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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교회의 전교 기관 개설과 근대화 운동 본문

[♡ 자유와 평화 ♡]/한국천주교 歷史

17. 교회의 전교 기관 개설과 근대화 운동

자유인ebo 2011. 8. 13. 10:53

 

2. 교회의 전교 기관 개설과 근대화 운동

 

 

 

 

 

 

(1) 용산 신학교(龍山神學敎) 등의 개설

 

   한불 수호조약을 맺음으로써 억지로나마 전교의 자유권을 얻게된 조선 교구의 브랑 백 주교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나라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앞서 비밀리에 여주 부흥골(驪州郡 康川面 釜坪里)에 두었던 신학교를 1887년에는 공공연히 서울 남대문 밖의 용산(龍山)으로 옮겨오게 했다. 이에 앞서 백 주교는 이미말한 바와 같이 한미 수호조약이 맺어진 것을 보고, 1883년에는 벌써 서울 명동의 언덕배기 땅을 교우 김 가밀로의 이름으로 사들이게 했으나, 그후 한불 조약이 맺어지자 1887년에는 외국인 성직자의 순교지로 이름난 한강(漢江)가 새남터의 서북방에 있는 용산 함벽정(涵碧亭, 現 元曉路 4街 聖心女中高校)의 넓은 대지(垈地)를 교우 최(崔) 시몬의 이름으로 사들여 곧 이곳으로 신학교를 옮기게 하고, 이를 예수 성심신학원(聖心神學院) 이라고 이름지었다.

 

  이 때를 전후하여 우리 나라에는 이미 11명의 프랑스 성직자가 들어와 1만 4천여 명의 교우를 다스리고 있었고, 교우의 수는 날로 늘어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브랑 백 주교는 프랑스 성직자들에게도 행동의 자유가 허용되게 된 서울 지방으로 신학교를 옮겨, 보다 쉽게 이 나라 신부를 양성시키고자 했는데, 이 예수 성심신학원의 원장은 1880년 11월에 입국한 류비어 류 달영(柳達榮) 신부였고, 교사(敎師)로는 1885년 5월에 입국하여 여주 부흥골에서 7명의 신학생을 가르치던 마라발(Maraval) 서 약슬(徐若瑟)신부가 있었다. 그리고 위에 말한 7명의 신학생 가운데에는 페낭성으로부터 귀국한 4명의 신학생이 들어 있었는데, 신학원을 서울로 옮김에 따라 다시 페낭으로부터 돌아온 6명의 신학생이 추가되고 새로 입학하는 신학생도 많게 되었다.

 

  이리하여 신학생의 수가 해마다 늘어나게 되니, 백 주교는 함벽정(涵碧亭)의 넓은 언덕배기 땅을 닦아 이곳에서 서양식의 2층 벽돌집을 처음으로 세우는 일을 일으키고, 이 일을 1885년에 입국한 코스트 고 의선(高宜善) 신부에게 맡겼다. 고 신부는 일찌기 프랑스에서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후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 들어가 신품(神品)을 받게 되 어학(語學)과 건축학에 뛰어난 신부였다. 그러므로 그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리델 주교가 착수한 《한불자전》. 《한어문전》의 편찬을 완성시킨 후 이것들을 일본 요코하마에서 출간하는 일에 크게 이바지하고 조선으로 들어왔다.

 

  이러한 때에 한불 조약이 비준됨으로써 조선에서 전교의 자유를 얻게 되니, 백 주교는 바로 그해(1887년)부터 고 신부로 하여금 서울 명동의 언덕배기 땅을 깍아내리게 하여 1890년까지에는 그곳을 주교관(主敎館). 성당터로 만들게 하는 한편, 벽돌을 만들어 먼저 주교관과 신학교 건물을 세우게 했다. 그런데 그 때까지 아직 우리 나라에는 서양식의 벽돌을 만드는 공장이 없었으므로 이를 만드는 일이 급선무였다. 이리하여 고 신부는 열심한 교우 김 흥민(金興敏) 요안 . 김 덕순(金德淳)을 시켜, 사방으로 벽돌을 만들만한 진흙이 있는 곳을 찾아보게 한 끝에 대원군의 박해로 말미암아 목숨을 잃게 된 베르뇌 장 주교 등의 시체가 묻혀 있던 용산 와서현(龍山瓦署峴, 왜아고개 오늘의 국방부 뒤 군종센터 부근) 골짜기의 진흙을 파다가 시험하여 보니, 그것이 벽돌을 만들기에 알맞은 진흙임을 알게 되었다. 이곳에는 우리 나라에서 기와를 굽는 와아(瓦衙)가 있었으므로 그곳을 왜아고개라고 불렀다.

