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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철종 시대의 교회 발전 본문

[♡ 자유와 평화 ♡]/한국천주교 歷史

14. 철종 시대의 교회 발전

자유인ebo 2011. 8. 17. 10:47

 

5. 철종 시대의 교회 발전                       

  

 

            

 

 

(1) 철종(哲宗)의 즉위와 세도의 바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기해교난은 헌종의 외조부이던 벽파 조 만영 일파가 세도를 잡고 있던 시파의 김 조순 일파를 타도하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이며, 그 결과 풍양 조씨의 세도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 조씨 일파의 세도는 헌종이 1849년 6월 6일에 23세의 나이로 아들이 없이 돌아가고 종친(宗親)이던 철종이 강화도(江華島)로부터 올라와 19세의 나이로 그 뒤를 잇게 됨으로써 10년 만에 끝나게 되었다.


  철종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신유교난 때에 목숨을 잃은 은언군(恩彦君, 正祖의 庶弟)과 그 부인 송(宋) 마리아의 손자로서, 헌종이 죽던 때의 왕실의 최고 책임자이던 순원 황후(純元王后, 純祖의 王妃) 김 대왕대비의 힘에 의하여 영립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순원 왕후는 어린 철종을 대신하여, 이후 3년 동안 정사를 맡아보며 1851년 9월 25일에는 그의 친족이던, 김 문근(金汶根, 1801~1863)의 딸을 철종의 왕비로 들여앉힘으로써 다시 안동 김씨의 세도 시대를 가져오게 했다.


  이에 앞서 그토록 죄 없는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하던 세도파의 풍양 조씨 일파는 헌종의 재위 시절에 있어서, 이미 몰락의 길을 밟고 있었다. 기해박해 때에 3대신직(三大臣職)을 독차지하고 있던 우의정 이 지연은 박해 도중인 1839년 10월에 함경도 명천(明川)으로 귀양 가서 이듬해에 죽었고, 박해를 일으킨 세도가 조 만영은 1843년부터 두 눈의 시력을 잃고 신음하다가, 병오교난이 일어난 1846년에 죽었다. 그리고 이 지연을 대신하여 우의정이 되었다가 헌종 말년에는 영의정이 되었던 조 인연(趙寅永, 萬永의 아우)도 철종이 즉위한 바로 그해 12월 6일에 연회석상에서 독약을 마시고 죽었으며, 그 조카로서 많은 교우를 처형시켰던 형조판서 조 병현(趙秉鉉)도 그해 7월에 전라도 나주(羅州) 목지도(牧智島)로 귀양 가서 다음날에 죽게 되었다.



