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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김 대건(金大健) 신부의 전교 활동과 병오교난 본문

[♡ 자유와 평화 ♡]/한국천주교 歷史

13. 김 대건(金大健) 신부의 전교 활동과 병오교난

자유인ebo 2011. 8. 19. 10:42

 

4. 김 대건(金大健) 신부의 전교 활동과 병오교난

 

 

   

 

(1) 김 대건 부제(副祭)의 귀국


  1837년 6월에 마카오에 도착한 김 대건 등 세 소년은 그곳에 있던 교황청 포교성성 동양 경리부에 머물면서 서양 학문을 배우게 되었는데, 이 경리부(經理部)의 직원들은 모두 외방전교회의 성직자들로서 부장(部長) 리봐(Libois) 신부를 비롯하여, 르그레좌(Legregois) 신부 · 메스트르(Maistre) 신부 · 칼레리(C-allery) 신부 · 드폴레스(Desfleches) 신부들이 있었다. 김 대건 등은 특히 칼레리 신부와 드폴레스 신부의 지도하에 학덕을 쌓고 있었는데, 그러는 사이에 가장 뛰어났던 최 방제(崔方濟) 프란시스꼬는 열병을 얻어 1838년 12월 20일 그곳에서 객사하였다.


  그 결과 김 대건 · 최 양업(崔良業)만이 살아서 학업을 닦고 있었는데, 민란(民亂)이 일어나, 두 신학생(神學生)은 두 스승신부와 함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난하여 도미니크회의 별장에서 6개월 동안 공부하다가 마카오로 돌아왔다. 이러는 사이에 두 신학생은 라틴어의 과정을 마치고, 1840년부터는 앞으로 조선에 들어올 베르뇌(Berneux, 張敬一) 신부 · 메스트르(Maist-re, 李) 신부의 지도하에서 철학 · 신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때에 아편전쟁의 결과로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남경 조약(南京條約)이 맺어지게 되니, 프랑스는 이때를 틈타서 청나라에서 어떠한 이권(利權)을 얻고, 가능하면 조선과 화친 조약(和親條約)을 맺고자 하여, 군함 2척을 극동 해역에 보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프랑스 해군 제독 세실(Ceeile)은 군함 에리코느(Erigone)호 · 파보리트(Favorite)호를 거느리고, 1841년 9월 7일 마카오에 이르러 경리부장 리봐 신부에게 우리 두 신학생을 통역으로 데리고 갈 것을 교섭하였다. 이에 따라 김 대 건은 이(李, Maistre) 신부와 함께 에리코느호를 타고, 1842년 2월 15일에 먼저 마카오를 떠나 마닐라 · 대만(臺灣)을 거쳐, 7월초에는 오송(吳淞, 上海)에 도착하여, 뒤늦게나마 8월 29일에는 남경조약이 맺어지는 장소에 참석하고, 최 양업도 브르니에르(Bruniere) 신부와 함께 파보리트호를 타고, 4월 25일 마카오를 떠나 8월 23일에 오송(吳淞)에 도착했으나, 이미 남경조약의 체결은 끝나고 있었다. 그러므로 프랑스 군함들은 두 신학생과 두 신부를 오송(상해)에 내려놓고, 남방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그리하여 신학생과 신부들은 한 달 동안 상해에 머물렀다가 그해 10월 11일 청나라 목선(木船)을 타고 그곳을 떠나, 그달 25일에는 만주 · 요동지방의 대장하(大莊河)에 상륙하여, 요동 전교회장 도(都) 요셉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요동(遼東) 서남 끝에 있는 교우마을 백가점(白家店)에 이르렀다. 그리고 최 양업과 브루니에르 신부는 얼마 후, 개평(蓋平)을 거쳐 조선 교구의 제 3대 주교로 임명된 페레올(Ferreol, 高) 주교가 머물러 있던 내몽고(內蒙古)의 팔가자(八家子)로 가게 되었다.


  이러는 사이에 김 대건과 이(李) 신부는 11월 7일에 청국인 교우로부터 기해교난의 이야기를 비로소 듣고, 이를 알아보기 위하여 이듬해(1843)에 조선으로 들어갈 계획을 세웠으나, 만주교구의 베롤르(Verolles) 주교의 충고로 김 대건만이 홀로 그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로 결정되었다.


