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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의 쉼터

38. 하느님 나라가 오심 본문

[♡ 자유와 평화 ♡]/가톨릭 基本敎理

38. 하느님 나라가 오심

자유인ebo 2011. 5. 20. 14:01
 
 
 

하느님 나라가 오심

        

 

    

◈ 영원한 삶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수고와 사랑과는 관련 없는 기쁨이나 행복이 아니다. 현세 생활에서 우리가 받은 모든 축복은 모든 것의 절정이고, 의미를 주며 완성을 가져오기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하는 인간의 활동은 중요하고 존엄한 것이다. 재능과 정성을 들여 사랑의 봉사를 실천하고 이 세상을 재건하려는 인간 노력은 하느님 나라의 성장에 이바지할 수 있다. 그리고 "주님이 오실 때에 그 나라는 완성될 것이다"(사목헌장 39).
 

 

1. 세상의 변화 : 종말
 

  이 세상이 끝날 것이라고 함은 세상이 완전히 전멸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는 세상이 사라져 가며(1고린 7,31), 이 세상이 근본적으로 변형될 것임을 뜻한다. 하느님 곁에 머무를 이들이 받을 최종 영광에 부적당한 것은 모두 소멸되고, 소중하고 좋은 것은 모두 만발할 것이다.


  이렇게 물질세계 자체도 어떤 의미로는 파스카 축제에 참여할 것이다. 물질세계도 죽거나 소멸하여 풍족한 재생에 이를 것이다. "천체는 타서 녹아 버릴 것이고,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2베드 3,10). 그러나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2베드 3,13).


  사랑 위에 세워진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사랑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바칠 우리의 가장 중요한 공헌이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는 누구나 주님과 함께 내세에 있을 즐거운 잔치에 참석할 것이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선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 이제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과 마지막이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생명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겠다"(묵시 21,4-6).


  그때에는 우리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가 아니고 "얼굴을 맞대고"(2고린 13,12) 하느님을 뵈올 것이므로 우리는 아주 다른 존재일 것이다.


  영원한 삶에 대한 열망은 현재생활을 포기하거나 우리의 임무를 소홀히 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 열망은 현세는 시작에 불과하며 현세의 저변에는 앞으로 올 것이 자란다는 것을 인정함이다. 우리가 내세에 희망을 갖고 기대하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이 완성되기를 원하며, 세상의 열망이 충족되고, 생명이 완성되기를 소망하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
 

  가톨릭 신앙은 언제나 신뢰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희망을 걸고 기대하여 왔다. 그리스도는 여러 가지 양식으로 당신 백성에게 오시나 가톨릭 신앙은 슬픔을 끝내고 사람들의 희망을 실현시킬 그리스도의 결정적 재림을 기다렸다. 그리스도 친히 당신은 주님이요 재판관으로서 영광스럽게 재림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마태 16,27;26,64).


  우리는 예수님이 언제 영광 속에 오실지 모른다. 재림의 그 시각은 하느님께서만 알고 계시나 그 시각은 생각지 않은 때에 올 것이다(2베드 3,10). 가톨릭 신앙은, 역사의 종말을 묘사하기 위하여 성서, 특히 묵시록에 나오는 상징적 표현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자의적 해석은 계시를 곡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많은 이들이 묵시록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예언하였고, 그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선전에 현혹되어 커다란 사회 문제를 일으켰다.


  예를 들어 여호와의 증인 교회와 일부 개신교회는 마치 자신들이 종말에 대한 계시를 받은 양 선전하면서 자기 교회를 믿어 구원을 얻으라고 주장하였으나, 그들이 예견한 날에 종말이 오지 않았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성서와 교회생활에 충실한 이라면 이들의 허황된 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들 종말론자들은 사회 생활을 등지고 개인의 구원 문제만을 강조함으로써, 하느님의 정의를 통한 세상의 구원을 선포하는 복음과는 거리가 있다 하겠다.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는 신부처럼, 하루하루를 마치 마지막날처럼 하느님의 뜻에 따라 바르고 착하게 사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종말에 대한 자세라 할 것이다.

 

 

3. 천년왕국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늘나라로 들어가시기 전에 지상의 나라를 천년 동안 성인들과 함께 통치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런 '천년왕국설'은 신앙의 메시지와는 먼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는, 사실 다가올 완성에 대한 갈망이다. 재림은 은총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활동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이미 실존하는 나라를 공포하는 것이기도 하다(요한 12,31).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현재 우리 안에 이미 있는 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은 완성할 것이다. 재림 때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이 최대한으로 빛날 것이다. 그 부활의 힘은 그를 믿는 모든 무리에게 연장되어 그들을 죽음에서 부활시킬 것이다.

 

 

4. 육신의 부활
 

  "하느님의 나팔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먼저 살아날 것이다"(1데살 4,16). 구원된 이들이나 구원을 배척한(요한 5,29) 이들이나 모든 인간은 자기의 육체를 갖고 부활할 것이다. 심판날에 모든 사람은 육체를 갖고 하느님의 심판대에 나타나서 자신의 행동에 관한 보고를 드릴 것이라고 교회는 굳게 믿고 늘 가르쳐 왔다.


