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비오의 쉼터

18. 뮈델 주교의 전교 활동과 민 부대부인(閔府大夫人)의 입교 본문

[♡ 자유와 평화 ♡]/한국천주교 歷史

18. 뮈델 주교의 전교 활동과 민 부대부인(閔府大夫人)의 입교

자유인ebo 2011. 8. 12. 10:54

3. 뮈델 주교의 전교 활동과 민 부대부인(閔府大夫人)의 입교

 

 

 

 

 

 

 

(1) 명동 대성당(明洞大聖堂)의 건립

 

   백주교의 뒤를 이어 조선 교구의 8대 주교로 성성(成聖) 된 민 덕효(閔德孝) 주교는 새로 조선 교구에 배속된 뒤테르트르(Dutertre, 姜良) 신부 . 샤를즈보프(Chargebaeuf, 宋德望) 신부를 거느리고 1890년 11월에 파리를 떠나, 이듬해 2월 22일에는 제물포에 상륙하여 많은 성직자와 교우들의 영접을 받으면서 다음날에는 새로 세워진 명동의 2층 벽돌집인 주교관(主敎館)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6년만에 다시 조선 땅을 밟게 되었는데, 이때에는 조선교회가 햇빛을 보아 큰 발전을 보이게 되어, 성직자의 수는 20명을 헤아리고 이미 일곱 곳에 성당을 개설했으며, 20명의 신학생과 1만 8천여 명의 교우를 갖고 있었다. 이에 민 주교는 무엇보다 먼저 그해에 준공된 용산 예수 성심신학교의 축성식(祝成式)을 올리고, 이듬해(1892) 부터는 명동 종현대성당(鐘峴大聖堂)과 약현성당(藥峴聖堂, 中林洞)을 세우게 했다.

 

   그리하여 약현 성당은 1893년 9월 25일에 축성하게 되었으나, 1892년 8월 5일에 정초식(定礎式)을 거행한 명동 대성당〔종현 대성당〕은 워낙 힘드는 큰 공사인데다가 공사 도중 1894년에 동학(東學) 신도들의 반란으로 말미암아 청일전쟁(淸日戰爭)이 터졌으므로, 전후 6년의 세월이 걸려 1898년 5월 29일에야 축성식을 올리게 되었다. 이 명동 대성당의 준공이 늦어지게 된 것은 40m 높이의 고딕식 종탑(鐘塔)을 서까래도 없이 쌓아 올리는 일이 어려웠음과 공사 기간 중에 일어난 청일전쟁으로 말미암아, 이 공사에 고용되었던 청국인 인부들을 한때 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명동 대성당의 축성식 대미사에는 그토록 천주교를 박해하던 조선 정부의 고관들을 비롯하여 많은 외국 공사(公使)들과 전국으로부터 모인 수천 명의 교인들이 참석하개 되었으니, 이는 곧 천주교의 영광된 승리를 뜻함이었다.

 

   이 성당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은은한 3종(鐘)의 종소리는 서울 사람들의 고달프고 어지러운 마음을 거룩하게 하여 주는 위안의 소리였으니, 이는 민 주교가 그의 성성식에서 받은 '활짝 피어라 순교의 꽃이여'라는 표어를 상징함이었다.

 

 

(2) 민 부대부인의 입교

 

   민 주교는 교회의 승리를 상징하는 대성당을 세우게 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전교의 손을 뻗쳐 그때까지 목자(牧者)를 보내지 못하고 있던 함경도. 평안도 지방에도 신부를 보내게 하였다. 그리하여 1894년에는 브르트(Bret, 白類斯) 신부를 원산(元山)에 보내어 그곳의 교우들을 다스리게 하는 한편, 멀리 간도(間島) 지방에도 전교의 손을 펴게 하고, 1895년 가을에는 르장드르(Le-Gendre, 崔昌根) 신부를 평양에 보내 성당을 마련케 하였다.

