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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와 평화 ♡]/한국천주교 歷史

12. 프랑스 성직자들의 전교 활동과 기해교난(己亥敎難)

자유인ebo 2011. 8. 20. 10:40

 

3. 프랑스 성직자들의 전교 활동과 기해교난(己亥敎難)

 

 

 

  


(1) 나(羅) 신부의 전교 활동


  프랑스 성직자로서 처음으로 조선 입국에 성공한 나(羅, Ma-ubant) 신부는 곧 조선말을 배우기 시작하고 찾아오는 교우들에게는 필담(筆談)으로 고해 성사(告解聖事)을 주며, 그해 부활절(4월) 이후에는 경기· 충청도의 교우마을 17곳을 찾아다니면서 성사(聖事)를 주고, 2백 13명의 성인에게 세례를 주며 6백 명 이상의 고명(告明, 고백)을 들었는데, 그해 연말의 교우 총 수는 6천 6백 40여명이었다. 이 교우들의 생활이란 거듭한 박해에 쫓기어 인적이 없는 산골짜기에 들어가 화전(火田)을 개간하고, 담배나 감자를 심어서 겨우 연명하고 있었으므로 겨울에도 옷조차 걸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에도 나 신부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 것은 그보다 2년 전에 들어온 중국인 유 방제 신부의 비행이었다.


  유 신부는 조선말을 배우지도 않고, 서울에만 쳐박혀 지방 교우를 찾아보지도 않을뿐더러 돈을 거두어 제 배만 채우며, 품행상에도 좋지 못한 소문이 떠돌아 교우들의 비난을 샀다. 나 신부는 처음에는 그를 몇 번이고 친절하게 타일러 보았으나, 효과가 없었으므로 그가 받은 조선 교구의 임시 관리자라는 직권으로 그에게 성무 집행 금지장(禁止狀)을 보냈다. 그래도 유 신부는 뉘우침이 없이 그 금지장을 불태워 버리고 교우들 앞에서 ‘나 신부의 물건을 빼앗고 그 집을 불지르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그러나 교우들 중에서 한 사람도 그 편에 드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는 할 수 없이 1836년 12월에 내쫓기어 고향인 산서성(山西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한편 나 신부는 조선에 들어오자, 곧 외방전교회의 기본 방침에 따라 토착인 성직자 양성에 착안하여 적당한 소년을 물색하는데 힘썼다. 그리하여 그는 서울 도착 후 10여 일인 2월 6일에는 경기도 과천(果川, 始興) 태생의 최 양업(催良業) 도마를 만나게 된 일을 비롯하여, 3월 7일에는 충청도 홍주(烘州) 태생의 최 방제(催方濟) 프란시스꼬 사베리오를, 7월 11일에는 충청도 내포(內浦) 태생의 김 대건(金大建) 안드레아를 만났다. 나 신부는 이 세 소년을 곧 그 밑에 두어 라틴어를 가르치는 한편, 성직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행을 쌓게 하여, 열심히 다루어 본 끝에 이들을 마카오(Macao)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때마침 유 방제 신부가 그해 12월 9일에 서울을 떠나 귀국하게 되었으므로, 몇 명의 교우들로 하여금 이들 세 소년도 함께 데리고 국경까지 전송하게 했다. 이리하여 겨울 15세 밖에 안되는 이 세 소년들은 만주· 몽고· 중국 대륙을 거쳐 7개월 뒤인 1837년 6월 6일에 무사히 포르투칼 영토인 마카오섬에 도착하여 로마 교황청 포교성성(布敎成省) 동양 경리부(東洋經理部)에서 학업을 닦게 되었는데, 이들은 조선 왕조 때 해외로 보내진 최초의 유학생이며, 우리나라 역사상에서 처음으로 서양 학술을 배우게 된 선각자들이었다.



