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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의 쉼터

1. 천주교 입문 본문

[♡ 자유와 평화 ♡]/가톨릭 基本敎理

1. 천주교 입문

자유인ebo 2011. 6. 30. 12:07

 

 

천주교 입문

 

     

  

 

 

1. 추구하는 인간


  인간은 출생에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이 질문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알게 된다. 질문을 하는 것은 인간만이 지닌 특권이며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 지어주는 요소이다.

어린이는 말을 시작하면서부터 하루에도 수십 번 "이건 뭐야?" "저건 뭐야?" 하는 질문으로 어른들을 귀찮게 하면서 주변의 사물을 배우고 성장해 가면서 사건의 의미와 내용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사춘기의 청소년들은 또 다른 의식의 눈을 뜨면서 자신과 세상에 대한 보다 내면적인 질문을 제기하며, 이 질문은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계속된다. 다만,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될 뿐이다.


  인간의 지혜는 자신들이 던진 이 질문들로 해답을 얻어왔고 그 결과 오늘날 인간 생활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과학의 발달이란 바로 인간의 상상력, 인간이 던진 질문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불과 30여 년 전만 하더라도 계수나무 아래서 옥토끼가 떡방아를 찧는 아름다운 곳으로 상상만 하던 달나라에도 인간은 다녀왔고, 통신수단의 발달로 안방에 앉아서도 지구 저편에서 일어난 화산 폭발, 지진 참사의 소식을 재빨리 알 수도 있으며,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건물이나 기계 따위는 고스란히 남겨 놓은 채 사람은 물론이고 모든 생명체만 순식간에 없애 버린다는 중성자탄도 만들어 내었다. 뿐만 아니라 의학의 발달은 인공심장을 만들어 이식하는가 하면, 시험관 아기까지 탄생시켰으며, 갖가지 전염병을 퇴치시켰고, 인간의 생명까지도 연장시켜 주었다. 또한 인간의 뛰어난 지혜는 인간이 걸어 온 발자취, 지구상의 인류의 기원까지 추적해 내었고 미래의 발전까지도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은 엄청난 변화요 발달이긴 하지만 생명의 근원, 죽음의 본질, 죽음 후의 일에 대해서는 여전히 설명해 주지 못한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우리가 매일 먹는 한 톨의 쌀을 만들 수 없으며 죽음 자체를 면제시켜 주지도 못하며, 인간을 죽음의 불안과 절망으로부터 구원하지도 못한다. 인간 실존, 인생의 의미에 대한 해답은 수학적으로 풀이되거나 과학적인 관찰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학이나 기계문명, 의학의 발달은 인간 생활을 한없이 편리하고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이 만든 이러한 발전이 도리어 인간성과 생명을 위협하고 파괴하며 인간을 소외시키고 있다. 자동차의 발달과 함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교통사고, 인류의 존폐를 위협하고 있는 핵무기의 위력, 수많은 생명을 한꺼번에 앗아가는 가공할 전쟁무기들, 현대의 거대한 메커니즘 속에 생산의 수단과 노예로 전락한 인간 존엄성, 산업발달과 함께 야기되는 각종 공해와 그로 인한 부작용 등 인간은 새로운 자가당착에 빠지면서 우리의 일상은 또 다른 불안과 두려움에 싸이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발달의 의미와 보람과 그 향방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무엇이며,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남녀노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던지는 이 질문의 표현은 여러 가지이나 근본은 매양 하나의 질문이며 인간은 끊임없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다.

