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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의 쉼터

신리성지 2. (충남 합덕) 본문

[♡ 자유와 평화 ♡]/한국천주교 聖地

신리성지 2. (충남 합덕)

자유인ebo 2007. 12. 30. 14:23

 

신리성지(충남 합덕.2007.10.28.) 

신리성지는 조선천주교회의 요람이다.

 

  충청도 내포지방의 중심부에 자리한 신리는 한국천주교회 초기부터 끊임없이 예비자, 신자, 순교자가 배출되었다. 성지 내 초가집은 손자선(손도마, 1866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 성인의 생가이다. 동시에  조선교구 제 5대 교구장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안주교, 1866 오천 갈매못에서 순교)의 주교관이자 조선 교구청이었다. 안주교는 이곳에서 끊임없이 찾아드는 교우들에게 성사를 베풀고 신앙 진리를 가르치는 한편, 각지에서 활동하는 선교사제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리나 초창기의 한글 교리서 저술과 간행, 조선교회의 상황과 순교사적들을 수집 정리하여 파리외방전교회로 보내는 일도 여기서 이루어졌다. 이 자료들이 훗날 한국천주교회사와 순교사의 토대가 된 이른바 <다블뤼 비망기>이다.
 

 

손자선 토마 한국성인(THOMAS SON ,28세로 1866년 5월 18일 교수)

 

    손 자선 토마는 덕산군 홍주면 신리마을 거더리에 있던 부유한 농가에 서 태어났는데 3대째 내려오는 열심한 신자 집안이었다. 형과 아버지는 1868년에 순교하였고 그의 당숙, 손니고나오도 순교하였으니 그 집안의 신심은 무척이나 열렬하였다. 본래 부지런하면서도 성품이 침착한 그는 나무랄데 없이 신심이 두텁고 명성이 높았으며 자기 부인과 함께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한번도 거르는 일이 없을 만큼 굳은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의 나이 28세가 되던 해인 1866년 다시 박해가 일어났다. 포졸들이 손토마가 살고있는 거더리 마을에 들어와 신자 집을 샅샅이 뒤져 많은 물건을 앗아 가고는 "손씨 집안에서 누구이든 사람을 보내 몰수된 물건을 찾아가라"는 편지를보냈다. 이 편지를 받고 용감한 손토마가 자진하여 덕산 관가에 나가서 찾아온 사유를 밝혔다.

 

이 때 원님이 그에게 천주교 신봉여하를 묻게 되자 그는 자기가 천주교 신자임을 말하고 "나는 솔직히 죽는 것을 몹시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죽는 것보다 몇 천배 더 무서워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나의 주님이시요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배반하는 일입니다" 라고 하면서 배교를 기어이 거부하였다.

 

 

 <성 다블뤼-성 손자선 기념성당 외부 전경으로 현대식 건축양식으로 건립하여 2006년 5월에 축성되었다.>

 

이리하여 손토마는 즉석에서 체포되었는데 관가에서 갖은 고문으로 그의 의지를 꺽으려고 애썼으나 모두 허사였고 곤장을 치다못해 다리를 묶어 거꾸로 매달았다. 그리고는 토마의 입에 여러가지 쓰레기를 쏟아 부으면서 그때마다 "야, 좋지"라고 놀려대었다. 손토마가 "좋습니다" 라고 응수하자 "그래 무엇이 좋단 말아냐?"라고 되물었다.


이 때 손토마는 "나는 오늘까지 며칠을 두고 세수를 못했었는데 여러분들이 내 얼굴을 씻어주고 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피를 흘리게 한 죄인에게는 이같이 좋은 일이 없으며 또한 목이 몹시 탔었느데 쓸개와 식초대신 이런 것들을 내 입에 넣어주니 나는 마치 내가 범한 죄들을 마셔버리는 듯하여 무척 즐겁소"하 고 대답하였다.