(2) 정(鄭) 신부· 범(范) 주교의 전교 활동


  나 신부를 맞아들인 조선 교우들은 그의 지도에 따라 유 신부를 국경까지 전송한 뒤, 그동안 중국 대륙과 만주를 헤매고 있던 정(鄭. Chastan) 신부를 1836년 12월 28일 봉황성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때 조선 교우들이 그에게 ‘신부님은 가난한 짐꾼 모양으로 짐을 걸머지고 걸으실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그는 ‘걱정 마시오. 나도 그리 부자는 아니오’라고 선뜻 대답했다. 이리하여 그도 방갓의 상주 옷차림을 하고, 12월 31일 밤중에 길을 떠나 압록강의 얼음을 타고 건너서 의주(義州) 성문을 피하여 다른 샛길로 국경을 숨어 넘어서 1837년 1월 15일에는 무사히 서울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나 신부의 나이와 같이 34세였다.


  정(鄭) 신부가 도착하자 나 신부는 서울로부터 1백 50리 되는 양근(楊根)에 있는 교우 집(정 하상의 친척집)으로 가서 한달 동안 조선말을 더욱 익혔다. 이 사이에 정 신부는 서울에서 조선말을 배우거나 고해 성사(告解聖事)를 주거나 하면서 성무(聖務)를 익히다가 양근으로 가서 나 신부와 함께 부활절을 지내고 수일 뒤에는 전교를 위해 각도의 교우를 찾아보는 길에 올랐다. 이들은 거추장스러운 상복을 입고, 험준한 산길을 헤매며, 바람과 연기가 스며드는 흙바닥 방에서 자고, 감자밥과 소금에 절인 야채만을 먹으며, 밤새도록 고명(告明)을 들어야 했다.


  이런 고된 생활을 몇 달 동안 거듭하는 사이에, 나 신부는 그해 7월 중순 지방 전교 도중에 열병을 얻어 위독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정 신부는 나 신부를 곧 서울로 모셔다가 종부성사(終符聖事)를 주기까지 했는데, 다행히 나 신부의 병환은 차차 낫기 시작하여 석 달 뒤에는 다시 힘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전교 활동의 결과로 1837년 한 해 동안에 1천 2백 37명의 남녀에게 서례를 주게 되어, 그해의 교우 총수는 서울· 경기· 강원· 전라 · 충청도에 걸쳐 모두 6천 9백 95명 이었다.


  이와 같이 정 · 나 두 신부가 조선 전교에 힘쓰고 있는 사이에, 로마 교황청에서는 청나라 사천성(四川省)에서 전교 중이던 외방전교회의 앵베르 · 범(Imbert, 范世亨) 신부를 조선 교구의 2대 주교(主敎)로 임명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1837년 5월 14일에 사천 교구장(四川敎區長) 퐁타나(Fontana) 주교의 집전(軌典)으로 성성식(成聖式)을 갖고, 곧 조선으로 향하여 길을 떠났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그리하여 범(范) 주교는 중국대륙을 횡단하여 그해 12월 16일에는 봉황성의 변문(邊門)에 이르러 동지사를 따라 그곳에 온 조선교우 5명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교우 중 3명은 주교를 맞아들일 사명을 띠고 있었다.


  여기서 주교는 또한 상복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고 12월 17일 밤에 조선 교우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변문을 떠나 압록강의 얼음을 타고 건너 의주성(義州城) 수문(水門)을 숨어 넘어서 13일 뒤인 1838년 1월 1일에는 무사히 서울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로서 조선 교구는 그 이름과 같이 비로소 조직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는 조선교회 창설 후 54년, 조선교구 설정 후 7년 만의 일이었다.