 

  이리하여 고 신부는 와서현(瓦署峴) 골짜기의 땅을 사들여 그곳에 벽돌 공장을 마련하고 중국인 연와공(煉瓦工)들을 고용하여 서양식의 많은 벽돌을 만들게하여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양옥 건물을 세우게 하였다. 그 결과 1890년에는 명동 언덕 위에 2층의 벽돌집 주교관(主敎館)이 세워지고, 이듬해에는 용산 함벽정 자리에 또한 2층의 신학교 건물이 세워지게 되었으니, 이들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양옥 건물이었다. 한편 우리나라 교우들이 가장 많이 피를 흘린 서울 서소문 밖 네거리에 가까운 수렛골〔巡和洞〕의 땅을 사들여 1890년에는 그곳에 강당(講堂)을 세우고, 그 서쪽의 언덕배기 땅에 처음으로 벽돌집 성당〔中林洞〕을 세우기 시작한 끝에 1892년에는 이를 준공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 천주교회는 신교의 자유를 얻은 후, 곧 서울 한복판의 높은 지대를 비롯하여 순교지에 가까운 곳에 버젓이 교회를 상징하는 건물들을 세움으로써 승리의 개가를 올리게 되었으나, 이러한 여러 가지의 어려운 일들을 처리하는 가운데 백 주교는 특히 1890년 2월 2일에는 성모(聖母) 마리아에게 감사의 뜻을 드리는 대미사를 장엄하게 지내고, 며칠 후에 중병을 얻어 그달 21일에 46세로 선종(善終)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의 교장이던 뮈델 민 신부가 그해 8월에 조선 교구의 8대 주교로 임명되어 그 성성식(成聖式)이 그해 9월 21일에 파리 신학교 성당에서 거행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신학교의 후임 교장이던 델페쉬(Delpech) 신부는 민 주교에게 '활짝 피어라 순교의 꽃'(Florete fores Martyrum)이라는 표언(標言)을 수여함으로써 숱한 순교자들의 피로써 물들여진 조선에 있어서 천주교의 꽃이 만개(滿開)되기를 빌었다.

 

 

(2) 성 바오로 수녀회(修女會)의 조선 진출과 자선 사업

 

  한불 조약이 비준된으로써 전교의 자유가 얻어지며 이에 따라 신자의 수가 날로 늘어가게 되니 이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또는 불쌍한 고아들을 구제하게 위하여 바로 그해(1887년)에 새로이 르 메르(Le Merre, 李類斯) 신부 . 라프르카드(Lafourcade, 羅) 신부 . 롤트(Rault, 虛若望) 신부가 들어오고, 이듬해에는 프랑스 샤르트르(chartres)에 분부를 둔 성바오로 수녀회가 진출하게 되었다. 그 결과 1888년 말까지에는 조선교회가 16명의 성직자와 20명의 신학생과 1만 5천 4백명의 신자를 가지게 되었는데, 지난 1년 동안에만 있었어도 신자가 1천 2백여명이나 늘게 됬다.

 

