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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일본의 침략과 안중근(安重根)의 애국 운동 본문

[♡ 자유와 평화 ♡]/한국천주교 歷史

20. 일본의 침략과 안중근(安重根)의 애국 운동

자유인ebo 2011. 8. 10. 10:58

5. 일본의 침략과 안중근(安重根)의 애국 운동

 

 

 

 

 

 

 

(1) 일본의 침략과 민족 운동

 

   청일전쟁(淸日戰爭)의 뒤를 이어 일본은 1904년에 다시 러일 전쟁(露日戰爭)을 일으키고 이 전쟁에서 또한 승리를 거두게 되자, 대한 제국을 눌러 1905년 11월에 이른바 을사 조약(乙巳條約)을 맺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서울에는 일본의 통감부(統監府)가 설치 되고 을사 조약을 맡아보던 이등 박문(伊藤博文, 이토오 히로부미)이 초대 통감이 되어, 대한 제국의 외교. 경찰. 통상 무역을 감독함으로써 이 나라를 허수아비 나라로 만들었다.

 

   이러한 일본의 침략 정책에 반항하여 서울과 지방 각지에서 의병(義兵) 활동이 크게 번져, 일본 세력을 물리치고자 하였으나, 경찰권을 잡고 있던 일본 세력에게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므로 고종 황제는 1907년 6월 화란(和蘭)의 서울 헤이그(Ha-gue)에서 열리고 있던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 상설(李相卨). 이 준(李儁, 1858~1907) 등에게 밀사(密使)를 보내어, 국제적으로 억울한 사정을 호소함으로써 일본 세력을 몰아내고자 하였으나, 이것도 일본 대표의 훼방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일본의 강요로 황제 자리를 아들 순종(純宗)에게 물려주고 말았다.

 

   한편 경향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 세력과 싸우던 대한국민들도 일본의 압제에 못이겨 만주(滿洲)나 러시아의 연해주(沿海州) 지방으로 싸움터를 옮겨 민족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1907년 쯤에는 만주의 간도(間島) 지방에 7만여 명, 러시아 연해주 지방에 20여만 명의 동포가 살게 되고, 이러한 동포들 사이에서는 차차 천주교를 믿는 운동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2) 안 중근 도마의 애국 운동

 

   안 중근(安重根, 1879~1910)은 고려 말기에 원나라로부터 처음으로 주자학(朱子學)을 전래한 안 향(安珦, 裕)의 26대 후손이며, 성균관 진사 안 태훈(安泰勳)의 맏아들로서 1879년 9월 2일에 황해도 해주읍 서문 밖에서 백천(白川)조씨(趙氏)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다. 그는 2살 때에 부모를 따라 황해도 신천군(信川郡)으로 옮겨 살면서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는데, 재주가 뛰어나 신동(神童)이라 불리었고, 14세 때에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그 고을의 전교를 맡고 있던 프랑스 성직자 윌헬릅(Nicolas Joseph Marie Wilhelm, 洪錫九) 신부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도마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 윌헬름 홍(洪) 신부는 일찌기 안 중근의 부친이 서울에서 또한 세례를 받고 그 고을로 모셔온 성직자 였으므로, 안(安) 도마는 홍 신부의 귀염을 받으면서 그로부터 프랑스말과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한편, 그의 사냥총을 빌어 총쏘는 법을 익힘으로써 사냥을 좋아하고 총을 잘 쏘게 되었다. 홍 신부는 1860년 1월 24일에 프랑스에서 출생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 1883년 2월에 신품을 받고, 곧 그해 3월에 파리로 떠나 페낭섬에 있던 신학교의 교감으로 부임하였었다. 그런데 페낭 신학교에는 1881년 부터 1884년까지의 사이에는 우리 나라로부터 21명의 신학생이 유학하고 있었고 그들은 1882년까지 그곳에는 공부하다가 그곳의 기후가 건강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귀국하여 국내에 세운 신학교에서 신품을 받게 되었으니, 홍 신부는 바로 그들의 교감으로 5년 동안 고락을 같이 하다가, 1888년에 조선 교구로 배속되어 황해도 지방의 전교를 맡고 있는 중이었다.

 

   이러는 사이에 1894년 봄에 전라도 지방에서 동학란(東學亂)이 일어나 관가를 습격하고 재물을 약탈하며, 그 여파가 황해도에도 미치게 되니, 안 중근은 그 부친이 모은 수백명의 의병대(義兵隊)에 끼어 관군과 더불어 폭도를 진압함으로써 용명을 떨쳤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16세이었다. 그 후 안 도마는 한학(漢學)을 익힘에 힘쓰는 한편 우리 나라 역사와 세계 역사를 공부하고, 20세를 넘어서부터는 일본 배척 사상을 고취한 일간 신문을 얻어 읽음으로써 애국 사상을 키워나갔다.