 

   이러는 사이에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그해(1894년)에 조선 정부로 하여금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는 일대 정치 개혁을 단행하게 하여 종래의 계급 제도 등을 없에고, 모든 제도를 근대화하게 하니, 대원군은 마포(麻浦) 공덕리(孔德里) 별장으로 은신하고, 개화운동을 싫어하던 왕비 민비(閔妃)는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에 경복궁(景福宮)에서 일본 낭인(浪人)들의 칼에 맞아 죽게 되었다. 이에 놀란 고종(高宗)은 그해 12월 그믐날(양력 1896년 2월 11일)에 몰래 엄비(嚴妃)와 세자(世子)를 거느리고 정동(貞洞)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公使館, 俄館)으로 피신하여 이후 꼭 1년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우리 나라의 광산채굴권(鑛山採掘權). 삼림채벌권(森林採伐權). 철도부설권(鐵道敷設權) 등을 러시아.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 사람들에게 넘겨 주었다.

 

   이러한 때에 홀로 운현궁(雲峴宮)에 살고 있던 고종의 어머니 민 부대부인(閔府大夫人, 대원군의 부인)은 느낀 바가 있어 30여 년 전부터 배우고 있던 천주교의 교리를 유모 박(朴) 말다의 딸인 원(元) 수산나 등에게 다시 익혀 배우고, 민 주교는 1890년 9월 5일(양력 10월 11일) 밤에 운현궁 앞에 있던 비녀(婢女) 이(李) 마리아의 집으로 가서 민 부대부인을 그곳으로 맞이하여 그에게 마리아라는 교명(敎名)으로 세례를 주고, 다시 견진성사(堅振聖事)까지 주었다. 이때 이미 79세의 고령이던 민 부대부인은 아주 유창하게 천주교의 경문(經文)을 외우고 환희에 넘치는 표정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그의 영세 대모(領洗代母)는 원(元) 수산나였다.

 

   이리하여 영신적으로 제생된 민 마리아는 이후 1년동안 교우로서의 본분을 잘 지키다가 1897년 8월 9일(양력 9월 5일) 밤중에는 민 주교를 운현궁 내전(內殿)으로 맞이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성체(聖體, 밀떡)를 처음으로 받아 먹는 성사(聖事)를 갖었다. 이런 성사를 가진 다음 민 마리아는 그해 12월 초부터 노환으로 앓다가 그달 16일(양력 1898년 1월 8일)에 80세로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그는 자리에 눕자 하인을 민 주교에게 보내어 그를 위하여 천주께 기구(祈求)하여 주기를 바라는 한편, 때마침 또한 병석에 몸저 누운 대원군을 찾아보고 그로 하여금 교회로 들어오도록 권하여 줄 것을 간청했다. 이러한 간청에 따라 민 주교는 먼저 편지를 대원군에게 보내어 만나주기를 바랬으나, 대원군은 하인과 선물을 주교에게 보내어 그 부인에 대한 일을 감사하는 한편, 다사다단(多事多端)한 왕궁의 정세로 말미암아 그를 만나줄 수 없다는 뜻을 알려 왔다. 그런데 대원군은 중들을 운현궁에 불러들여 불공(佛供)을 드리게 하다가 1898년 1월 13일(양력 2월 22일)에 79세로 숨을 거두었다. 이에 따라 민 마리아와 대원군의 장례는 그해 윤 3월(양력 5월 15일) 같은 날에 지내게 되었다. 이를 양주군(楊州郡) 녹동(鹿洞)으로 옮기게 되었다. 어쨌든 그토록 천주교를 박해했던 대원군의 부인이 결국 천주교로 개종하게 되었다는 것을 천주교의 마지막 승리를 뜻하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3) 순교 사료(殉敎史料)의 간행

 

   민 주교는 조선 교구의 8대 주교로 취임하게 되자 앞서 대원군의 박해로 말미암아 목숨을 잃게 된 숱한 순교자들의 목격자담(目擊者談)을 전국으로 모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895년에는 《치명일기(致命日記)》라는 활자본을 순국문으로 성서활판소에 간행하여, 이들 목격자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그 정확함을 기하고자 했는데, 전문(全文) 162장, 324면으로 되어있는 이 책의 첫머리에는 서문(序文)이 실려 있고, 그 다음에는 도읍(道邑)별로 구분하여 번호를 붙여 8백 76명의 순교자 약전(略傳)이 수록되어 있다.