(2) 김씨 세도파의 천주교 보호


   철종을 세우고 3년 동안 수렴정치를 시행함으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를 부활시킨 순원 왕후는 1851년 9월에 김 문근의 딸을 왕비로 들여앉힌 뒤, 12월 28일에 세도권(勢道權)을 김 문근에게 넘겨주고 정계에서 물러났으나, 그는 1857년 6월 4일까지 살아 있으면서 은연중 천주교를 보호하는 일에 힘썼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세도를 잡은 김 문근은 1852년 1월 13일에 금위대장(禁衛大將)이 된 일을 비롯하여 요직을 역임하고, 이후 철종이 1863년 12월 8일에 승하할 때까지 12년 동안 국사(國事)를 처리하였으므로, 철종 재위 시기에는 교회에 대한 박해가 거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순원 왕후는 철종을 세운 다음달인 7월 12일에는 일찍이 신유교난 때에 사형을 받은 철종의 조부모인 은언군(恩彦君) 내외의 죄를 씻어주고, 1856년 4월 6일에는 이 신규(李身逵, 基元)의 청원에 따라 교회를 창설한 그의 부친인 이 승훈(李承薰)의 죄를 씻어 주었다. 그뿐 아니라, 1862년 7월 18일에는 기해교난(己亥敎難) 때에 범 주교 등의 소재를 밀고한 배교자 김 순성(金順性)이 왕족 이 하전(李夏銓)을 임금으로 삼으려는 음모를 꾀하였다 하여, 그를 잡아 들여 그달 26일에 대역 무도죄(大逆無道罪)로 그 일당과 함께 참형(斬刑)에 처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철종조에 있어서 위정자들이 천주교에 대하여 관대한 정책을 쓰게 된 것은, 철종이 천주교 신자의 손자이었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그 재위 15년 동안에 뜻밖에도 서양 여러 나라의 배가 자그마치 15차에 걸쳐 조선 해안에 나타나 큰 위협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서양의 배는 프랑스 · 러시아 · 영국 · 미국들의 것이었는데, 그들 가운데 천주교와 관계가 깊었던 프랑스 · 러시아의 그것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851년 음력 3월 24일에는 23명의 승무원을 태운 프랑스 배 1척이 제주도의 모슬포(摹瑟浦)에 나타나 식량을 얻어가는 한편, 서양목(西洋木) · 유리병을 주고 간 일이 있었다. 이어 1852년 음력 7월 17일에도 프랑스 배 1척이 전라도 고군산(古群山) 열도(列島)에 나타나, 몇 해 전에 그곳에 남겨두고 간 물건을 살펴보겠다고 말하니, 부안 군수 김 도선(金道善)은 그러한 곳을 알 수 없다고 대답하여 돌려보냈다. 다시 1856년 음력 7월 13일에도 프랑스 군함 1척이 충청도 홍주의 장고도(長古島)에 나타나서 그 군인 수백명으로 하여금 무기를 들고 상륙하게 하여, 소 · 돼지 · 닭 · 채소 등을 빼앗고, 그 값으로 청나라 은전 1백 22원(元)을 치르고 떠나갔다.


  한편 일찍부터 동양 침략의 야심을 품고 있던 러시아의 빼가 동해안에 나타나 말썽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854년 음력 4월 27일에는 러시아 배가 함경도 덕원(德源) 및 영흥(永興) 해안에 나타나 조선 사람을 살상하였으므로, 정부는 덕원 부사(德源府使) 오 택선(吳宅善), 영흥 부사 임 백수(任百秀)를 잡아서 문초하였다. 이어 러시아는 먼저 청나라에 대하여 침략의 손을 뻗쳐, 1860년에는 영국 · 프랑스 군대가 북경을 점령하고 천진조약(天津條約)을 맺게 됨에 관여하여, 청나라로부터 연해주(沿海州) 지방을 빼앗고 바로 조선 국경 북방에다가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이라는 항구를 곧 그 해에 개설했다. 이에 앞서 일본도 1858년에 미국 · 영국 · 프랑스 · 러시아와 통상조약(通商條約)을 맺고 이러한 사실을 1860년 8월에 우리나라에 알려 왔다.



(3)교회의 발전


  철종조(哲宗朝)에 있어서는 위정자들이 천주교를 은연중 보호하여 주었으므로 교회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김 대건 신부는 고 주교 · 안 신부를 맞아들이고 이듬해에 순교하였으나, 다행히도 고 주교  · 안 신부는 바로 그해 10월에 세도가 조 만영이 급서한 때문인지 화(禍)를 면하여 전교에 힘쓰게 되었다. 그 결과 1848년에는 새로이 9백 46명의 영세자를 내고, 이듬해에도 7백 70명의 영세자를 얻게 되었다.


  이리하여 신자의 수가 해마다 늘어가고 있을 무렵에 철종이 즉위하고 안동 김씨의 세도가 재현하여 교인을 박해하는 일이 없게 되니, 많은 성직자들이 뒤를 이어 입국하여 복음 전파에 힘쓰게 되었다.


  이에 앞서 만주에서 조선 입국을 꾀하다가 실패한 메스트르 이(李) 신부와 최 양업 부제는 외방전교회 경리부가 옮겨 온 홍콩[香港]으로 1847년 1월에 돌아가서, 그해 8월에는 프랑스 군함을 타고 고군산(古群山) 신치도(薪峙島)까지 온 일이 있었으나, 또 입국에 실패하고 상해(上海)로 돌아갔다. 여기서 이들은 다시 중국 배를 타고, 1848년에 백령도까지 나와 보았으나 조선교우를 만나지 못하여 또 실패하였다.