  "만일 죽은 자가 부활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셨을 리가 없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1고린 15,13-14). 부활 신앙이 바울로 사상의 핵심 중의 하나이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우리를 그분 곁에 앉히시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2고린 4,14).


  그때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다"(요한 11,25)라는 그리스도의 약속이 채워질 것이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창조자(요한 1,4)이시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시며, 그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0). 최후심판 때에 우리의 육체는 변할 것이다. 어떻게 변할 것인지는 확실히 모른다.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부활의 원형이다. 부활한 예수님의 육체는 그가 십자가 위에서 수난당하고 죽으실 때에 있던 바로 그 육체이다. "내 손과 발을 보아라. 틀림없이 나다!"(루가 24,39). 다른 점은 부활한 예수님의 육체는 변형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가 되었다"(1고린 15,45).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에로 부활할 모든 사람은 변할 것이다. 각 사람은 영혼과 육신을 가진, 전과 같은 사람으로서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각자의 생명은 더 넓어지고 깊어질 것이다.

 

 

5. 공심판 (公審判) 


 공심판이란 무엇인가?
   공심판이란 육신이 부활한 후 예수께서 천사들과 모든 사람 앞에 각 사람의 사심판의 결과를 공포하시는 것을 말한다.
 
 

  공심판은 각자가 죽은 후에 받은 사심판의 요약이 아닐 것이다. 이 최후심판에서 하느님은 당신 나라의 마지막 단계인 하늘의 공동체를 설립하실 것이다. 그때에 인간은 어떻게 사랑했느냐에 따라 심판받을 것이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다"(마태 25,35). 사람들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따라 심판받을 것이다. 그는 당신 사랑에 자유로이 응답하도록 누구나 생명에로 초대한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큰 계명을 지키고,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심판하실 분은 하느님이시다. 모든 사람의 마지막 심판에 있어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구속 사업에서 맡은 각자의 역할에 합당한 양식으로 참여할 것이다. 사람의 최상 심판관이 되실 분은 사람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심판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구속자로서의 당신 사업을 완성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중심이고 주님이란 것이 심판 때에 드러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그분에게 굴복당할 때에는 아드님 자신도 당신에게 모든 것을 굴복시켜 주신 하느님께 굴복하실 것입니다"(1고린 15,28). 그 시각에 그리스도 안에 죽은 모든 사람이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환히 알게 될 것이다.

 

 

6. 하늘나라
 

  하늘나라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 양식이고, 하느님의 생명과 기쁨에 참여함이다. 하늘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나, 하느님은 사람들이 당신과 함께 누릴 영광스러운 생활을 장식하기 위해 육체를 가진 피조물에게 광채 가득한 곳을 제공하실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교회는 하늘나라가 지상에서 일정한 거리에 떨어져 있다고 가르치지 않으며, 또한 하늘나라의 장소를 찾아내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는다. 다만 하늘나라는 하느님과 부활한 그리스도의 실재이며, 하느님의 백성과 그리스도가 함께 살며 누리는 기쁨이라고 가르친다.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인간이 생명의 완성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현세에서도 우리는 믿음, 희망, 사랑으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한다. 현세에서 우리가 누리는 영원한 삶은 씨앗이고, 약속에 불과하다. 그때에는 우리가 하느님을 뵈올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없고, 하느님의 약속이 다 실현될 것이므로 바랄 것이 없고, 아무도 빼앗아가지 못할 기쁨을 가지고 사랑할 것이다.


  영원한 삶은 인간 상호간에 흐르는 깊은 사랑의 생활일 것이다. 우리는 위격적인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에 직접 참여하는 인격체로서 남아있을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뵙는 은총을 받아서 우리가 하느님과 비슷할 것이나, 하느님은 영원히 하느님이고 우리는 언제나 그의 피조물일 것이다. 영원한 삶에 들어가는 사람은 지복직관을 충분히 누릴 것이나, 기쁨의 핵심은 하느님을 소유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영원한 삶이란 하느님을 완벽하게 소유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하느님을 믿음으로 보지 않고 "얼굴을 맞대고"(1고린 13,12) 뵈올 것이며, 하느님께서 지금 여기에 살아 계심을 직접 파악하고 즐기므로, 참으로 행복하고 영원한 삶과 안식을 갖는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강하게 하여 주시고, 창조된 본 모습으로 변모시켜 주실 때에 우리는 자신을 성부, 성자, 성령에게 온전히 바치면서 삼위가 느낀 즐거움을 맛볼 것이다.

 

  하늘나라에서 비로소 우리는, 순례자와 이방인의 신세를 면할 것이고(히브 11,13), 마음을 탁 놓을 수 있는 곳에 왔다는 것을 알 것이다. 우리가 마음 전체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영원한 삶에 도달할 때에 우리의 유배는(1베드 1,17) 끝날 것이다. 그곳이 바로 우리의 본고향이다. 거기에서 소중한 것은 아무 것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육체는 부활 때에 복구되고, 현세에서 거룩하고 소중하던 것이 모두 새 하늘과 새 땅에 보관될 것이다.


  각자의 공로에 따라 하느님을 얼마나 똑똑히 보고 느끼는가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각자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기쁨으로 충만되어서, 그런 차이가 알려져도 질투없이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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