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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암성지(경기 퇴촌, 2008. 2. 13.) 본문

[♡ 자유와 평화 ♡]/한국천주교 聖地

천진암성지(경기 퇴촌, 2008. 2. 13.)

자유인ebo 2008. 2. 18. 16:14

천진암성지

(韓國天主敎發祥地 天眞菴聖地 / 위치: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500)  

 

전 세계 모든 나라의 천주교회는 대부분 다른 나라 선교사들에 의하여 전파되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천주교회는 선교사가 아닌 우리 선비들이 학문을 통하여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천주교 발상지라는 말은 우리 나라에만 있다고 할 수 있다.


1779년에 이벽, 권일신, 정약종, 권철신, 이승훈 등 당시 저명한 학자들이 학문적 지식의 수준에 머물러있던 천학(天學)을 천진암에서 진리탐구를 위한 강학회(講學會)를 자발적으로 열어 6~7년간의 강학회를 통하여 종교적인 신앙의 차원인 천주교회로 발전시켰으며, 현제 이곳에 한민족 100년 계획 천진암대성당 건립공사가 진행중이다.

 

 

<입구 주차장 성모상> 

 

천진암 성지는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께서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우신,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한국천주교 발상지일뿐더러, 음력 주일 제정과 실천으로 국내에서는 최초로 근로자들의 정기적인 휴식을 겸한 경신예절과 사회계급타파, 남녀평등 실천 등이 교회창립과 더불어 시작되어, 훗날 민족개화와 조국근대화 및 조선 사회개혁 운동의 싹이 트기 시작한, 온 겨레의 정신문화 성지이기도 하다.

 

 

 <성지 안내도>

 

천진암은 본래 단군영정 천진을 모시고 산제사, 당산제, 산신제 등을 올리던 천진각 혹은 천진당이라는 작은 초가 당집이 오랜 세월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며, 훗날 천진암이 되어, 1779년을 전후하여 폐찰이 되었었으니, 정약용 선생의 글에, "천진암은 다 허물어져 옛 모습이 하나도 없다" 하였고, 1797년 정사년 당시 홍경모의 남한지에서는, "천진암은 오래된 헌 절인데, 종이를 만드는 곳으로 쓰이다가 이제는 사옹원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함으로써, 사찰로서의 기능을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성 다블뤼 주교는 1850년 경, 젊은 선비들과 함께 이벽 성조께서 강학을 하던 곳은 쓰지 않는 폐찰이었다고 하였다.

 

 

 <천진암 성지에는 20여 만평 성역내에 5만여 평 내외의 대성당터와 광장조성, 8천여평(좌석수 3만여석)의 천진암대성당>

 

 

 

 1779년 당시 이벽 성조 26세, 정약용 17세, 정약종 19세, 정약전 21세, 이승훈 22세, 이총억 15세, 권철신 44세, 등 주로 10代와 20대 젊은이들이 모여서 그 당시 아주 생소하고 이상한 천주교 책을 읽고 실천하는 일을 일반 유교 서당에서나 정상적인 사찰에서, 또는 일반 가정에서는 하기 어려우므로, 다블뤼 주교의 기록대로, 폐찰이 된 천진암에서는 여럿이 모여 함께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천주교 진리를 탐구하고 실천할 수 있었으니, 천진암은 바로 유불천이 합류한 곳이고, 조선 천주교회가 시작된 한국천주교 발상지이다. 그런데 정약용 선생은 종종 [천진암]에서 [菴] 자를 빼고 그냥 "天眞"이라고만 부르기도 하였다.

 

 

 <100년계획 대성당 공사현장>

 

 

      

 

이곳은 1970년대에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하였고, 1979년에는 경기도 포천에서 이벽의 유해가 이장되었다. 이어 1981년에는 화성군 반월면에서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의 유해가, 인천 만수동에서 이승훈의 유해가, 대감마을 뒷편의 효자봉 자락에서 권철신, 권일신의 유해가 각각 천진암으로 이장되었으며, 1981년 12월에는 경기도 광주 배알미리(현 하남시)에서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성인의 유해가 간신히 수습되어 이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광암이벽성조를 기념하여 세운 광암성당 내부와 성모상>

 

 성지에 한국의 민족종교들과 유교, 불교, 천주교 등의 건축미 일부씩을 참고하면서 한민족 100년계획 천진암대성당을 세우고 있다. 천년세월을 두고 한겨레의 정신적 기둥이 될 이 이 대성당 건립에 정권을 초월하여 각계 각층에서, 온 겨레가 자자손손이 뜻을 같이하고 힘을 함께 모으며, 다같이 정성을 바쳐야 하겠다.  

 

    

 

성역로를 따라 300m 정도를 올라가면 약 5만여평의 광장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100년계획으로 대성당을 짓고 있는 현장이다. 천진암 대성당은 한국 천주교회 창립선조들의 자발적인 교회 창립정신과 거룩한 순교정신을 오늘에 기리고, 또 후대에 전하기 위하여 건립되는 민족 대성당인 동시에, 한민족이 대를 이어가며 건축함으로써 길이길이 민족화합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100년계획으로 건립되고 있는 성당이다.

