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비오의 쉼터

15. 흥선 대원군의 집정과 병인교난 본문

[♡ 자유와 평화 ♡]/한국천주교 歷史

15. 흥선 대원군의 집정과 병인교난

자유인ebo 2011. 8. 16. 10:48

 

6. 흥선 대원군의 집정과 병인교난   

 

 

    

 

 

(1) 대원군의 집정과 천주교와의 관계


  천주교를 보호하던 철종이 1863년 12월 8일에 아들이 없이 서거하니, 당시 왕실의 최고 감독자이던 조대비(趙大妃, 憲宗의 모친)는 같은 천주교 반대파의 좌의정 조 두순(趙斗淳, 1796~1870)과 손을 잡고, 먼 왕족 흥선군 이 하응(李昰應, 1820~1898)의 어린 아들을 운현궁(蕓峴宮)으로부터 맞이하여 임금(高宗, 1852~1919)으로 삼고, 그 부친을 대원군(大院君)이라 부르게 하였다. 따라서 조 대비는 어린 임금(高宗)을 대신하여 정사를 맡아보며, 곧 이듬해 4월에는 조 두순을 영의정으로 삼고, 안동 김씨의 세력을 내몰았으나, 사실은 흥선 대원군에게 세도를 넘겨주고 그로 하여금 1865년 4월부터는 경복궁(景福宮)을 재건케 하며, 이듬해 3월에는 그의 부인 민씨의 12촌 동생을 왕비로 삼게 하였다.


  그런데 상술한 바와 같이 대원군의 부인이던 민 부대부인(閔府大夫人)은 일찍부터 천주교를 배우고 있었고, 조종은 그 유모이던 교인 박(朴) 말다의 품에서 자랐으므로, 고종이 즉위하자 민 부인은 곧 하인을 장 주교에게 보내어, 천주께 은혜를 감사하는 뜻으로 생(生) 미사를 드려줄 것을 부탁한 일이 있었다. 그뿐 아니라, 대원군도 이 땅에서 8명의 프랑스 성직자들이 활동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어, 1864년 2월에 러시아인들이 국경을 침입하여 오자, 그는 어떤 고관에게 ‘만일 주교가 러시아인들을 물리쳐 준다면 성교(聖敎)에 대하여 신앙의 자유를 주겠노라’고 말한 일이 있었으며, 고종도 유모의 말을 듣고 ‘주교를 만나보고 성교를  믿겠다.’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따라서 고종 즉위 초 3년 동안에는 반대파의 신하들이 천주교를 없애자는 글을 임금에게 올려도 임금과 대원군은 이를 들어주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조선 교회에서는 멀지 않아 믿음의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는 풍설이 떠돌고, 장 주교는 그럴 때에는 서울에다가 큰 성당과 신학교를 세우려고 외방전교회에 편지를 보내어 보다 많은 성직자와 자금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몸소 황해도 지방까지 돌아다니면서 전교에 힘썼다.


  이러한 장 주교의 요청에 따라 1865년 5월 27일에는 새로이 4명의 프랑스 신부가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들은 도리(Dorie, 김)신부 · 브르트니에르(Bretniere, 백) 신부 · 유앙(Huin, 민) 신부 · 볼뤼(Beaulieu, 서반례) 신부였다. 이들은 많은 은괴(銀塊)와 물자를 가지고 1864년 7월에 파리를 떠나 홍콩 · 상해를 거쳐 그해 겨울에는 요동의 차구(岔溝)로 나와서 조선 입국의 길을 찾고 있다가, 이듬해 봄에는 조선에서 믿음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헛소문을 듣고, 5월에 곧 청나라 배를 타고 백령도 해역으로 나와, 장 주교가 보낸 조선 배를 만났으나, 황해도 및 한강연안의 감시가 엄하다는 말을 듣고 교우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충청도의 내포 부근에 상륙했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때마침 내포(內浦)에 머물러 있던 안 부주교는 그들을 교우 마을로 맞이하여, 몇 달 동안 머물게 하면서 1명씩 차례로 서울로 보냈다. 이리하여 조선 교구에는 12명의 성직자가 있어, 열심히 전교한 결과 그해 연말까지에는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걸쳐 2만 3천여 명의 신자를 갖게 되었다. 이에 앞서 장 주교는 서울 중부 태평동(太平洞)에 있던 큰 집을 양반 출신의 교우이던 홍 봉주(洪鳳周) 도마의 이름으로 사서, 주교댁으로 쓰며 성당 등을 세우기 위하여 많은 은괴를 가지고 있었고, 교회 서적 출판소도 그 부근에 두고 있었다.