  성바오로 수녀회는 백 주교의 요청에 따라 조선 정부나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고 있던 고아 . 노인 . 병자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조선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백 주교는 이에 앞서 1880년부터 길에 버려진 고아들을 모아 몇 여 교우의 집에 맡겨 기르게 하다가, 1885년에는 서울 곤당골〔美洞, 現 乙支路一街〕에 있는 기와집과 종로(鍾路) 똥골〔東谷, 現貴鐵洞〕에 있는 기와집을 사들여 각각 고아원과 양로원으로 삼고, 교우들로 하여금 이를 맡아보게 하였다. 그리하여 1887년 7월 까지엔는 이미 1백여명의 고아와 40여명의 남녀 노인들이 이 두 구제기간에 수용되어 20명의 여 교우들이 이들을  양육하게 되었으나, 이러한 일들은 원래 큰 희생이 요구되는 일이었으므로 세속(世俗)에 살고 있는 교우들만으로서는 큰 효과를 거둘 수 없었고, 또 그들에게 매월 지급하는  월급으로 말미암아 많은 비용이 낭비되었다. 그러므로 백 주교는 1887년 7월 26일자로 서한을 샤르트르에 있는 성바오로 수녀회 본부로 보내어 조선의 양로원과 고아원을 맡기위하여 나와줄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요청에 따라 성바오로 수녀회의 원장(院長) 수녀는 1888년 5월에 그곳에 있던 자카리에(Zacharie) 수녀 . 에스텔(Est-elle) 수녀와 월남(越南) 사이공에 있던 중국인 프란치스카(Fr-ancisca) 수녀 . 비르지니(Virginie) 수녀로 하여금 조선으로 진출하게 했다. 그리하여 이들 4명의 수녀는 1888년 7월 22일 제물포에 상륙하여 조선 교구의 경리 신부(經理神父)이던 포아넬(Poisnel) 박 도행(朴道行) 등의 안내를 받으면서 서울로 들어와 정동(貞洞)에 마련하여 둔 임시 수녀원에 짐을 풀게 되었다.

 

  한편 이에 앞서 백 주교는 멀지 않아 프랑스 수녀들이 조선으로 나오게 될 것을 알고 조선 교우 중에서 수녀가 되기를 바라는 처녀를 물색한 끝에 순교자의 후손인 박(朴) 사베리오를 비롯한 4명의 소녀를 얻게 되었으므로 이들을 곧 정동에 있던 임시 수녀원으로 보냈다. 이에 따라 수녀원의 인원이 이미 8명을 헤아리게 되니, 백 주교는 명동에 있던 60여간의 두 채 한옥집을 개조하여 수녀원과 고아원을 마련하고 그해 9월에는 수녀들과 곤당골 집에 있던 1백 45명의 고아들을 이곳으로 옮겨 수녀들로 하여금 양육하게 했다. 이어 백 주교는 곧 새로이 2층의 목조 고아원 건물을 세워 보다 많은 고아들을 수용하게 하고 이들이 성장함에 따라 글과 기술을 가르치게 하며, 종로 똥골에 있던 양로원도 이곳으로 옮기게 했는데, 이것이 오늘의 명동 천주교 보육원(天主敎保育院)의 발단이었다.

 

 

(3) 성서활판소(聖書活版所)의 개설

 

  조선교회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코스트 고(高) 신부로 하여금 《한불자전》. 《한어문전》을 1880년과 1881년에 일본 요코하마에서 출판하게 한 일이 있었으나, 그후 고 신부는 이 책들을 인쇄하기 위하여, 만든 대.중.소 3체(體)의 한글 활자를 이용하여 1882년부터 일본 나가사키에서 교회 서적을 인쇄하여 가져다 쓰게 했는데, 이 한글 활자는 리델 주교와 더불어 《한불자전》을 편찬한 순교자 최 지혁(崔智爀) 요안의 서체에 의하여 주조(鑄造)된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조선에 있어서 전교의 자유가 얻어지게 되니, 백 주교는 고 신부로 하여금 이 성서활판소를 1888년에 서울로 옮겨오게 하여 보다 쉽게 많은 교회 서적을 간행 보급하게 했다. 이 성서활판소는 정동(貞洞)에 있던 조선 교구 경리 신부(經理神父) 포아넬 박 신부의 집 옆의 다른 한 채 집에 두게 되었는데, 이 활판소에서 사용된 대.중.소 3체의 한글 활자는 이후 여러 출판소에서 쓰게 된 최초의 근대식 한글 활자였다. 이보다 8년 뒤인 1896년 4월에 서 재필(徐載弼)이 미국으로부터 돌아와 창간하게 된 독립신문도 정동에서 인쇄되었으니, 이것도 성서활판소와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이렇듯이 천주교회는 조선을 여러 방면으로 근대화시키는 일에 크게 이바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천주교로 개종하는 국민이 날로 많아져서 1888년 말까지 전국에 걸쳐 신자가 1만 5천 46명, 성당이 4곳, 성직자가 16명, 신학생이 20명이나 있게 되었다. 

 

 

-  [간추린 한국천주교회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