 

 

 <5위 성현묘역 입구>

 

동서남북의 길이가 각각195m, 지붕높이가 85m인 천진암 대성당은. 유교의 서원과 불교의 대웅전 지붕과 처마 및 천주교회 성당의 내부 구조를 종합하여 설계되었는데, 이는 천진암이, 유교 학자들이 불교암자에서 천주교를 시작한, 儒ㆍ佛ㆍ天이 합류한 성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성당터에는 교황 요한 바울로 2세의 천진암 대성당 강복문이 새겨진 머릿돌(27톤, 4m X 1.5m X 1m)과, 대성당 중앙 제단에 놓일 제대석 (길이 10.5m, 넓이 2.3m, 높이1.5m, 무게 87톤)이 있다.

 

 

   

 

이벽 성조를 중심으로 젊은 학자들에 의해 한국천주교회가 시작된 곳인 천진암은, 여러 역사 자료에 의하면, 천주교 강학회가 열릴 당시, 폐허가 된 버려진 암자로 소개되고 있고, 후에 다산이 쓴 시에도 천진암을 가리켜 寺破無舊觀(절은 파괴되어 옛모습을 볼 수 없구나)라고 읊은 구절이 있다. 또 강학회 이후에도 절로서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다는 것은 홍경모의 남한지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원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약150여년 전에 절이 완전히 없어져 그 이후로 화전논밭으로 변하였다.

 

 

 

 

 

 

이렇게 논밭이 되어버린 천진암터를 1978년에 처음으로 변기영 신부가 매입하면서 본격적인 천진암 성역화 사업이 시작되었다. 1979년에 경기도 포천군에서 광암 이벽 성조의 묘를 기적적으로 찾아 이장하였고 이후 1981년에 정약종,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성현 등의 묘를 이장함으로써 현재와 같은 한국천주교회창립 선조 5위 묘역이 조성되게 되었다.

5위 성현 묘역은 천진암 성지의 지성소로서 경건하게 기도하고 참배하는 성역이므로, 일체의 오락과 식사가 금지된다.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5위 묘역>

 

묘역을 바라보며 왼쪽 끝에서부터, 선암 정약종 묘, 만천 이승훈 묘, 광암 이벽 묘, 직암 권일신 묘, 녹암 권철신 묘 순이다.

 

韓國天主敎發祥地 天眞菴聖地는

韓國天主敎會의 뿌리요 얼굴입니다.

우리 모두 정성을 다하여 자손만대에

지키고 아끼고 가꿉시다 !


韓國天主敎 發祥地 天眞菴 聖地와

韓民族100年計劃天眞菴大聖堂은

우리나라의 자랑이요,

우리겨레의 精神이고,

우리 國民의 精誠입니다.

 

 

 

  

 <광암 이벽 묘>

 

이벽 성조(曠菴, 德祖, 李檗, 세자 요한)

1754 :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에서 탄생

1779 : 천진암 강학회에서 천학논증. 성교요지,천주공경가 저술, 그 후 천주밀험기, 험세문득기, 래세예언기, 령득경신기,

          숭례의, 상천도 저술

1783 : 이승훈 성조를 북경 천주교회로 파견

1784 : 이승훈 성조에게서 영세

1785 : 명례방 집회로 을사박해 중, 가내 연금상태에서 아사벌(餓死罰)로 단식순교(斷食殉敎)

 

 

 

   

 

 

이승훈 성조(蔓川,子述, 李承薰, 베드로)                                 정약종 성조(選菴, 丁若鐘, 아오스딩)

1756 : 서울 중림동 만초천 언덕에서 탄생                               1760 : 경기도 남양주군 와부면 능내리 마재에서 탄생

1779 : 천진암 강학회 참석                                                    1779 : 천진암 강학회 참석

1783 : 북경 천주교회로 파견                                                 1785 : 명례방 집회 참석

1784 : 영세받고 귀국                                                            1795 : 명도회 회장으로 활약

1785 : 명례방 집회참석, "만천유고"남김                                 1797 : 이벽 성조의 "성교요지"를 본따서 그 해설판으로

1787 : 북경주교에게 보고서 저술, 발송                                            "주교요지"를 저술

1801 : 서울 서소문 형장에서 참수순교(斬首殉敎)                    1801 : 서울 서소문 형장에서 참수순교 (斬首殉敎)

                   

    

 

권철신 성조(鹿菴, 權哲身, 암브로시오)                                 권일신 성조(沙右居士, 稷菴, 權日身,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1736 : 경기도 양평군 양근면 양근리 갈산에서 탄생                 1742 : 경기도 양평군 양근면 양근리 갈산에서 탄생

1779 : 천진암 강학회 참석, "유한당 언행실록" 서문 저술          1779 : 천진암 강학회 참석

1784 : 이벽 성조에게서 영세                                                  1784 : 이벽 성조에게서 영세

1801 : 신유박해 때, 서울 감옥에서 옥중 고문으로                    1785 : 명례방 집회에 참석

          장타순교(杖打殉敎)                                                     1791 : 신해박해 때 서울 감옥에서 혹심한 장타(杖打)로

                                                                                                      귀양도중 순교(杖打殉敎)

 

 <천진암터 아래에 있는 '빙천(氷泉)'>

 

천진암 강학회 학자들이 세수하고 아침을 맞이했던 샘으로 심한 추위에도 얼지 않는다.