  이에 김 대건은 청국인 교우와 함께 1842년 11월 23일 백가점(白家店)을 떠나, 26일에는 봉황성 변문을 20리쯤 남긴 곳에 이르러, 동지사 일행에 끼어 북경으로 가던 교우 김(金) 프란시스코를 만나, 기해교난의 자세한 이야기를 듣는 한편 순교한 범 주교의 서한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김 대건은 곧 변문(邊門)에 이르러 조선옷을 갈아입고, 그달 29일 새벽 1시쯤에 그곳을 떠나 1백 30리의 먼 길을 걸어 저녁때에는 의주(義州) 성문에 다달았다. 여기서 그는 때마침 지나가던 몇 마리의 소 틈에 끼어 성문을 빠져나와 남방으로 1백리쯤 되는 곳에 이르러 30일 새벽에 주막집을 발견하고, 그 집을 찾아들어 갔으나, 다른 손님들에게 그가 신고 있던 중국 신발 때문에 의심을 사게 되어 할 수 없이 그 집을 뛰쳐나와 발길을 북방으로 돌렸다. 이러는 사이에 그는 2일 동안 먹지도 못하고 잠자지도 못하였으므로 잠깐앉아 쉬다가 눈 위에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감자기 ‘일어나서 걸어라’는 소리가 들려 잠을 깨어 다시 걸어서 의주를 지나 변문을 거쳐 이듬해 1월 6일에는 백가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와 같이 첫 번째의 입국 계획에 실패한 김 대건은 1844년 1월 24일에도 동지사를 따라온 김 프란시스코를 봉천(奉天)에서 다시 만나보고, 의주로부터의 입국이 극히 어려움을 알고, 방향을 동방(東方)으로 돌려, 그해 3월 8일에는 두만강(豆滿江)가에 있는 흔춘(흔春)에 이르러, 때마침 청나라 사람과 조선사람 사이에 정기적인 시장(市場)이 열리는 함경도의 경원(慶源)에서 미리 약속한 조선교우 4명을 만나게 되었으나, 그곳으로부터의 입국은 더욱 어려움을 알고, 다시 발길을 서북방으로 돌려 4월에는 내몽고의 팔가자로 돌아갔다. 여기서 그는 최 양업과 더불어 이 신부에게 신학(神學)을 배우고, 그해 12월 중순에는 고(高) 주교의 주례로 6품인 부제(副祭)의 자격을 얻은 후, 다시 조선 입국의 길에 올랐다.


  그리하여 김 대건 부제는 1845년 1월 1일에 고 주교와 함께 변문에 도착하여, 그곳까지 마중 나온 김 프란치스코 등 세 교우를 만나, 서양인의 입국이 극히 어려울 것이라 함을 듣고, 홀로 영접인을 따라 2일 새벽 1시쯤에 그곳을 떠난 후, 얼음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 3일 밤에 샛길로 의주 관문을 돌파하고, 평양(平壤)에서 현 석문(玄錫文)과 합세하여 15일에 무사히 서울에 들어오게 되었다. 9년 만에 귀국한 김 대건 부제는 교우들이 마련하여 놓은 석정동(石井洞, 現 乙支路一街)의 작은 집에 짐을 풀고, 그 어머니 고(高) 우술라에게 조차 그의 귀국을 알리지 않은 채, 성무를 처리하는 한편 상해로 가 있던 고 주교를 맞아들일 준비를 서둘렀다.



(2)김 대건 신부의 전교 활동


  이러는 사이에 김 대건 부제는 그해 2월부터 중병을 얻어 15일 동안 고생하다가 다행히 몸이 회복되어 3월부터는 2명의 신학생을 가르치는 한편, 작은 목선 하나를 사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현 석문 등 11명의 교우와 함께 이 작은 배를 타고, 1845년 4월 30일 제물포(劑物浦)를 떠나, 오직 나침판의 가르침에 따라 뱃머리를 서쪽으로 돌려 구사일생(九死一生)의 항해를 계속하다가, 다행히 중국 배에 끌리어 5월 28일 오송(吳淞)에 도착하고, 영국인 선원의 보호를 받아, 6월 4일에는 상해에 이르러 예수회 신부 고땔랑(Gotteland)의 도움을 얻어 부서진 배를 수리하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마카오에 돌아가 있던 고 주교가 김 대건 부제의 서신을 받고, 다불뤼 안(Daveluy, 安敦伊) 신부와 함께 8월 중순 상해로 돌아오게 되니, 김 부제는 8월 17일 상해로부터 30리쯤 떨어져 있는 김 가항(金家港)의 성당에서 조선 교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고 주교의 집전으로 신품성사(神品聖事)를 받고, 24일 주일(主日)에는 만당소신학교(萬堂小神學校)에서 첫 미사를 드리게 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김 신부는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신품을 받은 성직자가 된 것이며, 그때의 나이는 24세였다.