 

   이러한 때에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 정부를 눌러 1905년에 을사조약을 맺게 하고,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통감으로 보내게 되니, 안 도마는 부친의 허락을 얻어 중국의 청도(靑島). 상해(上海)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구국의 길을 찾아 보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친의 별세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뜻을 교육 사업에 두고, 홍 석구 신부가 성당을 마련한 진남포로가 돈의학교(敦義學敎)를 세우고, 인재 양성에 힘쓰며 강연회를 통하여 애국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일본 통감 이등 박문은 1907년에 헤이그 밀사 사건을 탈잡고 고종 황제의 자리를 빼앗아 그 아들 손종에게 넘겨주게 하니, 안 도마는 격분하여 곧 서울로 올라와 동지들에게 구국의 길을 역설하고 강원도로 가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북간도(北間島)를 거쳐 러시아 영토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 海蔘威)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서울에서 금은방을 하던 우 덕순(禹德淳)이라는 사람이 이미 1년 전부터 의병을 모아 독립운동을 일으키고 있었으므로, 안 도마는 그를 의병대장으로 받들고 스스로 참모 중장(參謨中將)이 되어 동지를 모으고 무기를 사들였다.

 

   그리하여 안 도마는 1908년 7월에는 3백여 명의 독립군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경흥(慶興)으로 들어와 일본군과 교전하여 50며 명을 사살하고, 회령(會寧)에 있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한때 그곳을 점령하였으나, 일본군 5천 명의 반격을 받아 실폐하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왔다. 이어 이듬해(1909년) 3월에, 그는 러시아 영토이던 가리(可里)로 가서 다른 동지 11명과 더불어 왼손의 넷째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 독립'이라는 4글자를 써 가지고 각각 이를 가슴에 품음으로써 굳은 맹세를 다짐하였다. 그런데 그해 10월 하순에 우리 나라 침략의 원흉이던 이등 박문이 러시아의 재무 대신〔藏相〕 코코프체프(Kok-ovtsev)와 하르빈(哈爾濱)에서 만나게 된다는 소식을 하르빈 발행의 《요동보(寮東報)》라는 신문이 보도하게 되었다. 때마침 불라디보스톡에서 우리말의 《대동공보(大同公報)》라는 신문을 발행하고 있던 의병대장 우 덕순은 먼저 《요동보》의 기사를 읽고, 곧 안 도마에게 전보를 쳐서 그를 그곳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안 도마가 곧 우 덕순에게로 달려가 즐거워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이 먼저 이토오를 없애버려야겠다'고 하니, 우 덕순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각각 권총을 옷속에 품고 하르빈으로 가서 정세를 살피니, 그곳의 경비는 많은 러시아 군인들이 맡아보고 있었다. 이에 이들은 그곳에서 세탁업을 하고 있던 강원도 원주 사람 조 도선(曺道先)을 데리고, 10월 24일에 하르빈 남쪽에 있는 채가구역(蔡家溝驛)으로 가서 그곳 역장이던 러시아 군인을 만나, 이토오가 오는 26일 오전 6시에 이곳을 통과하여 9시에 하르빈역에 도착하게 된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이에 안 도마는 25일에 홀로 하르빈으로 돌아가 하루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하르빈역 근처를 맴돌면서 정세를 살피다가 이윽고 9시 30분쯤 되어 멸리서 기적 소리가 들려왔으므로 안 도마는 재빨리 달려서 이토오가 내리는 곳으로 나가니, 경비를 맡아보던 러시아 군인들도 그를 늦게 달려온 일본 관리인줄로 알고 막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이토오가 기차에서 내려, 러시아 재무 대신 코코프체프와 함께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으면서 의장대와 각국 외교관 앞을 지나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바로 이때 안 도마는 군중 사이를 헤치고 앞으로 나가면서 10보(步) 쯤 떨어진 곳을 걷고 있던 이토오의 가슴과 복부를 향하여 3발을 명중시켜 즉사케 하였다. 민족의 원수를 보기 좋게 쓰러뜨린 안 도마는 거사의 성공을 기뻐하여 일찌기 '대한 독립'이라는 혈서를 써넣은 태극기를 품속에서 꺼내어 높이 흔들며, 러시아어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태연히 포박되었다. 이어 그와 함께 일을 꾀하였던 우 덕순. 조 도선과 원산(元山) 사람으로서 한때 러시아어의 통역을 맡기로 하여 하르빈까지 갔다가 그만둔 유 동하(劉東夏)등 9명의 동포가 또한 잡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안 도마와 우 덕순 등은 곧 러시아 헌병사령부가 있던 장춘(長春)으로 압송되어 한달 동안 억류 되었다가 일본 헌병에게 넘겨져 여순(旅順) 감옥으로 옮겨졌다. 여기서 이들은 일본 헌병들에게 취조를 받고 혐의가 없다고 여겨진 정 대호(鄭大鎬) 등 16명은 석방되고, 안 도마 등 4명만이 재판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러는 사이에 안 도마의 대담한 의거(義擧)의 소식이 전파를 타고 온 세계에 알려지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특히 우리 동포와 청나라 사람들은 감탄하며 그를 돕는 일에 앞장을 서는 일을 일으키었다. 그러나 안 도마의 공판은 일본 법원장의 마음에 드는 일본인 변호사만의 변호하에 1910년 2월 7일부터 날마다 열리고, 4번째 공판일에는 검사(檢事)로 부터 안 도마에게는 사형, 우 덕순에게는 징역 2년, 조 도선. 유 동하에게는 징역 1년 반의 구형이 있게 되었다. 이러한 검사의 구형에 대한 변호인의 형식적인 변론이 2월 13일에 있었고, 다음날에는 재판장의 판결 언도가 있었는데 오직 우 덕순의 형기가 1년 늘어 징역 3년으로 되었을 뿐이었다.

