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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의 쉼터

수리산 최경환 성지(경기 안양, 2009.3.10.) 본문

[♡ 자유와 평화 ♡]/한국천주교 聖地

수리산 최경환 성지(경기 안양, 2009.3.10.)

자유인ebo 2009. 3. 15. 22:46

 

수리산 최경환 성지(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 1151-6)

 

"수리산성지는 최경환(프란치스코, 1805-1839) 성인께서 기해박해 중이던 1839년 9월 12일에 옥사 순교하신 후에 묻히신 유서깊은 곳이다. 성인께서는 장남인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신부님을 우리나라의 두번째 사제로 하느님께 바치셨을 뿐만 아니라, 옥중에서 겪으신 모진 매와 박해에도 용맹한 신앙으로 믿음을 증거하셨다. 또한 부인이신 이성례(마리아, 1800-1840) 순교자도 그 이듬해 1월 31일에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 치명하셨다."


한국교회사를 통하여 보면 피로서 지켜온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걸어온 길은 눈물없이는 도저히 바라볼 수가 없고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토록 어렵게 지켜온 신앙을 전파하고 정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1805-1839) 성인은 고향인 충청도 홍주 다락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을 떠난 뒤 서울의 낙동(駱洞, 지금의 회현동)과 여러 지방을 거쳐 과천의 수리산(修理山)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의 담배촌)에 정착하여 교우촌 공동체를 이루었다."

 

 

안양역에 내려서 시내버스를 타고 병목안삼거리에 내려서 체육공원을 좌측에 두고 계천을 따라 한참을 걷다보면 수리산을 관통하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를 만난다. 고속도로를 지나 조금만 가면 예수님상이 있고 성지 성당이 길가에 보인다. 예수님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오 복음11장 28절) 하시며 반기신다.

 

 

 

경기도 과천(현재의 안양이 예전에는 과천지방에 속해 있었음) 수리산 속에 있었던 '뒷듬이' 마을은 푸른 소나무 숲속에 숨겨진 작은 마을이었다. 양지 바른 산비탈 여기저기에 드문드문 집을 짓고, 담배밭을 일구고, 옹기를 구워가며 살아가던 이 마을은 20여호 밖에 안되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기해박해(1839년) 때 천주교인들이 들어와 신앙 공동체를 이룬 오래된 교우촌이다. 신도들이 조정의 천주교 박해로 인하여 이곳에 정착 이주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하여 담배를 경작했다고 하여 담배촌이라 칭한다. 이 마을을 유서깊은 교우촌으로 개척한 사람이 바로 최경환(최양업 신부님의 아버지) 프란치스꼬 성인이다.

 

 

     

  

 ▲ 최경환성인 묘소와 십자가의 길 입구 

 

 

 

 

 

"최경환성인 일명 영환(永煥), 영눌(永訥), 치운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두번째 방인사제인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의 아버지이다.
충청도 홍주(洪州) 땅 누곡(樓谷, 지금의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락골)에서 부친 최인주(崔仁住)와 모친 경주이씨(慶州李氏)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안이 원래 교회창설 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온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고, 성장해서 '내포(內浦)지방의 사도' 이존창(李尊昌)의 후손인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와 혼인한 뒤, 가족들과 상의하여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의 벙거지골(笠洞) 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박해와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가산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金星), 경기도 부평(富平)을 거쳐 과천(果川)의 수리산(현재의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 수리산)에 정착하였다. 여기에서 회장으로 신자들과 교우촌을 돌보며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1836년에 큰 아들 최양업(토마스)를 모방(Maubant, 羅)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맡겨 마카오로 유학보냈다.

1839년에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나자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불안해 하는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돌보던 중,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마을 교우와 일가 등 40여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청에서 하루 걸러 형벌과 고문을 당하며 태장 340도, 곤장 110도를 맞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다.