 

 

2. 인간의 갈망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인간의 이성은 세 가지 기능 즉 지능, 의지, 정서를 가지고 있다. 지능은 진리(眞理)를 찾고, 의지는 선(善)을 위해 주어졌고, 정서는 아름다움(美)을 찾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인간은 바로 진·선·미를 위해 존재하며, 이를 갈망한다. 이 진·선·미는 어떤 물질적인, 감각적인 차원이 아니다. 이것은 보다 초월적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편안히 쉴 수 있는 집과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옷을 필요로 하고 이를 위해 돈이 필요하지만 이것만이 인간이 찾는 절대가치는 아닌 것이다. 오히려 삶의 의미를 깨닫고, 비록 이 세상에서 물질적인 손해가 있더라도 악을 피하고 선을 찾으며, 주어진 아름다운 정서를 찾는 것이 인간이다. 비록 인간의 신체구조는 물질세계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나 인간의 육체는 단순한 물질 이상의 존재이다.


  동물은 자연적인 본능이나 육체적인 구조에 의해 본능적으로 움직이지만 인간은 매순간 자신의 자유스러운 선택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은 자기 존재 의미를 물을 수 있고 모든 사물을 의식적으로 관찰하고 숙고할 수 있는 명석한 정신과 사고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간 의식의 변형될 수 없는 신비이며, 이 의식이 있기에 또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인생이란 바로 이런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삶은 보다 높은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이 의미를 찾는 과정이 곧 인생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가 삶의 의미를 깨달아 자신을 성숙시켜 나가야 하는 유일한 이성적 동물이다. 호도나무는 자연법칙에 따라 호도라는 열매를 맺으며, 고양이는 본능이라는 법칙에 따라 쥐를 잡는다. 그것들은 더도 덜도 될 수 없는 고정된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진·선·미를 위해서 살수도 있고, 스스로를 자포자기하면서 불행한 존재가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이 되었다는 그 자체로서 위대한 것도,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것도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인간의 삶이 얼마나 고귀하며 그 고귀한 가치를 어떻게 찾아야 하느냐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의 생활태도와 방법은 가지각색이나 그 다양함 속에서 한 가지 공통점은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의지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모두가 구하는 행복인데도 우리 주위에는 행복보다는 불행이 더 많은 듯하다.


  인간의 욕망은 한이 없다. 누구나 처음 목표했던 재물(지위, 명예 …)을 얻게 되면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더 큰 욕망을 품게 된다. 행복이란 우리가 그리워하며 바라고 있는 것을 얻었던가, 그것이 채워졌을 때 우리 마음속에 찾아드는 느낌이다. 인간은 원하던 것을 얻었으면 행복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만큼 행복하지 않아서 더욱 욕심을 내게 된다. 우리 주위에 행복보다는 불행이 더 많은 듯이 보임은 바로 이 끝없는 욕심 때문이 아닌가! 그들은 행복을 위한 자신의 목표가 잘못 설정되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절대적 안정을, 영속하는 사랑을, 끝없는 행복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어느 한 순간일 뿐 결코 이 갈망은 온전히 충족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째서 인간은 충족시키지 못하는 갈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 어째서 일정한 공간과 시간에 태어나 특정한 문화와 역사 속에 살다가 죽어야 하는, 유한 속에 사는 인간 존재가 무한한 갈망을 갖고 있는가? 이 갈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인간이 지닌 갈망 중에서 특히 가장 큰 것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살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러기에 진시황은 불로초를 찾기 위해 그렇게도 애를 썼고,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몸에 좋다면 먹지 못할 것이 없다. 그러나 모든 생명은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고 아무도 이를 피할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유한한 존재임을 알면서도 영원히 살고 싶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며, 아무도 임종의 불안과 죽음에의 공포 속에서 인간을 구해 주지 못한다.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어차피 모든 것이 죽어 없어질 것이라면 애당초 왜 이런 것들을 얻으려고 발버둥쳤을까?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온 세기를 두고 던졌던 질문이다.

 

 

3. 종교란 무엇인가?