또 한 번은 손토마가 맥박이 멈출 정도로 고통이 심함을 보고 감옥에 함께 있던 동료들이 몹시 측은히 여겨 자기들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써가며 손토마를 구출해 주었다. 그리고는 치료를 해주지 못해 안타까와 하고 있을 때 손토마는 "이러지들 마십시오. 예수님과 마리아께서 오셔서 내 상처를 어루만져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는데 실제 그 후 며칠이 지나자 그의 상처들은 기적같이 깨끗하게 아물어 붙었다.

 

 

 <성 다블뤼- 성 손자선 기념성당 내부로 대칭과 비율이 적절히 조화되어 밝고 편안한 느낌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인도해 준다.>

 

그 후 덕산 원님은 손토마를 해미로 압송하였는데 해미에서는 더 심한 형벌이 가해졌다. 두 무릎 사이에 몽둥이를 끼워 양쪽에서 틀자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졌다. 이 참혹한 형벌에도 태연히 버티는 그의 모습이 더욱 가증스러워 더 고생을 시키기 위해서 공주로 압송하였다.

 

공주에서 원님은 특수한 수단을 생각하여 "네가 배교하지 않는다는 증표로써 이빨로 손 살점을 물어뜯어 보여라"고 하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기 이빨로 손등을 물어뜯어 피가 흐르게 하였다. 관헌은 배교한다는 고백을 받기 위해 세 번씩이나 곤장을 쳤으나 변함이 없어 결국 감옥에서 목을 졸라 죽였다.

 

처형된지 사흘 후에 유해를 거두러 갔으나 시체가 많아 찾지 못하다가 물어뜯은 손등을 보고 가려내니 목을 졸라 죽인 흔적이 분명했고 그 때까지 그의 시체는 조금도 썩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악취도 전혀 없었다고 전해진다. 

 

 <성 손자선 토마스의 생가로 이곳에서 성 다블뤼 안 주교님께서 머무시면서 선교활동을 지휘하고, 조선

순교사 비망기를 기록했다.따라서 이 집은 다블뤼 주교의 주교관이며, 조선 제5대 교구청이기도 했다. >

 

 “천주강생 1815년”에 지어진 생가는 박해시대 이래로 여러 차례 소유주가 바뀌었고 그 구조 또한 개조를 거듭해 왔다. 1964년부터는 강당의 형태로 개축되어 공소로 사용되었으나 본당 중심의 사목이 강화되면서 방치되기에 이른다. 이후 성지개발이 본격화 되고 한국교회사연구소로부터 생가의 옛 사진이 발견됨에 따라 원형 복원을 위한 본격적인 조사가 전문가들에 의해 진행되었고, 2004년 마침내 손 성인의 생가이자 안주교께서 사시던 주교관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다블뤼 안토니오 안주교 03.30 한국성인  (安敦伊 ANTONIO DABLEUX, 48세로 1866년 3월 30일 군문효수)

 

 

안토니오 다블뤼 안주교는 1818 년 3월 16일 프랑스 아미앵이란 고장에서 모범신자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34 년 성슐삐스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841년 11월, 숙원이 이루어져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1843년에 외방 선교회에 입회하였다. 1844년 가을 마카오에 도착하여 생활하던 그는 1845년 조선에 나가라는 명을 받았다. 그는 상해로 와서 조선에 부임하는 페레올 고주교와 합류하였다. 김대건 신부의 서품식에 참여하고 김신부의 안내로 항해가 시작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1845년 10월 12일 강경포에 상륙하여 순교하는 날까지 20여년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상복을 입고 방립을 쓰고 버선을 신고 짚신을 신었다. 그러한 복장으로 다녀야 했으므로 불편한 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안신부는 "이 지방에 와서 받는 고통은 많으나 세상은 잠깐인 즉 죽은 다음 순교의 화관이 있으면 또한 우리가 받은 괴로움의 갚음이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성다블뤼주교관이었던 손자선성인의 생가. 복원된 생가(주교관)의 기둥과 뼈대는 옛날 그대로이다.