(2) 러시아인의 침입과 병인교난(丙寅敎難)


  고종 즉위 후 교회가 햇빛을 보이려 할 무렵에 러시아 사람들이 거듭 국경을 침범함으로써 마침내 병인교난(1866)을 일으키게 하였다. 바로 두만강 건너편에 항구를 두게 된 러시아 제국은 다시 남진(南進)의 야욕을 채우려고, 1864년 2월과 1865년 9월 및 11월에 각각 수명 내지 수십 명씩의 그 국민을 시켜 경흥(慶興)에 침입하게 하여 통상을 요구하는 편지를 전달하게 하고, 특히 두 번째부터는 함흥(咸興)에 있는 함경감사(咸鏡鑑司)를 만나러 가겠다고 주장하게 되니, 경흥 부사(慶興府使) 윤 협(尹夾)은 이를 거절하다가 할 수 없이 세 번째로는 앞으로 90일 이내에 회답하여 줄 뜻을 말하고, 이를 감사 이 유원(李裕元)을 거쳐 조정에 보고 하였다.


  이러한 급보를 받고 대원군이 크게 놀라고 있을 때, 장 주교의 복사(服事)이던 홍 봉주(洪鳳周) 등은 대원군에게 글을 올려,


  러시아를 막아내는 길은 오직 프랑스 및 영국과 동맹을 맺는데 있고 이것은 우리나라에 와 있는 서양 주교의 힘을 빌리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이러한 글을 보고 대원군이 그것을 보료 밑에 넣어두고 있을 때에 그의 부인이 다시 박(朴) 말다를 시켜 교우들에게 ‘다시 글을 올리면 성공할 것이다’고 알리게 했다. 이에 승지(承旨)이던 남 종삼(南鍾三) 요안이 글을 지어가지고 몸소 대원군에게 올리니, 대원군은 이를 자세히 읽은 뒤 ‘좋소, 정승(政丞)에게 말하시오’라고 했다. 그 다음날 대원군은 다시 남 종삼을 불러 오랫동안 교리(敎理)를 듣던 끝에 ‘그 교리는 좋으나, 어찌하여 죽은이의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오’라 묻고, 이어서 ‘러시아가 조선을 차지하려는 것을 주교가 막을 힘이 있다고 정말 믿으오’라고 물었다. 남 종삼이 ‘정말 그럴 힘이 있는 줄로 압니다.’라고 대답하니, 대원군은 ‘그러면 주교를 급히 만나보게 해주오’라고 말했다.


  이러한 대원군의 분부를 듣고 남 종삼은 곧 주교를 찾았으나, 때마침 성탄절을 전후한 때이어서 성사(聖事)를 주기 위하여 장 주교는 서울로부터 6일이나 걸리는 황해도 평산(平山) 지방을, 안 부주교는 충청도 내포 지방을 돌고 있었으므로 이들을 빨리 데려오는 것이 큰 일이었다. 이를 알고 대원군의 큰 딸의 시아버지인 조 기진(趙基晉)이 돈과 가마를 대주었으므로 급히 가서 주 주교를 모셔오게 했는데, 장 주교가 서울로 돌아온 것은 안 부주교보다 4일 늦은 1865년 12월 13일(양력 1866년 1월 29일) 이었다. 이에 남 종삼이 그달 15일에 이러한 사실을 알리려고 운현궁으로 들어가니, 대원군은 시일이 너무 지연하였으므로 좋지 않은 낯으로 그를 맞으면서 먼저 말하기를,


  나는 영감이 부친에게 세배(歲拜)드리려고 시골로 간 줄로 알고 있었소, 그 일은 이제 급하지 않으니 좀 두었다가 만납시다.


라고 했다. 남 종삼이 이 말을 듣고 크게 실망하여 아무 대꾸도 없이 물러나와 새해를 맞기 위하여 고향인 제천(堤川)으로 내려가 84세의 부친 남 상교(南尙敎) 아오스딩을 뵈니, 그는 아들에게 말하기를,


  너는 충성된 신하의 일을 다 했으나, 너의 목숨은 이미 팔린 바가 되었으니, 죽을 문서에 수결(手決)할 때에는 성교(聖敎)에 욕되는 글귀가 없도록 해라.


라 하였다.