 

 

(3) 홍 신부의 추방

 

   한편 안 도마에게 세례를 주고 그뒤 여러 모로 그의 하는 일을 도와준 일이 있던 홍 석구 신부는 그가 여순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곧 그를 찾아가 위로 한 일이 있었고, 사형 판결이 내려지자, 다시 찾아가 그에게 교회 법대로 종부성사를 베풀어 줌으로써 그로 하여금 교우로서의 마지막 길을 걷게 하였다. 그리하여 안 도마는 드디어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대한 독립과 동아 민족의 행복을 위하여 죽는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채 새로 만든 한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교수형틀에 올라가 웃으면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이러한 안 도마의 애국 정신은 청사에 길이 빛나게 되었으나 그를 도와주었던 프랑스의 홍 석구 신부는 그때의 조선교구장이던 뮈델 주교로부터 정치 문제에 관여하였다는 탓으로 징계 처분을 받았다. 이에 홍 신부는 로마 교황청에 상소하여 그의 한 일이 정당함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주님께서 부르신 한 인간의 영혼을 위로한 것이 어떻게 정치 문제일 수가 있겠는가. 종교 문제와 정치 문제의 한계는 밖으로 나타난 일만을 고려해서 판단할 일은 아니다. 나는 안 도마가 그 나라에 대해 역적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를 찾았을 것이다. 하물며 그의 행위는 그의 나라와 민족을 위한 것이 아닌가. 이런 일이 프랑스에서 일어났다고 하면 그 때에도 징계 처분을 내렸을 것인가. 나는 안 도마의 영세 신부로서 종부성사를 줄 의무를 가졌다.

 

   홍 신부의 이러한 변론으로 말미암아 로마 교황청에서 열린 3급 심리의 마지막 판결은, 홍 신부의 한 일이 정당하였다는 승소의 결과를 내리게 되었다.

 

   이러는 사이에 일본은 1910년 8월 22일에 마침내 대한 제국을 합병하고, 이곳에 조선 총독부를 두어 총칼로 우리 민족을 탄압하는 무단 정치(武斷政治)를 펴게 되었다. 그런데 대한 천주교회는 날로 크게 발전하여 전국에 걸쳐 8만 명에 가까운 신자를 거느리게 되었으므로, 로마 교황청에서는 1911년 4월에 조선교구를 둘로 나누어, 충청도 이북의 9도(道) 교우를 다스리는 서울교구와 경상. 전라 지방의 4도 교우를 다스리는 대구교구(大邱敎區)를 설정하고, 종래의 조선 교구장이던 뮈델 주교로 하여금 서울교구를 맡게 하였다. 따라서 평안도 지방의 교우를 다스리던 홍 석구 신부는 그대로 뮈델 주교의 감독하에 전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안 도마를 정신적으로 도와준 일로 말미암아 뮈델 주교로부터 징계 처분을 받았다가 교황청의 최종 판결로 승소하게 된 홍 신부는 그의 상관이며 패소자이던 뮈델 주교의 밑에서 그대로 머물러 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로마 교황청에서는 그를 그대로 서울 교구에서 일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생길 전교상의 좋지 않은 영향을 고려하여 그에게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홍 신부는 눈물을 머금고 1914년 4월 22일에 서울을 떠나 프랑스로 추방되었으나, 그는 1941년 81세의 나이로 그곳에서 선종할 때까지 교적(敎籍)만은 그대로 서울교구에 남겨두고 옮기지 않았었다. 한편 홍 신부가 25년 동안 살면서 새로운 전교 지방을 개척함으로 말미암아 정든 제2의 고향을 섭섭하게 떠나게 된 것은 안 도마를 지도하여 준 일과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날까 두려워한 일제의 끈질긴 감시의 결과이었다고도 믿어진다. 이렇듯이 홍 신부는 우리 민족이 받고 있던 수난을 동정하고 함께 슬퍼한 거룩한 성직자이었다.

 

 

-  [간추린 한국천주교회 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