 

   민 주교가 이러한 뜻 깊은 일을 추진하고 있던 사이에 조선 정부는 일본군의 압력으로 1894년 7월부터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는 진보적인 정치 개혁을 단행하여 사민 평등(四民平等)의 근대적 제도를 쓰기 시작하고, 그해 음력 12월 16일에는 고종(高宗)의 칙령으로 그 이전에 억울하게 죄로 몰린 사람들의 죄명을 씻어줌과 아울러 그들의 관직을 돌려 주게 하고, 귀양가 있던 그들의 후손과 가족들을 석방하여 주엇다. 이러한 특사령에 따라 그해 12월 27일에는 앞서 천주교로 말미암아 처형된 남 종삼(南鍾三). 홍 봉주(洪鳳周). 조 연승(曹演承). 조 낙승(曹洛承)을 비롯하여, 정치범으로 단죄되었던 홍 국영(洪國榮). 박 영효(朴泳孝). 홍 영식(洪英植). 김 옥균(金玉均) 등 36명의 관직을 복구시키고, 이들의 가족으로서 귀양가거나 노비로 입적(入籍)된 사람들도 모두 석방시킴과 아울러 출세의 길을 열어주게 하였다. 그 결과 조선교회 창설자이던 이 승훈의 5대손인 이 원모(李元模)는 예식원(禮式院)의 주사(主事)로 등용되고, 교우이던 이 유인(李裕寅)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부터 환궁하게 될 경운궁(慶運宮, 德壽宮)의 수리를 맡아 고종을 가까이 모시게 되었다.

 

   갑오경장을 계기로 하여 교인들의 죄명이 씻어지고 그들의 후손들을 등용하게 되며, 그 이전에 죄인을 다루던 의금부. 형조. 좌우포도청이 내부 경무청(內部警務廳)과 법부 재판소(法部裁判所)로 폐합됨에 따라, 구문서(舊文書)를 정리하게 되니, 민 주교는 이 문서들을 정리하던 그의 아는 이로부터 교회 박해 때의 문서들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 그 결과 1801년에 순교한 황 사영(黃嗣永)이 지은 '황 사영 백서(帛書)'라는 비밀문서를 입수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길다란 흰 명주에 1만 3천여의 한자(漢字)로써 박해 사정을 기록하고, 서양 군대의 힘을 빌어 신교의 자유를 얻고자 꾀한 비밀 서한이었다. 이러한 문서를 얻게 된 민 주교는, 그후 이를 사진으로 찍어 양지(洋紙) 1장으로 된 영인본(影印本)을 만들어 학계에 나누어 주고, 이를 프랑스 말로 옮긴 작은 책자도 홍콩에서 간행하는 한편, 1925년 7월 5일 로마에서 조선 순교 복자 79위의 시복식이 거행되었을 때, 이 원본(原本)을 가지고 가서 교황 비오 11세에게 바쳤다. 민 주교는 교회 사료를 모음에 힘씀과 아울러 고종이 1897년에 러시아 공사관으로부터 경운궁으로 나와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고치고, 황제위(皇帝位)에 오름에 있어 자문을 받은 일이 있었다. 이때 지어진 '대한'이라는 국호는 옛날부터 우리 나라를 삼한(三韓)이라고 부른데서 붙여진 천주교 간행의 《한불자전》.《한어자전》이라는 책 이름의 '한(韓)'자를 따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  [간추린 한국천주교회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