  이와 같이 대원군은 처음에는 교인들의 진언에 따라 서양 주교의 힘을 빌림으로써 러시아인의 침입을 막고자 하다가, 10여일 후에는 그 생각을 돌려 도리어 천주교를 박해하려는 태도를 보이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까닭이 있었다. 그것은 그해 10월 20일에 서울을 떠나 북경으로 가던 동지사 이 흥교(李興敎) 등이 그 도중에서 급히 거짓 글을 정부에 보내어 ‘청나라에서는 그 나라에 있는 모든 서양인들을 죽이고 있다’라고 알려 왔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홍보가 서울에 전달된 것은 바로 그해 12월 중순의 일이었다. 이 흉보를 듣고 4명의 시임(時任) · 원임(原任) · 대신인 정 원용(鄭元容) · 김 좌근(金左根) · 조 두순(趙斗淳) · 김 병학(金炳學) 등이 글로써 대원군을 꾸짖어 말하기를,


  서양인을 물리치시오, 그들과 친하게 되면 나라가 망할 것이니, 서양 오랑케를 모두 죽이고 서학(西學)꾼을 모두 죽이시오.


라 하니, 원래 변덕스러운 대원군은 마음을 돌려 천주교를 박해하게 되었다. 한편, 이때에 이르러 대원군이 천주교를 박해하게 된 것은 그가 그해 4월부터 재건하기 시작한 경복궁의 재원이 딸리게 되어 장 주교가 가지고 있던 많은 재화(財貨)를 빼앗아 쓰고자 한 데서 연유된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병인교난도 구정(舊正)을 전후하여 발단하게 되었는데, 그 첫 희생자는 평양에서 발생하였다. 즉 평양 감사 정 지용(鄭志鎔)은 1865년 겨울에 두 교우를 잡아 가두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몰려온 1백여 명의 교우들이 또한 함께 갇히기를 자원함을 보고,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여 이들을 곧 놓아준 일이 있었으나, 이듬해 1월 3일에는 다시 유 정률(劉正律) 베드로 · 우 세영(禹世英) 알렉시오 등 네 교우를 잡아다가 형문한 끝에, 배교를 선언한 3인을 풀어줌과 아울러 끝까지 신앙을 고백한 유 정률만은 1백여 명의 배교자들로 하여금 타살(打殺) 하게 하여, 그 시체를 대동강(大同江)에 버리게 한 일이 있었다. 이 평양 사건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해 겨울에 그곳을 지나가던 동지사들이 평양 감사와 짜고 미리 일으킨 지방 박해였다.


  이러한 박해는 곧 서울로 번져 1865년 음력 12월 29일 그믐날에는 포졸들이 대궐을 짓기 위한 원납전(願納錢)을 거둔다는 핑계로, 두 번이나 장 주교의 집을 찾아와 돌아보았다. 그리고 새해에 접어들자 곧 한성부(漢城府)는 장 주교의 하인이던 이 선이(李先伊)와 교회 서적 간행자이던 최 형(催炯) · 전 장운(全長雲)을 잡아들이고, 1월 5일에는 조정에서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이러한 일은 천주교 반대파이던 영의정 조 두순 등의 책동으로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배교자 이 선이의 진술로 교회의 내막을 샅샅이 알게 되어, 4일 후인 1월 9일부터는 장 주교 · 홍 봉주이하 9명의 성직자와 많은 교우를 잡아들임으로써 병인 대 박해를 일으켰다. 특히 이번 박해를 일으키는 데 주동자의 역할을 한 조 대비(趙大妃)는 1월 24일에 전국에 명령을 내려, 서양인과 교인을 남김없이 잡게 하고 고발한 자에게는 상을 주며, 숨긴 자는 죽이고, 황해도· 충청도 해안에서 청나라 배에 왕래하는 자는 곧 잡아 죽인 후 정부에 알리는 선참후계(先斬後啓)의 방법을 쓰게 했으므로 전국에 걸쳐 교회의 주요 인물들이 거의 그해 봄에 잡혀 순교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 인물의 잡힌 날자와 순교한 날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1월 9일(양력 2월 23일) 장 주교 · 홍 봉주를 잡다.

 2) 1월 11일 서울에서 정 의배(丁義培) · 부르트니에르 백(白) 신부, 평양교우 우 세영(禹

     世 英)을 잡고, 고양군(高陽郡)에서 승지 남 종삼을 잡다.

 3) 1월 13일 광주(廣州) 둔토리(屯土里)에서 볼류 서(徐) 신부를, 용인 손곡리(孫谷里)에서 도

     리 김(金) 신부를 잡다.