  서울에 들어온 범 주교는 첫날부터 나 신부와 손을 잡고 전교에 힘썼으나, 때마침 남쪽 지방을 순회하고 있던 정 신부는 그해 5월에야 서울로 돌아와 주교를 뵙게 되었다. 먼저 석 달 동안 조선말을 배우고, 교우들의 고명(告明)을 들었다. 특히 그해 부활절 때에는 사방으로부터 교우들이 모여들어 주교는 3백 명이나 되는 교우들의 고명을 듣고, 그들에게 성체(聖體) 배령(拜領)의 영광을 주었다. 그리고 5월에는 지방을 돌고 있던 두 신부가 서울로 돌아와서 주교를 도와 1천 명이 넘는 서울의 교우를 다스리고 11월까지에는 세 성직자의 손으로 1천 9백 94명의 남녀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 결과 1839년 초에는 전국의 교우 총수가 9천여 명을 헤아리게 되고 이름난 사람도 입교(入敎)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교우의 수가 갑자기 늘어 감을 본 범 주교는 또한 토착인 성직자 양성에 착안하여 새로이 3명의 소년을 마카오에 보내고자 그 적격자를 물색하는 한편, 월남(越南) 지방의 베리트(Beryte) 주교가 한 일을 본 따서 장년 학생을 가르쳐 짧은 기간 안에 신부로 되게 하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그 결과 1838년에는 4명의 장년 신학생(神學生)을 얻게 되었는데, 그들은 그때까지 독신으로 지내면서 성직자를 맞아들이기 위하여 열 두 번이나 북경에 왕래하고 스스로 그것이 되기를 바랐던 42세의 정 하상 바오로와 일찍이 조선교회를 창설한 이 승훈의 친손(親孫)이던 29세의 홀아비 이 재용(李在容, 在誼) 도마와 마카오에 유학중이던 최(崔) 프란치스꼬의 맏형인 20세의 최 베드로외 26세의 홀아비<1839년에 순교한 복자 이 문우(李文祐) 요안인 듯함> 등이었다. 범 주교는 이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고 사천성의 하멜(Hamel) 신부가 지은 한문책으로 신학(神學)을 가르쳐 정 하상과 이 문우는 몇 해 안에 신품(神品)을 받게 될 것 같았으나 이듬해에 뜻밖에도 모진 기해(己亥) 박해가 일어나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3) 기해교난(1839)의 경위


  기해교난(己亥敎難)은 신유교난 뒤에 일어난 두 번째의 대 박해로써 조선왕조 24대 왕 헌종(憲宗) 5년(1839)에 일어났다. 이 교난의 원인도 신유교난의 그것과 마찬가지여서 표면적으로는 천주교를 서학(邪學)이라고 보아 배척함에 있었으나, 내면적으로는 세도를 잡고 있던 시파(時派)의 안동 김씨를 물리치고 그것을 잡으려는 벽파(僻派)의 풍양 조씨가 일으킨 일이었다.


  이미 말한바와 같이 김 조순(金租淳)은 1802년에 그의 딸을 순조(純祖)의 왕비[純元王后]로 삼음으로써 세도를 잡고, 이후 38년 동안 그 일족으로 하여금 정권을 좌우하게 하였는데, 그는 천주교를 동정하던 시파의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1818년에 정 약용의 귀양살이를 풀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순조의 아드님이던 효명세자(孝明世子)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하여 그의 벼슬까지도 돌려 줄 정도로 천주교 신자를  동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 조순은 1832년 4월에 죽고, 세도권을 그의 아들인 김 유근(金遺根, 1785·1840)에게 물려주게 되었으며, 국왕이자 그의 사위이던 순조(純祖)도 1834년 11월에 돌아가고, 그 자리를 손자이며 효명 세자의 아들이던 8세의 헌종(憲宗)에게 물려주었다.