빙천의 위치는 강학회 장소가 천진암이라는 근거중의 하나를 제시하고 있다.

즉, 강학회당시의 기록에서 "새벽이면 일어나 얼음샘에 가서 샘물로 양치질과 세수를 하였다 "는 氷泉은 氷川과 달라서, 氷川은 겨울에 얼어붙은 개울을 말하나 氷泉은 얼음처럼 찬 샘물을 말하는 것인데, 氷泉이란 샘은 겨울에 얼음이 있어서 생기는 이름이 아니라, 오히려 한 여름 무더울 때, 샘물이 얼음처럼 차다고 하여, 사람들이 붙이는 샘물이름이고, 이러한 찬 샘물은 항상 北向계곡에나 있지, 南向이나 東南向계곡에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얼음처럼 찬 샘물이 별도로 있어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햇빛을 덜 받는 北向계곡의 지하나 지표상의 지면이 덜 데워져서 물이 비교적 차기 때문에 되는 것이다.

그런데 氷泉은 지금도 천진암터에 있고, 한여름에도 손을 넣으면 손이 시리고 저릴 정도로 차서, 조금 있으면 손이 오리발처럼 불그레하게 된다.

그런데 한 여름 무더위에도 찬 이러한 물은, 한겨울 추위 때는 김이 무럭무럭 날 정도로 물이 덜 차고, 때로는 미지근하게 느껴질 정도가 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천진암 강학회 때가 한겨울이었는데, 그 추위에 학자들이 氷泉에 가서 양치질과 세수를 하였다는 것은 그 泉水가 가장 얼지 않았고, 덜 차갑기 때문인 것이다. 지금도 아무리 추워도 서울이 영하 25도가 되어도 현 천진암의 빙천수는 얼지 않는다.

 

 

 

 

<창립선조 묘역이 있는 천진암터로 향하는 길>

 

 

                       <성역내에 있는 조선교구 설립자 묘역에는 성 정하상과 유진길의 묘소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조선교구설립자 성 정하상 바오로 회장 탄생 제200주년(1795∼1995)을 기념하면서, 정하상 회장의 제자인 성 김대건 신부(1821 ∼1846)의 사제 서품 제 150주년(1845∼1995)을 기념하고, 또 천진암 대성당 터닦기 기공식 제 9주년 (1986∼1995)기념 겸 천진암 대성당 정초식 제 2주년 (1993∼1995) 기념미사를 1995년 9월 26일 오전 11시에 대성당 터에서 주한 교황대사 죠반니 블라이티스 대주교와 수원교구장 김남수주교 그리 고 카나다의 동방교회 덴어록 대주교, 경기도지사를 위시한 내빈 등 약 2,000여명의 신자들이 함께 거룩히 봉헌하였다.

 

 

<앵자봉능선에서 산행중 내려다본 천진암성지 전경>

 

 

          허망의 잠을 깨며 (천진암에서)  <김영수> ▒


          꿈 깊어야

          향내 맡을 수 있는 것입니까

          목숨 걸어 대지 밝히며

          골짜기 거느리는 이들 노래

          나는 사랑이 부족해서

          낮에도 아프게 기우는 별 하나 봅니다

          가슴 안으로 파아란 선 예리하게 그어질 때

          나는 비로소 허망의 잠을 깨며

          천진암의 샘물에 닿습니다

          추억과 꿈 속에 도는 비밀

          문득 눈 뜨고 다가오는 물소리

          나는 높이 오르는 바람 하나 타고

          절벽 위 숨은 꽃잎 하나 흔들다

          이곳 골짜기 묘지들 위로

          한 올 햇살 되어 떨어질 수 있을까요

          부활처럼 흰 구름 속으로

          아득히 스며들 수 있을까요  

 

                                                                               ▼ 찾아가는 길

 

 미사시간 평일 : (월-금) 오전 12:00 (매일), 고해성사 : 미사 전 30분
               주일 : 오전 7:00, 12:00 마지막 주일 : 12:00 (라틴어미사) 

 찾아가는 방법 : @ [승용차] 중부고속도로 경안IC에서 우회전하여 45번 국도 200m에서 또 우회전하여 88번 국도로 5km

                             가서 도수 사거리를 계속 직진, 7.5km 가면 천진암 성지이다.
                         @ [버스] 서울 강변역에서 13-2번 버스 이용하여 종점 퇴촌에서 천진암 방향 시내버스 이용

            연락처 : 천진암 성지 (031) 764-5953-4.    FAX (031) 762-5957 

         자료출처 : 천진암 성지 http://chonjinam.org

 

 

 - 천진암에서, 2008. 2. 13. 자유인eb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