대들보, 서까래, 주춧돌, 문지방 디딤돌, 집 지은 연도를 적은 상량문 등 상당 부분의 실물들이 그대로

사용되어 성인들의 숨결과 손 때가 그대로 묻어나 있다.>                                                           

 

 

안신부는 1846년, 선교활동을 시작하여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그 때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 였다. "교우의 수가 적은 공소가 많아 하루밖에 머물지 못하겠으므로 교우촌에 들어서자마자 고백을 듣고 어린이와 어른에게 세례와 보례의 많은 예절을 마치면 자연 밤은 깊어진다. 몸은 괴로우나 경본을 보고 성모에게 의탁하려 매괴신공 한 꿰미를 외울 때 간간 졸리니 이는 인력이 부족한 탓이니 자애로운 성모는 용서하실 것이다."


이처럼 바쁜 생활을 하고 있을때 병오박해가 일어났다. 사정이 급박하여 다른 곳으로 피해갔으나 습기가 많고 불결한 방에 숨어 살아야만 했던 안신부는 병이 들어 몸이 쇠약해졌다. 그러나 계속 선교활 동을 하여 생명의 위험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얼마동안 쉬면서도 신학생을 모아 라틴어를 가르치고 한불중사전(韓佛中辭典)을 편찬하였다. 안주교는 일하기 가장 어려운 지방을 자원하여 보살폈으며 귀중한 출판사업에 착수하는 등 기적적인 그의 활약은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였으니, 이는 오로지 하느님께 대한 그의 깊은 사랑의 힘이었고, 또 온갖 곤경과 질병을 잊으리만큼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힘입었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1866년 2 월 23일 장주교가 순교한 후 그는 제 5대 교구장으로 일하였다. 1866년 3월 1 1일, 충청도 당진군 합덕읍 신리에서 포졸들에 의해 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선고를 받았고 사형장은 나라 사정에 의해 충청도 보령 땅에 있는 갈매못으로 결정되었다. 이리하여 안주교와 다른 신부들은 고문으로 인해 상한 다리를 질질 끌고 사형장으로 압송되었는데 안주교는 성금요일에 죽게 해달라고 간곡히 기도한 바 있다. 사형 전 절차를 마치자 희광이가 목을 내려치니 목이 반쯤 잘려 바르르 떨며 피를 흘리고 있는 주교를 버려둔 채 목을 자르는 대가로 받는 품삯을 더 올려 달라고 흥정하다가 더 올려주자 다시 칼을 내리쳐 목을 잘랐다. 이어 법에 따라 안주교의 머리를  높이 매달았다.

- http://www.sinri.or.kr/-

  

  <당시의 생활상을 비춰주는 도구들>

 

신리성지는 순교자들이 태어난 집과 마을, 거닐던 길 그리고 경작하던 농토도 그 지명들과 함께 그대로 유지되어 순교자들의 자취를 생생히 느끼게 한다. 특히 손자선 성인의 생가와 함께 안주교와 오신부, 민신부 그리고 황석두 루가 등 성인 네 분이 붙잡힌 ‘거더리’의 집(신리 99번지)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그 역사적 가치를 더해 준다.

  

 

 <신리성지에 관하여 설명하는 신부님>

 

신리성지는 이처럼 순교자들의 고향인 동시에 순교자들의 안식처이기도 하다. 손자선 성인의 순교 이후 그 시신이 신리의 선산에 묻혔다. 그리고 이름이 알려져 있는 33분의 순교자 외에도 성지 인근에는 ‘32기의 목이 없는 무명 순교자 묘’와 ‘14기의 손씨 가족 무명 순교자묘’, 그리고 해미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지는 묘 3기가 있다. 이 묘들은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연차적으로 발굴되어 대전리 공동묘지에 초라하게 보존되어 있다.