 4) 1월 20일 밀고자 이 선이(李先伊)를 놓아주다.

 5) 1월 21일(양력 3월 8일) 남 종삼 · 홍 봉주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장 주교 · 백 신부 · 서

     신부 · 김 신부를 한강가 새남터에서 목베다.

 6) 1월 22일 충청도 제천 베론에서 푸르티 신(申) 신부 · 프티니콜라 박(朴) 신부를 잡다.

 7) 1월 23일 전 장운(全長雲) · 최 형(催炯)을 서소문 밖에서 목베다.

 8) 1월 24일 남 종삼의 부친 남 상교(南尙敎)를 제천에서 잡아 공주(公州) 옥으로 넘기다.

 9) 1월 25일 신 신부 · 박 신부 · 정 의배 · 우 세영을 새남터에서 목을 베고, 충청도 내포에서

     안 부주교 · 유앙 민 신부 · 오매트르 오(吳) 신부 · 황 석두(黃錫斗)를 잡다.

10) 2월 13일(양력 3월 30일) 충청도 보령(保寧) 수영(水營)에서 안 부주교 · 민 신부 · 오 신

      부 · 황 석두 · 베론 신학교 주인 장 주기(張周基, 樂韶)를 목베다.

11) 8월 1일 김 만호(金晩浩) · 김 문원(金文遠) · 대원군의 하인 이 연식(李連植)을 새남터에

      서 목베다.


  위에 열거한 사실만 보아도 병인 대교난이 그해 1월 초부터 시작되어 2월 중순까지 이르는 한 달 반 사이에 거의 주요 인물을 죽이게 됨으로써 일단락을 짓게 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와 같이 주요 인물들의 처형을 서두르게 된 까닭은 바로 그해 3월 20일에 민 치록(閔致祿)의 딸을 왕비로 삼는 국혼(國婚)이 거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위에 적은 바 주요 인물의 처형 이외에도 관원의 사사로운 감정이나, 선참후계(先斬後啓)의 방식에 따라 많은 교인이 학살되었으므로 순교자의 수는 훨씬 많았었다. 더욱이 프랑스 성직자들의 학살 사건을 문책하기 위하여 그해 가을에는 프랑스 함대의 내침이 있었고, 1886년에는 독일인 오페르트(Oppert)의 내침이 있었으며, 1871년에는 미국 함대의 내침이 있었다. 이럴 때마다 많은 교인을 함부로 전국 각처에서 죽이게 되었으므로,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간행한《한국에서의 가톨릭(La Catholicisme en Coree)》이라는 책에서는 대원군의 박해로 말미암아 목숨을 잃은 순교자 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886년 9월까지에는 이미 2천명의 교우가 박해자의 칼날에 쓰러졌다. 1870년에 있어서 떠도는 말에는 죽음의 괴로움을 받은 교인의 수는 8천명이라 하였고, 이중에는 피신한 곳에서 굶주림과 위험으로 말미암아 죽은 수가 들어 있지 않다.

 


  이 기사는 1871년의 순교자 숫자가 들어 있지 않았으므로 그것까지 넣는다면 1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외국 함선의 내침에 따른 거듭된 교난


  병인 대 교난은 전술한 바와 같이 그해에 끝나지 않고 외국 함선의 내침에 따라 대원군이 은퇴하기 2년 전인 1871년에 이르기까지 연쇄적으로 계속되었다.


1)프랑스 함대의 내침에 따른 교난

 

  병인교난이 일어났을 때에 우리나라에는 12명의 성직자가 있었고, 그들 가운데에서 9명이 순교 했으므로 아직 3명이 생존하여 있었는데, 이들은 충청도 지방에 본거를 두고 있던 리덜 이(李) 신부 · 페롱 권(權) 신부 · 칼레 강(姜) 신부이었다. 이들은 교우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조선을 탈출하여 교회 구제 운동을 벌이게 되었는데, 가장 먼저 그 일을 꾀한 이는 리델 신부였다.


