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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의 쉼터

59). 북악산 서울 성곽(2007. 6. 26.) 본문

[♡ 나의 발자취 ♡]/▶山行

59). 북악산 서울 성곽(2007. 6. 26.)

자유인ebo 2007. 6. 30. 13:40

 

40년 만에 열린 북악산 서울성곽 (2007. 6. 26)

와룡공원- 말바위 쉼터- 숙정문- 촛대바위- 곡장- 청운대- 백악마루- 창의문

 

  남북 분단의 아품을 반세기가 훨씬지난 지금도 겪어야 하는 가슴아픈 현실이다.

내가 어릴적에는 반공 방첩이라는 표어를 눈만 뜨면 볼 수 있을 정도로 반공교육을 많이 받고 자

랐다. 교육뿐만이 아니라 실제 북한에서 남파한 무장공비가 나타나 사회를 혼란스럽게 했었으며

그 사건중의 하나가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부대 소속의 김신조외 30명의 무장공비들이 청

대를 습격할 목적으로 나타나 이곳 북악산에서 우리 군경과 격렬한 총격전을 벌인적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공은 당연한 현실이었고, 그 이후 서울성곽의 민간인 출입은 보안상의 이유

로 전면 통제되었으며 40여년 지난 최근에 와서 1차로 숙정문에서 촛대바위까지 열렸고, 이제 와

룡공원에서 창의문 까지 전면 개방에 이르게 되었다.

 

  

  조선 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즉위한지 한 달도 못되어 한양 천도 계획을 명하였고, 태조 4년(13

95년) 한양에 경복궁, 종묘, 사직단의 건립이 완성되자 곧바로 도성건립을 시작하였다. 서울성곽

은 북악산(342m),낙산(125m),남산(262m),인왕산(338m)을 잇는 총 길이 18.2km의 성곽으로 평

지는 토성, 산지는 산성으로 하여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고, 27년 후 세종은 서울성곽을 전면 석성

()으로 수축하는 대대적인 보수 확장으로 지금의 서울성곽의 골격을 이루었으며, 이후 숙종

30년(1704)까지 260년간 부분적인 보수만 있었을 뿐 큰 붕괴는 없었다. 원래 방어목적으로 성을

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제 구실을 못했으며, 선조가 의주로 피난을 하면서 큰 전투가

었고 그래서 서울성곽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와룡공원 인근 주민들의 휴식터>

 

  이렇게 보존되어 오던 서울 성곽은 1899년 전차를 부설하면서 성곽 일부가 헐려나갔고, 일제강

정기에 들어서면서 서대문과 혜화문(동소문)이 헐려 사실상 서울의 평지 성곽은 모두 철거되어

총길이 18.2km중 산지 성곽 10.5km 만 남게 되었다.

 

 

 

  좌측은 성북동 쪽에서 와룡공원으로 들어오는 석문이고, 우측은 혜화문 쪽에서 성벽을 따라 와

룡공원으로 올라오는 길이다. 내가 찾아온 길은 지하철 혜화역 1번 출구에서 마을버스 08번을 타

고(약 10분 소요) 명륜동 종점에서 계단길로 약 100m정도 걸어서 와룡공원입구에 도착 했다.

 

 

     

 

  와룡공원길을 따라 말바위 쉼터로 향하는 길가에는 때아닌 명자꽃이 피어있었고, 명자나무 속

을 헤집고 들여다 보니 명자나무 열매가 큼직하게 달려 있어서 꽃과 열매를 같이 감상할 수가 있

었으며, 명자나무에 대한 새로운 공부가 되었다. <자세히 보려면 위 사진 클릭> 

  

 

  말바위 쉼터를 조금 못가서 숲내음이 물신 풍기는 성벽아래의 숲길이다.

한적한 시골길처럼 정감이 있고 잠시나마 향수에 젖으며 한동안 많이 불리웠던 노랫말이 생각난

다. "내가 놀던 정든 시골길 소달구지 덜컹대던 길 시냇물이 흘러내리는 시골길은 마음의 고향..."

 

 

  여기가 말바위 쉼터, 여기서 신분증 제출하여 본인 확인하면 입장이 가능하다. 하루에 6회로 나

누어 입장을 하는데 오전 10시부터 1시간 간격이며, 1회차에 인터넷 접수 50명, 현장 선착순 접수

100명까지라고 한다. 말바위 쉼터라고 해서 말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가 했었는데 그런 바위는 보

이지 않았고, 말의 안장처럼 생겨서 말바위 쉼터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진위는 알 수 없다.

  

 

 숙정문은 서울성곽의 북대문으로 남대문인 숭례문과 대비하여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으로 이

름 붙였다고 한다.1396년(태조 5년) 처음 성곽을 쌓을 때는 지금위치보다 약간 서쪽에 있었다고

한다. 1504년(연산군 10년)에 성곽을 보수하면서 이곳으로 옮겼으며, 원래 사람들의 출입을 목적

로 지어진 문이 아니고, 서울성곽의 동서남북 4대문의 격식을 갖추고 비상시에 사용할 목적으

지어졌기 때문에 평소에는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이곳은 음의 기가 강

서 쳐녀가 이곳에 3번 만 찾아오면 시집을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음의 기가 강해 그 옛날에

는 수많은 스켄들을 일으켰다고 한다.