  이와 같이 어린 헌종이 즉위함에, 왕실의 최고 지위자였던 그의 조모이며 김 조순의 딸인 순원 왕후가 이후 6년 동안 정사를 대신 맡아보는 수렴청정(垂簾聽政)을 베풀게 되었다. 따라서 김 조순의 딸인 순원 왕후도 죄 없는 천주교 신자를 박해하기를 싫어하였고 그 오빠이던 세도가 김 유근은 1836년부터 병을 얻어서 말조차 못하다가 당상(堂上: 정 3품 이상의 벼슬아치) 역관(譯官)의 교우인 유 진길(劉進吉)의 권유로 1839년 15월에 세례까지 받게 되었다. 사실상 조선교구 설정 이후 3명의 프랑스 성직자들이 입국하여 지방에까지 다니면서 전교하게 된 것도 이러한 세도가 안동 김씨 일파의 관대한 정책 때문이었다.


  이러한 안동김씨 일파의 천주교에 대한 관대정책을 트집으로 잡아, 천주교를 배척하던 조 만영(趙萬永, 1776~1846) 일파는 마침내 기해교난(己亥敎難)을 일으킴으로써 세도를 잡게 되었다. 이에 앞서 조 만영은 1819년 10월에 그의 딸을 순조의 아들인 효명 세자의 부인으로 들여앉힘으로써 1827년 1월에는 왕궁을 지키는 총 책임을 지닌 어영대장(御營大將)이 되어, 차차 그 세력을 확장하는 한편 안동 김씨 세력과 대항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그의 외손(外孫)이던 현종이 1834년 10월에 죽은 순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후 본격화하여, 석 달 뒤인 1835년 1월에는 그의 아우인 조 인영(趙寅永, 1782~1850)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삼게 함으로써 그 일파의 인물을 등용하게 하고, 이듬해 9월에는 의금부 판서(義禁府判書)의 자리에 있던 조 인영으로 하여금 4명의 천주교 신자를 잡아들이게 함으로써 천주교를 동정하던 세도가의 안동 김씨 일파를 괴롭히게 했다.


  때마침 세도를 잡고 있던 김 유근이 병으로 누워 있었으므로, 조 만영은 더욱 임금과 가까이하여 1838년 7월에는 국왕의 교서를 작성하는 총책임을 맡은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이 되어, 당시의 유일한 대신이던 우의정(右議政) 이 지연(李止淵)과 손을 잡고서 역관(譯官) · 잡인(雜人)들이 북경에 들어가 물건을 사오는 일을 엄금하게 하고, 그해 12월 1일에는 교회 물건을 만들고 있던 교인 권 득인(權得仁) 베드로를 잡아들임으로써 박해의 실마리를 열게 되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교회 박해는 구정(舊正)을 전후하여 시작되고 있었는데, 이것은 구정을 가족과 함께 지내기 위하여 모이게 된 교인들을 단번에 잡아들이고자 함에서 취한 술책이었다.


  그리하여 기해년(1839) 2월 20일에는 잡아들인 교인들을 엄벌하기 위하여 조 만영의 조카이던 조 병현(趙秉鉉)을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삼고, 곧 경향 각지에서 많은 교우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3월 초에는 궁녀이던 박 희순(朴喜順)등 수십 명이 잡힘을 비롯하여, 6월에는 정 하상(丁夏祥) · 유 진길(劉進吉) 등이 7월에는 범(范) 주교 · 정(鄭) 신부 · 나(羅) 신부 등이 잡혀가게 되었다. 이때 정부에서는 ‘5가작통법’을 써서 교인들을 남김없이 잡아들이게 하였으므로 경향 각지의 옥이 교인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 교인에 대한 신문(訊問)이 끝나는 대로 사형이 진행되어, 4월 12일에는 권 득인(權得仁) · 이 광헌(李光獻) · 남 명혁(南明赫), 궁녀 박 희순(朴喜順)등 9명이 서울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斬首)된 것을 비롯하여, 전라도 교인 김 대권(金大權) · 이 태권(李太權) · 이 일언(李日彦) · 신 대보(申大輔) · 정 태봉(鄭太奉), 경상도 교인 김 사건(金思健) · 박 사의(朴士儀) · 이 재행(李在行) 등도 죽이게 하고, 6월 10일에는 서울 서소문 밖에서 이 광열(李光烈) 등 8명을, 7월 26일에는 같은 곳에서 박 후재(朴厚載) 등 6명을, 8월 14일에는 한강(漢江)가의 새남터에서 범 주교 · 정 신부 · 나 신부를, 8월 15일 추석날에는 서소문 밖에서 유 진길 · 정 하상을, 8월 19일에는 서소문 밖에서 조 신철(趙信喆) · 남 이관(南履灌) 등 9명을, 8월 27일에는 서울 당고개(龍山)에서 박 종원(朴宗源) 등 7명을, 11월 24일에는 서소문 밖에서 최 창흡(崔昌洽) · 정 정혜(丁情惠) 등 7명을, 12월 28일에는 당고개에서 홍 영주(洪永周) · 이 문우(李文祐) 등 3명을 죽이게 되었다.