  이에 다시 상해로 돌아간 최 양업 부제는 1849년 4월 19일에 그곳에서 남경 주교 마레스카(Maresca)의 집례로 신품(神品)을 받고, 5월에는 요동으로 건너와 만주 교구의 부주교이던 베르뇌(Berneux, 張敬一) 신부 밑에서 전교하면서 입국의 때를 기다렸다. 이러는 사이에 메스트르 이(李) 신부도 그해 11월에 요동으로 건너와 같이 입국하기를 바랐으나, 그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그곳에까지 가게 된 조선 교우들의 말을 좇아 최 양업 신부만이 그해 12월에 파수군이 없는 틈을 타서, 의주 성문을 지나 무사히 서울에 들어왔다. 조국을 떠난 후 13년 만에 귀국한 최 신부는 곧 전교에 나서서 6개월 동안에 5천리를 다니면서 3천 7백 15명의 교우를 만나 성사를 주고 7백 30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 결과 1850년의 교우 총수는 1만 1천여 명을 헤아리고, 안 신부와 최 신부는 이미 5명의 신학생을 얻어, 라틴어, 한문 등을 가르쳤다. 이 신학생들을 위하여 1856년에는 충청도 제천(堤川) 배론[舟論]에 신학교를 두었다.


  이 사이에 청나라에서 조선 입국의 길을 각 방면으로 찾고 있던, 메스트르 신부는 또 한 사람의 둥지를 얻게 되었는데, 그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1851년에 그곳으로 나온 외방전교회의 장수(Jansou, 楊) 신부어었다. 이 두 신부는 1852년 1월에, 청나라 배를 타고 조선 해안으로 나와 보았으나, 마중 나온 교우를 마나지 못하여 실패하고, 때마침 그곳에서 프랑스 배가 파선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조선교우 하나를 데리고, 상해로 돌아가고 이어 양(楊) 신부는 홍콩으로 옮겨갔다. 그러므로 메스트르 신부는 그 교우와 함께 다시 청나라 배를 타고, 그해 8월 중순에 상해를 떠나 고군산 열도를 거쳐, 그달 29일에 무사히 전라도 지방에 상륙하여 서울로 들어왔다.


  그런데 이에 앞서 고 주교는 과로로 병을 얻어 오래 동안 누워 있다가 매스트르 신부를 맞이한 뒤, 1853년 2월 3일 서울에서 45세로 서거하였으며,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입국을 꾀하다가 홍콩으로 돌아갔던 양(楊) 신부도 1854년 4월에 청나라 배를 타고, 입국의 길을 찾다가 다행히 3명의 신학생을 페낭(Penan) 섬으로 보내기 위하여 항해 중이던 조선 배를 만나, 몇 교우의 안내로 입국하여 서울로 들어왔으나, 뜻밖에도 며칠 후 중병을 얻어 6월 18일에 29세로 별세하였다. 이와 같이 철종조에 접어들어 조선 교회에서는 즐거운 일과 슬픈 일이 겹쳐 일어났으나, 입교자는 날로 늘어 1855년의 신자 총수는 1만 3천 6백 38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안 신부는 조용한 곳에 학당(學堂)을 마련하여 최 신부로 하여금 6명의 신학생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이 학당은 곧 제천의 배론[舟論]으로 옮겨졌다. 이러한 사이에, 만주 교구의 부주교이던 베르뇌 장(張) 신부는 고 주교의 뒤를 이어, 1854년 12월에 조선교구의 제4대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므로 장(張) 주교는 신병을 치료한 뒤, 이듬해 9월에 상해로 건너가 조선 입국의 준비를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뜻밖에도 같은 길을 찾고 있던 외방전교회의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 · 푸르티(Pourthie, 申) 신부를 만나게 되었다. 이에 이들 세 성직자는 청나라 배를 타고, 1856년 1월에 상해를 떠났으나, 풍랑으로 두 달 동안 산동(山東) 해역에서 보내다가, 청나라 어부의 안내로 항해를 계속하여 화해도 해역에 이르렀다. 여기서 이들은 4명의 조선교우를 만나 조선 배를 갈아타고 한강(漢江)으로 들어와 3월 26일에 무사히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리하여 조선 교회에서는 앞서 입국한 안 신부 · 최 신부 · 이 신부를 합쳐서 6명의 성직자가 있게 되었으므로, 장 주교는 그와 함께 입국한 신(申) 신부로 하여금 배론으로 가서 10여명의 신학생을 가르치게 하고 1857년 3월에는 안 신부를 부주교로 삼는 한편 서울에서 첫 번째의 성직자 회의를 열어 교회의 발전책을 꾀하며, 스스로 각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전교에 힘썼다. 그런데 3월 31일에는 다시 1명의 신부가 서울로 들어오게 되었으니, 그는 상해에서 조선 교우의 배를 만나 입국한 페롱(Feron, 權) 신부였다.