모진 형벌로 전신이 헤어진 프란치스코는 말하기를 "내 평생 소원이 칼 아래서 주를 증거하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죽는 것이 주님의 명이니, 뜻을 이루지는 못하게 되었다" 하고는 거룩한 영혼을 천주께 바쳤다. 9월11일에 최후로 곤장 25도를 맞고 그 이튿날인 9월 12일 포청옥에서 장렬히 순교하였다.

1925년에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한국 천주교 200 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 5월 6일에 성인 (聖人)의 반열에 올랐다." 

 

 

  

"이성례(李聖禮 마리아 1800-1840) 최경환 성인의 부인이며 최양업(토마) 신부님의 어머니이다. 본래 부모와 함께 어린이를 투옥시키는 일은 국법에도 없었으나 큰 아들을 유학 보낸 이 집에 대해서는 예외였다. 옥에 갇힌 다섯 아들은 희정(羲鼎 당시 15세) 선정(善鼎 당시 12세) 우정(禹鼎 당시 9세) 신정(信鼎 당시 6세) 그리고 젖먹이였던 세 살짜리였다.

 

한데 갇힌 최씨 일가의 비극은 그때부터 절정으로 치달았다. 우선 굶주림이 닥쳐왔다. 이들 어린이를 옥에 가두긴 했어도 국법에도 없는 일이라 밥이 나오지 않았다. 어쩌다 밥 한덩이가 나오면 어린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어른들은 굶었다. 세 살짜리 막내는 그나마도 얻어먹지 못해 어머니의 빈 젖을 빨다가 첫 옥사자가 되었다.

 

젖먹이가 죽자 어머니 이성례는 실성을 했다. 그대로 가다가는 아이들을 모두 굶겨 죽이겠다는 모성애에서였을 것이다. 짐짓 배교하겠노라고 말하고 네 아들을 데리고 풀려 나왔다. 이때부터 어린아이들은 서울의 골몰골목을 누비며 걸식을 다녔다. 어느 집에서나 이들을 불쌍히 여겼으나 배교를 아는 교우들은 밥을 주지 않았다. 옥에 갇힌 남편 생각에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린 이성례는 아이들을 동냥 보낸 사이 남편 곁으로 돌아갔다.

 

다시 갇힌 몸이 된 것이다. 그러자 15세부터 6세까지의 4형제가 부모를 가둔 옥을 찾아왔다. 그들 어린 형제들은 창살을 붙들고 어머니를 목메어 불렀다. 그러나 어머니는 또 한번의 배교를 겁냈다. 돌아앉아 어린 아이들이 울며 부르짖는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려고 '엄마'를 부르는 아이들에게 등을 보인 채 미동도 할 수 없었던 어머니… 그래도 일찍 철이 난 15살짜리 희정은 어머니가 다시 배교할 것이라고 생각되자 울부짖는 어린 동생들을 달래서 발길을 돌렸다.

 

그리하여 4형제 거지는 다시 장안의 떠돌이가 되었다. 이제는 어느 집을 가도 쌀과 음식을 한아름씩 안겨주었다. 이들 4형제는 동냥한 음식을 틈틈이 부모에게 사식으로 넣었다. 한번은 어느 부자집에서 먹으라고 준 인절미를 가슴에 품고 옥리를 찾아가 얼마를 떼어준 후 사식을 넣는데 성공했다. 그 인절미에는 어린 아들의 손가락 자국이 아들의 체온과 함께 남아 있었다. 그 인절미를 메이는 목으로 어떻게 넘겼을 것이랴. 이 눈물겨운 정경이야말로 백육십년이 넘은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의 가슴을 적시며 뜨거운 감동을 준다.

 

최경환의 부인 이성례가 당고개, 지금의 서울 용산구 신계동 언덕에서 참수 치명한 날은 음력 1839년 12월 27일(양력 1840년 1월 31일)이었다. 15살 난 둘째 아들 희정은 가끔 옥사장에게 사정하여 푼푼이 모은 돈을 신바닥에 숨겼다가 어머니에게 갖다주곤 하였다.