  이리하여 김 대건 신부는 고 주교 · 안(Daveluy) 신부를 그 작은 배에 모시고, 8월 31일 상해를 떠나 귀국의 길에 올랐으나, 처음에는 요동 방면으로 가려던 이 배가 거친 파도를 만나, 반대로 동남방으로 흘러 제주도 해안에까지 표류하다가 42일 후인, 10월 12일에야 금강(錦江) 유역인 강경포(江景浦) 부근의 황산포(黃山浦) 교우마을에 닿게 되었다. 여기서 서양 성직자들은 상복 차림으로 변장하고, 밤에 교우들의 영접을 받으면서 상륙하여 교우의 움막집에 짐을 풀고, 두 달 동안 머물며 이어 안 신부는 그 곳에서 90리쯤 떨어져 있던 교우마을로 가서 조선말을 배우게 되었는데, 이 사이에 김 신부는 서울로 올라와 용인군(龍仁郡) 은이 · 골배 마실에 살던 모친을 모셔다 뵙고, 다시 그 교우마을로 돌아가, 11월에 고 주교를 말에 태워 서울 석정동(石井洞) 집에 모셔오게 되었다.


  이에 고 주교는 이 승훈의 손자이며, 범 부교의 복사(服事)이던 늙은 신학생 이 재용(李在容) 도마에게 조선말을 배우는 한편 성무를 집행하고, 안 신부는 두 달 동안 조선말을 배운 뒤, 전교에 나서 이듬해 1월까지의 50일 사이에, 충청도 지방의 여러 교우마을을 찾아다니면서 7백여 명의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그 결과 고 주교들이 들어오기에 앞서 해마다 3백여 명씩 늘어가던 교우의 수가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 그것은 특히 외국인 성직자들의 서투르고 알아들을 수 없던 말보다 훨씬 알아듣기 쉽고, 몸에 사무칠 수 있는 김 대건 신부의 가르침을 들음에서 그러하였다.