  리델 이 신부는 교난이 일어났을 때에 경상도 지방을 돌고 있다가 박해의 소문을 듣고 밤길만을 걸어서 본거지인 공주(公州)로 돌아오던 길에 뜻밖에도 충청도 목천(木川, 天安)에 숨어있던 권(權) 신부의 안내자이던 최 지혁(崔智爀, 善一) 요안을 만나 강(姜) 신부가 또한 살아 있다는 소식은 듣고 서로 연락하여 만난 끝에 가장 나이가 젊은 그 스스로가 조선을 떠나 교회의 구제운동을 일으키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러므로 리델 신부는 최 지혁 등 11명의 교인과 더불어 목선을 타고, 그해 5월 17일(양력 6월 29일) 내포를 떠나 천진(天津)으로 건너가서 그곳에 있던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Roze) 소장을 만나, 조선교회의 구제책을 세워줄 것을 부탁했다. 이에 로즈 소장은 그해 8월과 9월에 각각 3척과 7척의 군함을 거느리고, 리델 신부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한강입구로 들어와 프랑스 성직자를 죽인 까닭을 묻고, 강화읍(江華邑)을 한때 점령하였다가 조선군의 공격을 받고 물러갔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자 대원군은 다시 박해를 일으켜 교인 이 의송(李義松) 등 수십 명을 잡아 프랑스 함대가 들어왔던 양화진(楊華鎭)과 통진(通津)에서 그해 9월과 10월에 죽이게 했다. 이에 따라 그해 11월에는 경상도에서도 교인 이 제현(李濟賢) 등이 잡혀 목을 잘리었다.


  한편 프랑스 배가 첫 번째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때까지 충청도 지방에 숨어 있던 권 신부와 강 신부도 교인 송 운오(宋蕓五) · 이 성집(李聖集) 등과 함께 배를 타고 인천(仁川) 앞바다로 나가 보았으나, 그 배를 만나지 못하고 따로 황해를 건너 그해 9월 18일에 청나라 지부(芝罘)로 탈출하였다. 이리하여 조선교회는 이후 10년 동안 다시 성직자를 갖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사건을 흔히 병인양요(丙寅洋擾)라고 부른다. 이 사건에 참여했던 리델 신부는 최 지혁 등을 거느리고 상해로 가서 그곳에 가있던 권 신부 · 강 신부를 만나, 7개월 동안이나 머물렀다가 1867년에는 만주의 근거지인 차구(岔溝)로 옮겨서 조선 전교 계획을 세웠다.



2) 오페르트의 내침에 따른 교난


  오페르트는 청국 상해(上海)에 살던 유태인 계통의 독일 상인으로서 병인교난이 일어난 바로 그해 2월과 6월에 각각 영국 기선(汽船)을 탁고, 충청도 앞바다에 이르러 조선 관원에게 편지를 전하고, 통상을 요구하다가 헛되이 돌아간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얼마 후 그곳으로 탈출한 권 신부 · 교우 최 지혁 등을 만나 이들로부터 참혹한 교난의 이야기를 듣고 그 원수를 갚는 한편, 가능하면 대원군을 누름으로써 통상의 길을 트고자 하는 생각에서 이들과 함께 기선 차이나(China)호를 타고, 1868년 4월 중순에 상해를 떠나 그달 18일(양력 5월 10일) 밤에는 충청도 아산만(牙山灣)을 거쳐 덕산(德山)에 상륙하여 그곳에 있던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南延君)의 무덤을 파다가 날이 밝아지자 헛되이 물러갔다.


  이러한 사실을 듣고 대원군은 크게 노하여 다시 교인을 남김없이 잡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그해 4월부터 연말까지 이르는 8개월 동안에 1백 70명의 교인이 차례로 잡혀 처형되었는데, 그들 가운데에서 주요 인물의 처형 사실을 날짜순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1868년 윤 4월 7일(양력 5월 28일) 조선교회 창설자 이승훈의 아들인 참봉(參奉) 이 신규(李身逵)와 그의 손자인 이 재의(李在誼)와 권 철신의 증손인 권 복(權複)을 서소문 밖에서 목베다.

 

 2) 5월 22일 리델 신부를 배에 태워 청나라로 출발케 한 장 치선(張致善) · 최 영준(崔英俊)을 통진에서 목베다.

 3) 5월 29일 오페르트가 남연군(南延君)의 무덤을 팔 때에 도와준 손 경로(孫京老) · 김 양길(金良吉)을 보령(保寧) 수영(水營)에서 목베다.

 4) 6월 26일 부사(府使) 조 연승(曹演承) · 조 낙승(曹洛承) 형제를 서소문 밖에서 목베다.

 5) 8월 4일 경상도에서 박 달승(朴達承) · 이 정식(李廷植) · 이 월주(李月柱) · 이 관복(李寬福) · 이 삼근(李三根) · 차 장득(車長得) · 양 재현(梁在鉉) 등의 처형을 정부에 알리다.