  인간은 아득한 옛날부터 인생과 우주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해답을 추구해 왔다. 또한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갈망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것이다. 현대의 고도로 발달한 인류학의 연구에 의하면 원시인들에게도 인생의 궁극목적에 대한 탐구의 흔적이 나타나 있다고 한다. 원시인들도 그들 나름대로 인생에 대한 물음을 어떤 초월적 힘에 대한 외경(畏敬)에서 찾았으며, 마침내는 죽어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인간은 그 허무함과 무상을 극복하기 위해 영생 혹은 후세의 삶을 믿고 있었음이 그들의 장례예식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들이 살았던 동굴에 묻힌 사람의 뼈가 잘 정돈되어 있는 것은, 죽은 후의 세상이 있다는 것을 믿고 죽은 이를 위해 정성들여 장례식을 거행한 증거이다. 또한 인간의 유해는 동물의 시체와는 달리 정성들여 매장했으며 죽음의 여행길에 필요한 도구나 음식 혹은 동반자까지 함께 묻은 흔적도 그 증거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던 동굴과 뼈가 묻혀 있는 무덤들에서 발견되는 조각과 그 밖의 예술작품들은 모두 그들의 종교의식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인간은 시초부터 종교를 가지고 살았으며 현재에도 문명인이든, 미개인이든 모두 종교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과연 종교란 무엇인가? 인류의 역사와 문화, 인간의 지성과 종교는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일까? 인간의 문명이 발달하면 종교는 없어질 것이라고 하는데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도 왜 종교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있는가?

종교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으나 인간은 근본적으로 종교적 존재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현재 세상에는 서로 다른 종교들이 많이 있지만 모두 다음 두 가지 점에서 비슷한 데가 있다.


1). 모든 종교는 인생과 우주의 궁극적인 질문을 해결하려 하며, 각각의 종교가 제시하는 해답은 다를지라도 그 질문만은 같다.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선과 악은 무엇이며, 인간에게는 왜 희로애락이 엇갈려 있는가? 그 원인들은 무엇인가? 인간의 참된 행복은 무엇인가? 인간은 왜 죽어야 하는가? 그리고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인간과 우주만물의 근원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신은 하나라는 유일신교를 믿는 민족과 여럿이라는 다신교를 믿는 민족이 있으며, 인격적인 신과 비인격적인 신을 믿는 종교, 또는 자연종교와 계시종교 등등 다양한 종교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우주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역할에 대해서도 어떤 종교는 인간의 지상적인 일에만 초점을 두고 있으며 또 어떤 종교는 인간의 일생은 현세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후에도 계속 생명이 있는 것으로 믿기도 한다. 어쨌든 수많은 종교가 있고 또 각자 자기 종교가 옳다고 믿고 있다. 때문에 어떤 것이 옳고, 옳지 않은지 식별할 필요가 있으며 이것은 진정한 종교를 찾기 위한 문제점이다.


2). 종교는 인생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인간에게 확신을 가져다준다.

 

  종교는 인생문제에 과학적인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하나 인간의 삶에 무한한 의미를 부여한다. 어떠한 경우든 인생의 신비에 대한 해답들은 과학적인 탐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행동일 뿐이다. 만약 우리들이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그런 종류의 증명을 추구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종교가 주는 해답에 실망할 것이다. 종교는 과학적 이해 이상의 차원이다.

 

  과학은 우주의 물질적, 화학적, 생물학적 문제를 다룸으로써 인간의 실생활을 향상시키고 있다. 그러나 과학으로는 인간의 자유나 인간의 존재 이유, 생명과 죽음 자체에 대한 신비를 해결할 수는 없다. 모든 사물의 존재의 신비는 믿음으로써만 해결할 수 있다. 어떤 형태로든지 인간은 인간 이상의 초월적인 어떤 절대자와 대면하고 있음을 믿으며 바로 이 믿음 안에서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확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를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으나, 굳이 종교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인간과 절대자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종교가 절대자와 나와의 삶의 관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첫째는, 종교의 대상인 절대자 곧 종교의 교의(敎義)이며, 둘째는, 종교행위를 하는 인간, 따라서 인간이 지켜야 하는 종교윤리이며, 셋째는, 절대자와의 관계를 구체화하는 종교행위 즉 종교의식(宗敎儀式)이다.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믿음의 내용(신앙개조: 信仰個條)인 교의이며, 여기에서 종교윤리, 종교의식이 나온다. 각 종교는 이 교의에서 인생과 우주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에 나름대로의 해답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종교를 제대로 공부하려면 우선 그 종교가 믿는 교리, 그 종교가 가르치고 있는 종교윤리(그리스도교의 계명), 그리고 그 종교의 의식(기도와 전례) 모두를 알아야 한다.