  그러나 그해 12월에는 이(李) 신부가 충청도 덕산(德山)에서 병으로 서거하고, 4년 후인 1861년 6월에는 경상도 지방을 돌고 있던 유일한 조선인 신부 최 양업이 전염병으로 또한 별세하였다. 그런데 1861년 4월 7일에는 새로이 4명의 신부가 서울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들은 청나라 배를 타고 지부(芝罘)를 떠나 백령도에서 조선 배를 갈아타고 한강을 거쳐 들어온 랑드르 (Landre, 洪) 신부 · 조안노(Joanno, 吳) 신부 · 리델(Ridel, 李)신부 · 칼레(Calais, 姜) 신부였다. 이어 1863년 6월 말일에는 다시 오메트르(Aumaitre, 吳) 신부가 서울로 들어왔는데, 그는 페낭에 유학하다가 귀국하게 된 2명의 조선 학생과 함께 백령도를 거쳐 쉽게 입국하였다.


  이와 같이 프랑스 성직자들이 쉽게 입국하여 전교하게 됨에 따라 천주교는 황해도 · 평안도 지방에까지 퍼져, 1863년에는 2만 명 내외의 신자를 갖게 되고, 프랑스로부터 많은 자금을 얻어다가 각종 사업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1858년부터는 서울에서 교회 서적을 목판으로 간행하기 시작하고, 주요 도읍에는 약국을 두어 병자를 구제하며, 43명의 고아를 수양하는 일을 일으켰는데, 특히 교회 서적은 철종이 승하한 1863년 말까지 8종 13책을 순 국문으로 간행하였다. 이에 따라 이름난 집안의 사람들도 속속 입교하게 되어 철종의 장인이던 김 문근의 가까운 친족 한명이 입교하게 되고, 왕족이던 이 하응(李昰應, 興宣大院君)의 집안에서도 유모 박(朴) 말다의 감화로 그 부인 민씨(閔氏)가 교리를 배우고 있었다. 또 승지(承旨) 남 종삼(南鍾三)도 세례를 받았고, 천주교를 ‘성교(聖敎)’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리하여 천주교가 철종 말년에 이르면서 더욱 크게 퍼져 감을 보고, 경주(慶洲) 사람 최 제우(催劑愚)는 천주교를 본뜨고, 유교 · 불교 · 도교의 줄거리를 뽑아서, 1860년부터 이른바 동학운동(東學運動)을 크게 일으키게 되었다. 그는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라는 주문(呪文)을 지어 외우게 함으로써 스스로 제세주(濟世主)라 일컫고, 천주교인 서학(西學)을 물리치고자 하였으나, 그도 1863년 11월에 잡히어 이듬해 3월 10일에 대구에서 참수형을 받게 되었다.

 

 

                                                         -  [간추린 한국천주교회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