 

 

  숙정문에서 촛대바위로 향하는 길이며, 우측 석곽 넘으로 보면 수 년 전만 해도 특별한 사람들

만 출입 했었던 그 유명한 삼청각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누구라도 출입이 자유롭다.

 

 

  촛대바위는 북악산 정상에서 보면 확실하게 촛대의 형상을 확인할 수 있고, 여기서는 윗부분만

볼 수가 있으며, 촛대바위 옆에는 전망대가 있어서 서울시가지를 전망하기게 좋은 곳이다. 촛대

바위의 높이는 약 13m에 달하며 바위 위에 지석은 1920년대 일제강정기때 일제가 민족정기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쇠말뚝을 박았던 곳이다. 

 

 

  단체 행렬을 따라 가다 보니 곡장을 지나고 있었다. 곡장이 어떤 곳인지 궁금증만 남기며 입구

에서사진 한장만 찍고 행렬을 따라갔다.   <'곡장' 국어사전에는 : 능(陵)이나 원(園)의 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이라고 되어 있는데... ? 숙제로 남는다.>

 

 

  서울성곽 답사는 현재 안내원의 인솔하에 이루어지고 있으며, 요소 요소마다 안내원의 자세한

설명으로 답사길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단점은 단체행동에 따라야 했기에 좀 더 쉬면서 천천

히 답사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기가... 여기서 안내원의 설명에 의하면 안내원 바로 뒤에 작은 돌

로서 축조된 모습이 원래의 모습이고 큰 사각형의 돌로 쌓은 새로이 복원된 모습이라고 한다.

   

 

 

 

  청운대에서 잠시 휴식하면서 바라본 좌측 백악마루(북악산의 정상) 봉우리와 우측 멀리 삼각산

(북한산)의 보현봉 봉우리와 능선이 보인다. 

 

 

  성벽 을 지나다 보면 돌에 글을 새겨놓은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는 공사구역 표시와 공사 담당

자 이름, 축조한 날자 등을 적어놓아 이때도 공사 실명제를 실시한 것을 볼 수가 있다. 당시 성곽

공사를 위해 조선 팔도 각 지역의 사람들은 동원하였음을 돌에 새긴 글로써 확인할 수가 있다. 

 

 

 

  청운대를 지나 조금 가다보면 길가에 상처입은 소나무를 볼 수가 있는데 이는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부대 소속의 무장공비 김신조(외 30명) 일당이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침투하여 우리

군경과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던 흔적이다. 이때 수령 200년이던 이 소나무는 15발의 총탄을 받았

으며, 그때의 자국이 40년이 지난 지금도 상처가  남아 있다. 이후 이 소나무를 "1.21 사태 소나무

"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청운대에서 백운산으로 이어지는 서울성곽 주변에는 으아리, 엉겅퀴, 금마타리, 바위채송화 등...

야생화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고, 능선을 타고 불어오는 시원한 산바람은 등줄기에 흐른 땀을

을 훔쳐주어 산행길에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 주었다.

 

 

 북악산의 정상 표지석에는 백악산이라고 적혀 있었다. 북악산은 서울의 주산으로 일명 백악, 면

악, 공극산이라고도 했으며 경복궁의 뒤쪽에 위치하고 남산과 대치하여 북쪽에 있다하여 북악산

이라고 한다.

 

 

  북악산 정상에서 주변 조망하는 방문객들, 멀리 삼각산(북한산) 의상능선이 보이고, 서울 시가

지와 앞뒤 사방이 스원스럽게 열려있어 도성의 전망대라 할 수 있다.

  

 

  북악산의 정상에서 창의문으로 향하는 길은 경사가 심한 내리막길이어서 조심해서 내려가야

했고, 노약자는 창의문에서 출발하여 올라오면 오름길이 힘들기 때문에 홍련사, 말바위 쉼터쪽

에서 탐방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듯 하다. 우측 성벽넘어에는 잦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고

큼직한 잦이 탐스럽게 열린 것을 볼 수 있었다.

 

 

  서울 성곽에는 4대문이 있었고 그 사이에 4소문을 두었는데 창의문(義門)은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에 있는 북소문으로 '올바르게 하는 것을 들어나게 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북소문으로 불

러오지는 않았고, 이곳 계곡의 이름을 빌어 자하문이라는 별칭으로 불려 왔다. 위치는 서울시 종

로구 세검정 근처이며, 4대문 중 북대문인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었으므로 북쪽으로 통행하는 사

들은 반드시 이 문을 거쳐야만 했었고, 서울의 4소문 중에 유일하게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

있는 곳이기도 하다.

 

  

                                           

 

                                     - 북악산 서울 성곽에서... 2007. 6. 26. eb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