  언제부터 종교현상에 '종교'라는 단어를 쓰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그 단어의 의미를 분석해 보면 우리에게 종교가 어떤 것인가를 더 의미 있게 알려준다. '종교'는 '宗'자와 '敎'자의 합성어이다.  宗자는 으뜸, 기둥, 근본 등이며, 敎자는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교육의 으뜸이라는 것이다.

 

 

4. 그리스도교


  인간생활은 근본적으로 종교와 관련을 맺고 있다. 일찍부터 삶의 신비를 느껴 온 인간은 만물의 근원을 탐구하여 인생에 얽힌 갖가지 의문에 대해서 종교에서 그 해답을 찾았던 것이다. 우리 조상들 역시 이러한 문제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조상들도 옛날부터 우주와 삼라만상에 대한 경탄과 두려움에서 막연하게나마 절대자를 섬겨 왔다. 모든 물체에 정령(精靈)이 있다고 믿고(샤머니즘), 큰 나무나 바위에 정성을 바치고 무당을 불러다 굿을 했다. 그러나 이 샤머니즘이 제시하는 인생문제에 대한 해답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좀더 다른, 인간이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인생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을 끊임없이 찾았다. 그래서 중국대륙을 거쳐 들어온 불교를 통해서, 도교를 통해서, 유교를 통해서 인생문제의 해결을 계속 추구했던 것이다.

 


  조선후기(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정계(政界)에서 은퇴해 있던 실학파의 남인 학자들은 이러한 여러 가지 인생문제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면서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모임이 있었다. 그들은 중국에 와 있던 서양 선교사들이 쓴 서학에 관한 한문서적을 알게 되었고, 함께 모여 연구하고 그 내용을 토론했다. 이리하여 학문으로 시작한 서학 연구가 마침내 신앙으로 발전하였고 그것은 이 땅에 그리스도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일찍부터 현자들은 인간의 행복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찾아야 함을 깨달았다. 그 진리는 영원한 것이며, 유한한 세상과 인간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무한하신 절대자, 영원불변의 절대자만이 인간의 무한한 갈망을 채워주실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분을 알 수는 없다. 다만 그분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가르쳐 줌으로써 우리는 배워 믿게 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우주의 신비와 인생에 관한 문제를 '창조주이시며 한 분이신' 하느님이 우리에게 대답해 주시고 가르쳐 주신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이라는 특정한 민족의 역사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셨고, 이 세상과 당신 자신을 더 분명히 가르쳐 주시려고 외아들을 보내셨는데 이 아들을 예수 그리스도라 한다. 하느님은 이 외아들을 통해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당신의 뜻을 알리시고 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길을 보여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참 삶, 영원한 삶을 사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을 믿음으로써 인간은 불안과 고통과 죽음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사랑과 평등과 자유사상을 바탕으로 한 내세(來世)의 하늘나라에 대한 가르침은 인류에게 가장 진정한 기쁜 소식이 되었던 것이다.

 

  불교나 유교는 인간 이성으로 진리를 깨우치고 그로써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므로 자연종교라고 한다. 반면에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터득하고 깨달아서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특이하게도 하느님이 손수 길을 가르쳐 주시고 인간을 불안과 공포, 고통과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종교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스스로 드러내 보이심으로써만 인간이 그 해결책을 알 수 있기에 그리스도교를 계시(啓示)종교라 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하여 이 문을 두드렸다. 이제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의 구체적인 가르침이 무엇인지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