 

이성례는 아들의 머리를 빗겨주면서 "아무쪼록 어린 동생들을 각별한 사랑으로 보호하고 친척집에 각각 데려다 주고 지내자면 중국 마카오에 가 있는 너희 형이 나와 자연히 안배할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며칠 동안은 오지 말라고 일렀다. 치명하는 날에 아들을 보면 미진한 육정에 끌릴까 보아서였다. 희정은 어머니가 오지 말라는 뜻을 알고 가슴이 막히고 슬픔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나이 어린 4형제는 온종일 동냥한 돈 몇 푼과 쌀자루를 메고 이리저리 수소문한 끝에 희광이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우리 어머니가 아프지 않게 단칼에 하늘나라로 가도록 해 주십시오" 하며 가지고 온 돈 몇 닢과 쌀자루를 통째 내밀었다. 4형제의 눈물겨운 '청탁'은 희광이들의 가슴을 움직였다. 희광이들은 밤새 칼을 갈아 달빛에 비춰 보았고 이튿날 당고개에서 그 약속을 지켜 주었다.

 

그날 구경꾼들은 더 못 나가게 막아 놓은 삼줄을 헤치고 앞으로 나와 어머니 이성례가 단칼에 치명하고 희광이들이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먼발치로 바라본 어린 4형제는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용감한 어머니의 순교를 기뻐했다고 전해온다.

 

당시 장안에서의 순교자들은 모두 시구문으로 불렸던 광희문 밖에 내버렸다고 하는데 그날 하루만도 당고개 아래로는 너무 많은 시신이 굴러떨어져 시구문 밖에 문자 그대로 시산(屍山)을 이루어 어린 형제들은 어머니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 다만 옥리들의 배려로 아버지 최경환의 시신은 친척들이 거두어 그들 가족이 마지막 살던 수리산에 안장하였다."

 

 

 ▲ 최경환 성인의 고택

 

최양업은 1821년 3월 1일 충청도 홍주의 다락골 새터(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누곡)에서 독실한 교우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나, 1861년 6월 15일 나이 마흔 하나에 경북 문경에서 선종하였다.

 

 

김대건,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것은 과천의 수리산 '뒷듬이'(현 수리산성지)에서 살던 1836년, 그의 나이 열여섯 살 때였다. 1837년 11월 동료 최방제를 잃었고, 현지의 민란으로 1839년에는 7개월 동안 필리핀의 마닐라와 롤롬보이에서 피신생활을 하는 등 순탄치 않은 유학생활이 계속되었다.

신학 공부를 마치고 사제품을 받은 것은 1849년 4월 15일.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번째로 한국인 사제가 태어난 것이다. 최양업 신부는 요동에서 생활하다가 1849년 12월 3일 마침내 귀국에 성공하였다. 한국을 떠난지 꼭 13년 만이었다. 최양업 신부를 왜 '땀의 순교자'라 하는가? 그것은 귀국후 그의 사제생활 11년 6개월 동안 걸을 수 있는 날이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교우촌을 순방하며 사목하다가 결국 과로로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저는 조선에 들어온 뒤 한번도 휴식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7월 한달 동안만 같은 집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고 언제나 시골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습니다. 중국에서 서울까지 여행한 것을 빼고도 1월부터 지금까지 거의 5천리를 걸어다녔습니다"(최양업 신부의 서한집). 결코 길지 않은 최양업 신부의 사제생활은 한마디로 사목 순방에서 시작하여 사목 순방으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삶은 당시 박해받고 있던 교우들에게 크나큰 증거가 되었으며, 오늘의 우리에게도 참으로 훌륭한 모범이 되고도 남는다.                      

 

 

http://surisan.org/ 수리산성지 -

 

 

수리산 최경환 성지 찾아 가려면

대중교통 => 안양역에서 10번 버스 또는 안양 CGV 맞은편에서 병목안 가는 버스를 타고 병목안삼거리에 하차하셔서 좌측 체육공원 앞 개천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면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고가도로가 보입니다. 고가도로 아래를 지나서 약 30m 거리에 성당이 보입니다.(병목안 삼거리에서 도보 약 25분 소요)

 

 

 

- 2009.3.10. 수리산 성지에서,자유인eb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