 구(具) 주교는 시베리아를 거쳐 본국 애란으로 돌아갔다가, 한국 전란의 휴전이 성립됨에 따라 1953년 10월에 다시 한국으로 나와 교황 사절 서리(敎皇使節署理) 겸 춘천 교구장의 일을 맡게 되었다. 6.25 전란으로 말미암은 우리 교회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많은 성직자. 수도자(修道者)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성당. 학교 등이 파괴되고 많은 유능한 평신도(平信徒)들도 잃게 되었다. 

 

 

-  [간추린 한국천주교회 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