 6) 8월 15일 경상도에서 김 종륜(金宗倫) · 허 인백(許仁伯) · 이 양등(李陽登)의 처형을 정부에 알리다.

 


 이러한 처형 사실에서 보는바와 같이 조선교회의 창설자들의 후손들은 3대, 4대에 걸쳐 복음전파에 힘쓰다가 또한 순교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에 기술하는 미국함대 내침에 따른 교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러는 사이에 대원군의 딸이요 고종(高宗)의 누님이며, 병인교난 발생 직전에 장 주교를 서울로 모셔오게 하기 위하여 가마와 돈을 대준 조 기진(趙基晉)의 며느리며 부호군(副護軍) 조 경호(趙慶鎬)의 아내이던 이씨(李氏) 부인이 1869년 11월 18일에 간수를 먹고 갑자기 죽었는데 아마도 이 여인도 교인이었던 것 같다.

 


3) 미국 함대 내침에 따른 교난


  미국은 그 상선 제너널 셔만(General Sherman)호가 병인교난이 일어난 바로 그해 7월 24일(양력 9월 2일)에 평양에서 불태워지자 여러 해 동안 그 배의 행방을 쫒던 끝에,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불태워진 것을 알고,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Ro_dgers)로 하여금 4척의 군함을 거느리고, 1871년 4월 8일(양력 5월 26일)에 강화도 해역에 이르러 셔만호 사건의 책임을 묻는 한편, 통상을 요구했으나 대원군은 이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 미국 함대가 강화 해협으로 들어오다가 강화도(江華島)를 지키던 조선군의 포격을 만나게 되니, 미군도 초지진(草芝鎭) · 광성진(廣城鎭)을 점령하고 머물러 있다가 5월 16일(양력 7월 3일)에 물러갔다.


  이리하여 미국 함대는 전후 40여 일 동안 강화 해역에 머물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부(芝罘)로 돌아갔는데, 이 사건을 신미양요(辛未洋擾)라고 부른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대원군은 그해 4월 25일(양력 6월 12일)에 명령을 내려 서울의 종로(鐘路) 네거리와 전국 각 읍의 거리에다가


佯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서양 오랑케가 침범하니 싸우지 않으면 화친해야 되는데, 화친을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다. 우리의 만대 자손에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


 

  이라고 새긴 이른바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게 함으로써 서양인을 끝까지 물리치게 했다. 이에 따라 다시 천주교 박해의 광풍이 일어나 많은 교인들을 미국 군함이 보이는 제물포(濟物浦, 仁川)에서 죽이게 되었는데 그들 가운데에서 중요한 교인들의 순교 날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4월 9일 남 연군의 무덤을 파는 일에 협력한 김 여강(金汝江)과 리델 신부의 탈출을 도와준김 창실(金昌實)을 서소문 밖에서 목베다.

 2) 5월 3일 이 승훈의 증손이며 이 재의(李在誼)의 아들인 이 연구(李連龜) · 이균구(李筠龜) 형제를 제물포에서 목베다.

 3) 5월 18일 이 승훈의 손자이며 이 신교(李身達)의 아들이던 이 재겸(李在謙)의 아내 정(鄭) 부인과 손 명현(孫明玄) · 백 용석(白用石) · 김 아지(金阿只)를 제물포에서 목베다.

 4) 5월 29일 미국 군함에 왕래한 우 윤집(禹允集) · 최 순복(崔順福) · 박 상손(朴尙孫)을 강화 갑곶이[甲串]에서 목베다.


 

  이들과 함께 신미년 한 해 동안에 잡혀 형문을 받은 교인 42명의 행적이 포도청 등록(捕盜廳謄錄) 등에 수록되어 있다.


  대원군의 거듭한 박해로 말미암아 목숨을 잃은 많은 순교자들 가운데서 가장 훌륭하게 순교한 장 주교 이하 24명을 복자위(福者位)에 올리는 시복식이 1968년 10월 6일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1백여 명의 한국교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엄하게 거행되었다. 이로써 한국 천주교회는 기해 교난(1839) · 병오 교난(1846)의 복자(福者) 79위를 합하면 1백 3명의 복자를 모시는 영광을 얻었다. 이 24위 복자의 순교지를 살펴보면 서울 새남터에서 6위,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3위, 충청도 보령에서 5위, 전주(全州)에서 7위, 공주(公州) · 대구 · 평양에서 각각 1위로 되어 있다.

 

 

-  [간추린 한국천주교회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