  이러한 박해가 진행되는 가운데 조 만영은 실제로 세도권을 잡고, 10월 18일에는 그의 아우인 조 인영이 지은《척사윤음(斥邪綸音)》을 서울과 8도에 반포하게 했다. 그리고 조 인영은 10월 21일에 우의정으로서 좌의정 · 영의정을 겸하고 있던 독상(獨相) 이 지연(李止淵)을 내쫓고 그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풍양 조씨 세도 시대를 가져오게 했다.


  따라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이후 1841년까지 계속하게 되었는데, 이 사이에 안동 김씨의 세도가이던 김 유근이 1840년 12월 17일에 죽으니, 그때까지 형식적으로 임금을 대신하여 정사를 맡아 보던 그 누이 순원 왕후도 그해 12월 25일에 정사를 임금 헌종에게 돌려주었다. 그리하여 풍양 조씨의 세도는 헌종이 돌아간 1849년까지 10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번 박해로 잡힌 교우 수는 기록상 1백 48명이며, 그중 69명이 참수형을 받고, 1명이 옥사하였으며, 48명이 석방되었으나, 이밖에 개인감정과 지방관의 독단 등으로 목숨을 잃은 교우들도 많았다. 그러므로 달레(Dellet)의《한국교회사(韓國敎會史)》에는 기해박해로 순교한 교우 수를 2백여 명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박해가 일어나자 범(范) 주교는 전교회장 현 석문(玄錫文) 가롤로에게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대는 살아서 순교자의 행적을 만들도록 하라’고 부탁하였으므로, 그는 아내 · 누님 · 딸이 순교하였음을 알면서도 거지 행세를 하면서 이후 3년 동안에 《기해일기(己亥日記)》라는 책을 지었다. 이 《기해일기》의 총론에는 서울에서만 무참히 치명(致命)한 교우가 54명이고, 그 밖에 옥사한 교우가 60여 명이라고 적고 있어 모두 1백 10여 명이 순교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본론에는 78명의행적만이 실려 있다.


  이러한 《기해일기》의 목격자담과 김 대건 등이 순교한 1846년 그것 중에서 가장 훌륭하게 신앙을 지킨 79명을 뽑아서, 로마 교황청에서는 1925년 7월 5일에 그들을 복자위(福者位)에 올리는 시복식(諡福式)을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하게 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기해년 전후의 순교자 70명이 들어 있었다. 이 70명 가운데 가장 큰 일을 이룩한 순교자는 정 하상이었다.


  그는 기해교난이 일어나자 잡힐 것을 짐작하고, 미리 《상재상서(上宰相書)》라는 글을 지어, 이것을 그때의 유일한 재상이던 우의정 이 재연에게 올렸다. 그는 이 글에서 천주교가 조금도 그릇된 교(敎)가 아님을 역사적으로 변호하고, 주자학의 허례허식을 논박하였는데, 이 글은 1887년에 홍콩(香港)에서 훌륭한 책으로 간행되어, 중국 전교에도 사용된 명서 이었다.



-  [간추린 한국천주교회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