 <주교관으로 사용되었던 손자선생가 내부>

 

 

 

 <주교관으로 사용되었던 손자선생가 내부>

 

 

 

 <부엌내부 모습>

 

 

 

 <기둥의 위는 처음 지어질때(1815년) 것이고 아래는 보수하면서 새로 붙인 것이다.>

 

 

 <천주교 거더리 사적지 표지석 옆에서 거더리에관해 설명하는 신리성지 신부님>

 

 거더리는 성 다블뤼-성 손자선 기념성당에서 약 1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고, 이곳으로 예전에는 배가 드나들었으며, 이곳을 통해서 다블뤼 주교님을 비롯하여 성직자들의 왕래가 있었고 박해를 피해 이곳에서 숨어지내기도 하였는데, '거더리'라는 지명은 이곳으로 오는 길이 비가오면 발이 진흙이라 빠지는 등... 험한 길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순례자들에게 거더리의 역사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는 신부님, 다블뤼 안주교, 오매트르 오신부, 위애 민신부,황석두 루가 등 네 성인이 순교를 위해 스스로 붙잡히신 곳이라고 말씀하신다.

  

 

<다불류안 주교님이 붙잡힐 때 거처하신 집>

 

 

 

 <주교님께서 출입하시던 방 문>

 

 

사랑의 불지르며

  - 순교자 성월에 부쳐 -  박 송 죽



맨살 바람으로 울고 있네.
지천으로 솟아 오르는
찢어진 가슴 뜨거운 사랑
실핏줄 떨리는 목간악기의
생명의 울림으로 울고 있네.

오직 한 목숨 한 생애
초개와 같이 죽어야 살으리라는
영원한 생명의 법칙.

피묻은 십자가 부여잡고
불지르며 불지르며
사랑에 불지르며

믿음의 절대음표인
우주적인 사랑의 고통으로
하늘과 땅을 가교하여
닫혀진 생명의 문 열고
주님 제단에 초석이 되어
일편단심 온전히 제물 봉헌되신
103위 순교 선열들.

그 넋 피눈물로 흩뿌려져
뜨거운 맥박 푸르게 숨쉬는 9월이 오면
절박한 sos의 구원 요청으로
목이타는 이 난기류의 시대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

구원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를 심고 그리스도의 복음전하는
103위 순교 선열들의 후예답게
불지르며 불지르며
온 천지 불지르며

첫눈 뜬 새벽 같은 신선한 왕국,
그리스도의 왕국 건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리
우리가 되어야 하리.

 

 

  

<약도> 


● 찾아가는 길 (네비게이션은 신촌초등학교)

 

1) 서해안 고속도로 이용시

 

당진 톨게이트로 나와서 합덕 삽교호 방면으로 우회전 합니다.
아산 합덕 방면 38번 국도를 탑니다.
예산, 합덕 방면 32번 국도로 갈아탑니다.
④ 합덕으로 진입하기 전에 합우초등학교를 지나 예산 방면(32번 국도)으로 가다 보면

    합덕성당과 서야중고교가 나옵니다.
⑤ 서야 중고교를 지나자마자 신리성지 5Km 표지판이 있습니다. 이 표지판에서 고덕방

    면으로 우회전 합니다.
⑥ 약 4Km 진행후 신리성지 1Km 표지판 있는 곳에서 좌회전 하셔서 들어오시면 됩니

    다.

 

 

2) 경부 고속도로 이용시

 

목천 톨게이트로 나와서 천안 방면(21번 국도)으로 좌회전 합니다.
② 아산을 들어가기 전에 예산.홍성 방향 자동차 전용도로 진입 합니다.
③ 순천향 대학교를 끼고 좌회전(도고,예산 방면)하여 신례원까지 갑니다.
④ 신례원 진입 직전에 외곽도로를 타고 다시 당진 방면 32번 국도로 갈아탑니다.
⑤ 여사울 성지를 지나 다리를 건너서 약 1Km 정도 진행합니다. 도로 좌측에 신리 성지

    4Km 표지판이 보입니다. 표지판 직전에서 좌회전합니다.

 

 

 => 1. 신리 무명 순교자묘(당진군 합덕읍)   신리성지 상세내용 => http://www.sinri.or.kr/

   

-  2007. 10. 28. 신리성지에서, 자유인eb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