(3)병오 교난(丙午敎難)의 경위


  이와 같이 조선 교회가 세 성직자를 맞이하여 갑자기 크게 발전할 움직임을 보이게 되자, 그 총 책임을 맡고 있던 고 주교는 청나라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던 메스트르 이(李) 신부와 최 양업 부제를 맞아들일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에 앞서 고 주교는 청나라에 있을 때에 이 신부와 최 부제에게 편지를 보내어, 의주로부터의 입국은 불가능하니, 경원(慶源)으로부터의 길을 찾아보도록 하라고 지시한 바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 신부와 최 부제는 1845년 1월 말경에 청국인 교우의 안내를 받으면서 경원 방면으로 떠나 개시(開市) 10일 전에 청나라 관헌에게 잡혀 2일 동안 투옥되었다가 요동 지방으로 송환되어 그곳에 있던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고 주교는 김 대건에게 명하여, 이 신부 · 최 부제를 바닷길로 맞아들이는 길을 찾아보게 하였다. 이에 김 신부는 그들에게 편지와 바닷길을 알리는 지도(地圖)를 보내는 방법을 찾게 되었는데, 그것은 해마다 음력 3월부터 5월까지의 사이에 황해도 연안(沿岸)에 많이 나타나는 조기떼를 잡기 위하여 그 해역에 출어(出漁)하는 청나라 교우의 어선을 이용하는 길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모친을 모시고 두 달 동안 전교하던 용인군 은이의 생활을 그해 양력 4월 8일의 미사를 끝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모든 준비를 갖춘 다음 이 재용 등 7명의 교우와 함께 임 성룡(林成龍)의 배를 타고, 5월 14일(음력 4월18일) 마포(麻浦)를 떠나 강화도(江華島)를 거쳐 5월 25일 연평도(延坪島)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뱃사공들이 조기를 사가지고 순위도(巡威島) 갯가로 가서 팔려 했으나, 아무도 사는 이가 없어서 뱃사공 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 섬에 내려 그것을 소금으로 저려 말리게 했다. 그리고 김 신부들은 어둠을 틈타 그 갯가를 떠나 5월 28일에는 마합도(摩哈島) · 터전목 · 소청도(小靑島) · 대청도(大靑島)를 거쳐, 다음날에는 백령도(白翎島) 해역에 이르러 그곳에 그물을 치고 있던 1백여 척의 청나라 어선 중 그 1척에 가까이 가서 눈치를 엿보게 되었다. 여기서 김 신부는 그 배 주인과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그가 믿을 만한 사람임을 알고, 그에게 고 주교의 편지와 그 자신이 만주에 있던 베르뇌 신부 · 이 신부와 마카오에 있던 리좌 신부 및 중국인 2명에게  보내는 편지와 조선지도 2매, 그리고 황해도 연안의 작은 섬들을 그린 지도를 내주면서 이것들을 그들에게 전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김 신부들은 모든 일이 잘된 것을 즐거워하면서 6월 1일에는 조기를 말리던 순위도로 돌아왔으나, 그 조기가 아직 마르지 않았으므로 며칠 동안 그곳에 머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는 사이에 6월 5일 낮에 조선 관리가 포졸을 거느리고 그곳에 달려와서 청나라 어선을 내쫓기 위하여 그 배를 빌려달라고 말하니, 김 신부는 양반 행세를 하면서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포졸들은 욕을 퍼붓고, 그 배 주인을 잡아가고, 저녁때에는 다시 와서 뱃사공 엄수(嚴秀)를 잡아다가 형문한 끝에 김 신부에 대하여 의심을 품게 되었다. 따라서 그날 밤에는 등산첨사(登山僉事) 정 기호(鄭基鎬)가 30여 명의 포졸을 거느리고 달려와서 김 신부를 잡아 묶으면서 발길로 차고, 몽둥이로 때리는 등 온갖 폭행을 가했다. 이러한 소란 속에 남은 뱃사람들은 종선(從船)을 타고 달아나 버렸다. 이에 따라 김 신부는 옹진(罋津) 옥(獄)으로 끌려가 온갖 형문(刑問)을 받고, 6월 9일에는 해주(海州) 옥으로 옮겨져, 황해도 감사 김 정집(金鼎集)의 신문(訊問)을 받고, 그의 신분과 행실을 사실대로 고백하였다. 한편 그보다 먼저 잡힌 뱃사람들의 입에서, 김 신부의 서울 집 주소와 주교 복사 이 재용 형제 및 다른 교우들의 주소와 청나라 어선에 편지를 전한 사실들이 밝혀졌으므로, 황해도 감사(監司)는 포졸을 청나라 어선에 보내어 그 편지들을 압수하여 오게 하고 곧 이러한 사실을 임금에게 글로 알렸다.


  그러므로 국왕 헌종(憲宗)은 6월14일 중신회의(重臣會議)를 열고 의논한 끝에, 김 대건 등 3인을 서울로 압송하게 하고 그 연루자를 잡아들이게 하였다. 이에 따라 김 대건 등은 6월 21일 서울 포도청으로 끌려와 이후 한 달 동안에 40여차의 형문을 받게 되고, 현 석문 등 20여 명의 교인이 잡히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프랑스 동양 함대 사령관 세실 제독이 8척의 군함을 거느리고, 8월 초순에 충청도 홍주(洪州) 외연도(外烟島)에 나타나, 앞서 기해년에 그 나라 성직자 3인을 죽인 책임을 묻는 서한을 섬 사람에게 주면서 이것을 영의정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러한 문책서를 받게 된 영의정 권 돈인(權敦仁)은 크게 놀라, 9월 5일에 국왕에게 김 대건 등을 군문 효수형(軍門梟首刑)에 처할 것을 아뢰어 9월 15일에 그것이 윤허되어, 다음날인 9월 16일(음력 7월 26일)에는 한강가의 새남터에서 그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어 9월 19일에는 현 석문이 같은 곳에서 목을 잘리고, 20일에는 임 성룡(林成龍)의 부친인 임 치백(林致百)이 교살(絞殺)됨을 비롯하여, 남 경문(南景文)등 6명의 남녀가 매를 맞아 순교하였다. 이 밖에 이번 박해로 잡히었다가 배교함으로써 석방된 교인은 이 승훈의 아들인 이 기원(李基元, 身達) 등 6명이었으나, 뱃사람인 임 성룡과 엄 수(嚴秀)의 처형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이러한 박해에서 본보기로 순교한 위의 김 대건 신부 이하 9명도 1925년 7월 5일에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복자위(福者位)에 올림을 받는 영광을 갖게 되었다.



-  [간추린 한국천주교회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